단치히 회랑 문제 세계 2차대전의 도화선은 단치히 회랑 문제였다. 베르사유체제가 개막하면서 폴란드가 독립하게 된다. 이때, 폴란드 북부지역이자, 독일제국과 국경 지역 중 하나였던 단치히는 자유시가 된다. 현재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인 이지역은 과거 쾨니히스베르크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동프로이센의 주요 도시중 하나였다. 히틀러는 대항 도시가 발트해 해상권을 장악할 수 있는 주요 도시임과 더불어 과거 동프로이센의 중심지인 단치히를 폴란드에 요구했다. 뮌헨 협정 당시 이 문제가 제기 되었으나 폴란드가 이 땅을 순순히 내줄리가 없었다. 히틀러와 폴란드는 협정에서 단치히를 두고 오랜 기간 협상했으나 결렬되고 히틀러는 이 땅을 무력으로 차지할 것이라고 이를 갈면서 협정에서 나온다. 사실 이 문제가 없었으면 히틀러의 첫..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상이몽 히틀러와 스탈린, 이 두사람은 서로를 넘어야될 산으로 생각했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꿈꾸는 레벤스라움 건설을 위해서 동유럽으로 확장이 필수불가결했다. 이 점을 스탈린이 모를리 없었다. 히틀러의 끝없는 팽창의 목적지는 과거 러시아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스탈린은 이런 위기를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으로 해결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스탈린을 빼놓고 뮌헨 협정을 체결하며 서구 국가들이 동유럽의 안전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탈린은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뮌헨 협정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이 소극적인 선택을 이어나가자 히틀러는 전쟁에 대한 대비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했다. 히틀러가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과거 1차대전이 동서로 나누어진 전선..
국공 합장과 전쟁 준비 중국은 당시 장제스를 중심으로 국공내전이 한창이었는데, 일본군의 갑작스러운 중국 공격은 중화민국과 공산당 국가에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결국 중화민국의 주석 린썬과 공산당 지도부 주더, 저우언라이가 모여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루는데 성공 한다. 중국의 위기의식을 정반대의 두 세력이 서로 손을 맞잡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결국 장제스를 새로운 주석으로 하는 국방최고회의가 열리게 된다. 화북에 국한 되어 있던 일본군의 도발은 상해를 기점으로 화중지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이 상해를 침공하기전 홍차오 공항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군 중위 였던 오오야마 이사오가 홍차오 공항 인근의 군사시설을 정찰하기 위해 사이토 요조 일병과 같이 차를 운전해 홍차오 공항으로 난입한 사..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나치 정권 내부에 있는 모든 장성들이 전쟁에 찬성하지는 않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나치 정권 내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명은 독일 국방군 원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육군 장관 베르너 폰 프리치 였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위해 비밀 회의를 소집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인원이 블롬베르크를 비롯해, 육군 사령관인 프리치,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이었다. 이 회의에서 블롬베르크와 프리치는 호전적인 히틀러의 정책을 비판했고, 히틀러는 이 둘에 대해 의견 차이로 갈라서게 되었다. 1938년 1월 블롬베르크는 에르라 그룬이라는 26세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데, 둘의 나이차는 무려 33살이었다. 블롬베르크를 평소에 맘에 들지 않아..
히틀러와 슈슈니크의 대립 돌푸스가 살해된 이후 슈슈니크는 총리에 올라 오스트리아 내의 나치당과의 전면전을 돌입했다. 나치당은 줄곳 독일과의 합병을 주장했는데 슈슈니크는 이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했고, 히틀러는 당연히 슈슈니크가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에 군침을 흘리던 나라는 독일뿐 만이 아니었다. 바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역시 오스트리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양국은 지속적으로 오스트리아 문제에 개입하며 서로의 이권 챙기기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와중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게 되자 다른 나라로 부터 큰 비난을 받게 된다. 이탈리아는 국제적 고립을 막기 위해 히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에서 손을 떼고, 절호의 기회를 잡은 히틀러는 더욱 더 거세게 오스트리아를 ..
