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분열과 유산의 파괴를 야기한 동유럽의 재앙 VS 지중해의 새로운 지배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등장 3차 십자군 당시 서방 세력의 화려한 군단이 뭉쳤지만 실속은 없었다. 그나마 리처드의 노력 끝에 멸망 직전의 예루살렘 왕국을 간신히 살려 내는데에만 그쳤다. 세번의 십자군을 겪으면서 서방세력들은 십자군 자체에 대한 강한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군주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머나먼 중동으로 향했지만 전혀 소득 없이 돌아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교황청은 여전히 십자군 국가들을 유지시키고 싶었다. 100여년 가량 지켜온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빼앗긴데다가 십자군 국가도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레반트 일대를 전부 이슬람 세력에게 내줄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서방 ..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신흥 세력에 대한 진압 VS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조선의 가톨릭 대규모 탄압 병자호란이 끝남에 따라 조선은 청의 거대한 세력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서방세력과도 잦은 교역을 하던 청나라 였기에 조선 내부에서도 그들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 힘을 길러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방의 문물이 서서히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중에는 한문으로 작성된 성경 책도 있었다. 서구의 선교사들이 청의 백성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데, 이 책이 조선에까지 들어오게된다. 이 책들이 재야 사이에 서서히 퍼지게 되고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들 사이에서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게 된다. 이들은 중국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기도 하면서 조선에 가톨..
바르바로사의 원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동로마 제국의 이사키우스 1세는 쉽게 그들에게 길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사이가 안좋았던 양국은 애초에 서로에게 이득이 될 행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화가난 바르바로사가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반환 받는 조건으로 길을 터주게 된다. 바르바로사의 대군은 이크니온으로 향했다. 원래 신성 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은 동맹 관계였지만, 서로의 이해관계 앞에서 적으로 변했다. 바르바로사의 대군은 룸 술탄국을 공략한다. 순식간에 이크니온을 점령한 십자군은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항복을 받아내고, 통행권을 보장받게 된다. 십자군은 다음 목표인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던 와중 1190년 6월 10일, 바르바로사가 소아시아 지역의 살레프 강을 건너던..
구 체제 붕괴의 시작이자 세계 역사의 변곡점 VS 종교적 사상 보존을 위한 성스러운 이념 전쟁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후한말 중국, 16세기 말 일본, 고려 말기 한국을 보더라도 난세에 특히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2세기 말 유럽과 이슬람도 그랬다. 11세기부터 예루살렘과 동로마 제국을 두고 붉어진 양 세력간의 다툼은 각지에 숨어있던 영웅들을 한데 모으는데 성공한다. 3차 십자군 전후로 중세 시대가 변곡점을 가져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동로마제국의 중흥을 이끈 콤니노스 왕조는 원정 이후 왕조가 끝나며 제국의 몰락을 불러왔다. 유럽의 제후들도 더이상 교황을 믿지 않았으며 가톨릭 봉건제에서 벗어난다. 이슬람 역시 술탄국이 몰락하고 튀르크 족이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게된다. 유..
전 후 대한민국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VS 헌법을 무시하고 권력을 쟁취한 독재 시대의 시발점 사사오입.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말이다. 말 그래도 숫자 4는 내리고, 5는 올린다는 반올림의 법칙을 의미한다. 이 말이 유명해진 계기는 다름아닌 1공화국에서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때문이다. 6.25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입법과 사법체계를 무너뜨리고 교모하게 자신의 권력을 이어간 사건이다.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한 대국민 사기극이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무너진 계기이자 대통령 독재 체제의 시발점이 된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 알아보자. 사건 경과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이슬람의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 몰락의 시발점 VS 성지 보호 및 중동 지역 안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전쟁 1차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의 완승이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예루살렘은 너무 멀다. 십자군 국가들은 명맥상으로 교향을 지지 했지만 얼마나 불안한 충성 관계가 지속 될지 모를 일이다. 더불어 이슬람 세력이 반격을 준비하면서 교황청은 성지를 다시한번 이슬람에 뺏길 위기감에 휩싸인다. 어렵게 얻은 성지를 쉽게 뺏길 순 없다. 결국 교황은 유럽 제후들에게 다시한번 호소하게 된다. 불안했던 십자군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고, 강대해진 이슬람 세력의 기세를 다시 한번 꺽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다. 교황의 손짓으로 다시한번 유럽이 아랍으로 움직인다. 주요 사건 1138년 4월, 시리아 샤이자르에서 요한네스가 장기에게..
사림 견제를 위한 연산군과 훈구 세력의 지나친 학살 VS 왕과 국가를 부정한 사림들에 대한 정당한 처벌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 그리고 세조를 도와 조선 권력에 중심으로 오르는 세력을 바로 훈구파라고한다. 세조와 훈구파는 기존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을 수호하며 신권 중심의 조선 흐름을 바꿔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권력을 바탕으로 훈구파들은 조선 권력의 중심의 권력을 대물림 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타 세력의 도전을 저지 했다. 누군가 권력을 잡으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대 세력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비난하는 세력들이 재야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과거 조선 건국시 이를 부정하고 재야로 내려간 온건 사대부의 후예들이었다. 훈구파 세력이 성리학을 전혀 수..
교황과 그리스도의 부흥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 VS 성지에 미쳐버린 가톨릭의 광란의 이슬람, 유대인 학살 전쟁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프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했다.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며 번영을 이끌던 동로마 제국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현 이스탄불)도 더이상 안전하지 못했다. 셀주크 재국은 레반트 지역 깊숙히 들어와 콘스탄티노플을 코앞에 두고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그들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은것 처럼 보였다. 반면 바티칸의 교황청의 기세는 나날이 강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조차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로마 시대에 교황청을 세운 이후 가장 강력한 교황권이 유지되고 있었다. 유럽의..
외세의 힘을 끌어들여 성공한 반쪽짜리 통일을 만든 왕 VS 외교술로 절체절명의 신라를 구하고 삼국을 정복한 명군 이번엔 삼국시대 인물 한명을 다뤄보도록 하자.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몇번 시대적 흐름이 크게 바뀐 적이 있는데 오늘 알아볼 인물 역시 이 흐름을 바꾸는데 크게 일조한 인물 중 한명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통일 군주이다. 어찌보면 한반도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라면 국민으로 부터 영웅적인 찬사를 받고 으레 지폐 모델이 되어야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람의 평가를 보면 극과 극으로 나뉜다. 누구는 앞서 말했듯이 한번도 역사에 위대한 역사를 세운 왕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대한민역 역사에 가장 안좋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말..
이슬람과 셀주크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장군이자 통치자 VS 1세기만에 멸망한 속빈 강정 셀주크 제국을 만든 주범이자 전쟁광 현 시점의 많은 중동 국가들은 오일 머니에 힘을 입어 다시 성장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구의 헤게모니를 쥔 국가는 미국과 유럽일 것이다. 하지만, 중세 유럽으로 돌아가자면 지금의 강대국 역할을 하는 국가는 북미나 유럽이 아닌 바로 중동 지역이었다. 특히나 중세는 중동 지역의 힘이 대단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럽에게 공포의 대상을 한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셀주크 제국이다. 셀주크 제국의 팽창은 유럽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이들과 국경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더욱 그랬다. 이는 동로마와 셀주크 국가간의 대결로 그친 것이 아니라 카톨릭과 이슬람의 종교적 색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