스페인의 역사 '무적함대(Armada)'는 스페인의 전성기를 상징하던 단어였다. 스페인 축구국가대표팀을 무적함대라고 불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황제 펠리페 2세는 콜럼버스를 시켜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무적함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멕시코와 페루를 시작으로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해 거대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에스파냐 왕국은 카스티야 지방을 중심으로 점점 커져나갔다. 카스티야 중심의 정권은 자연스레 주변 지방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먼저 반응한 지역은 카탈루냐 였다. 카탈루냐 지방은 포르투갈의 독립에 자극을 받아 1640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카탈루냐에 이어 안달루시아, 나폴리, 아라곤 등 지방의 지속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스페인은 반란 진압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정책 레벤스라움(Lebensraum)은 독일어로 생활권을 의미한다. 이전부터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생활권이 늘 좁다고 느껴왔다. 서부 유럽 대부분 국가들이 게르만 족 출신 국가이기는 하지만 늘 게르만 족의 중심은 자신들이라 생각해왔던 독일인들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세계 곳곳으로 팽창하는 것을 엄청 부러워했다. 게르만 족의 피해의식은 결국 세계 1차대전으로 이어졌고, 독일은 패전의 멍에를 쓰게 된다. 이로서 독일인들은 더더욱 피해의식이 더 커졌고,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히틀러는 동방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게르만족의 원래 터전은 서부 유럽이 아닌 동부 유럽이었다. 이들은 과거 훈족의 이동으로 점차 유럽 서부와 남부로 쫓겨나게 되어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이..
나치 독일의 시작 장검의 밤으로 독일에서 대숙청이 일어났다. 히틀러의 정권을 위협할 수 있었던 에른스트 룀,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모두 죽었고, 곧이어 고령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역시 죽게 되며 히틀러의 권력을 위협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독일 전 국민이 그를 향해 나치식 경례를 하게 되었다. 전대미문의 숙청에 놀란 건 독일 국내만이 아니었다. 유럽 전역에서 히틀러에 이런 행보에 놀랐다. 대부분의 많은 나라들은 히틀러가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수많은 사람은 죽인 것을 비난했다. 히틀러를 비난한 국가는 영국, 프랑스 등 세계 1차대전 승리로 베르사유 조약에서 이득을 본 국가들이었다. 양국은 다시 한번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특히 양국은 한번의 큰 전쟁을 통해 많은 국민들이 죽어나간걸 목격한..
수권법과 히틀러 독재의 시작 1933년 3월 히틀러는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자신의 독재 체제 기반을 만들었다. 물론 이런 수권법 자체에 통과에 모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사회 민주당의 오토 벨스는 히틀러의 수권법에 맞서 반대연설을 펼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히틀러의 수권법이 독일인들의 자유를 빼았고, 국가를 국난에 몰아 넣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반대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명예를 빼앗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정치인과 국민들이 모두 오토 벨스 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 내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나치 당이 원내 제1정당으로 등극할 수 있던건, 그가 당시에 독일 내에서 인기기 상당 했기 때문이다. 물..
바이마르 공화국의 새 총리, 프란츠 폰 파펜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임명한 세 총리 프란츠 폰 파펜은 전형적인 지연관계에 의한 선임이었다. 파펜은 과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 선거에 나갔을 때, 그에게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했고 둘은 친분을 쌓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군소 정당인 나치당과 공산당의 약진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회에는 절대 강자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놓이다 보니 정당에 오래 소속된 인물 중에서 총리가 나오긴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팔순을 넘긴 힌덴부르크의 노망도 파펜 선임에 한 몫 했다. 힌덴부르크는 평소에도 발랄하고 유쾌한 파펜을 매우 좋아했다. 이러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없는 프란츠 폰 파펜이 바이마르의 새로운 총리로 임명된다. 파펜 총리는 4달 반이라는 짧은 임기동안 안좋은 정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