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반격 이탈리아 군의 공세를 막아낸 그리스 군은 반격을 계획한다. 그리스 군은 알바니아의 영토인 코르치아와 사란데로 향했다. 그리스 군의 총 사령관은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였다. 11월 22일 그리스가 코르치아를 점령했고, 11월 30일에 이르자 그리스 군은 알바니아의 영토 4분의 1일 점령한다. 바돌리오 원수가 걱정했던 부분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타국에 원정을 보낼 정도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폭설이 내리고, 추위가 지속되자 그리스도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12월에 들어서 알바니아 공세를 종료했다. 하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이탈리아를 저지한 것에 크게 열광 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겨우 한달만에 그리스에서 공세를 실패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스 ..
베니토 무솔리니의 등장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그는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포를리의 작은 마을인 프레다피오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게 된다. 매우 반항적인 아이었던 그는 교사에게 대들다가 퇴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워낙 학업 성적을 뛰어나 새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졸업 할 수 있었다. 병역 기피를 위해 스위스로 이민을 갔지만, 스위스는 그를 추방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군대에 지원해 1904년부터 1906년까지 2년간 군복무를 수행한다. 제대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당에 들어가 활동을 이어가며 열렬한 사회주의 신봉자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와중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면..
국경을 넘는 이탈리아 군대 이탈리아의 원수 로돌프 그라치아니의 지휘 아래 총 12개의 사단이 이집트 국경을 넘었다. 이들의 목표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쳐서 수에즈 운하를 차지해 인도양까지 세력을 넓힐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수비대보다 4배나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이집트에서의 낙승을 예상했다. 수많은 탱크와 오토바이 그리고, 수송 차량이 지중해 연안을 달리고 있었다. 이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집트 해안 수비대는 이탈리아 군을 전혀 막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전차들 앞에서 그들의 전력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보병 부대가 전차 부대의 뒤를 따랐지만, 굳이 합류할 필요가 없었다. 전차부대 만으로도 이집트의 수비대는 초토화 되고 있었다. 이들은 겨우 이틀만에 130Km를 달렸다. ..
무솔리니의 선전 포고 히틀러가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을 완전히 휩쓸고 있었던 1940년 중반. 같은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타국보다 한발 늦게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 비해 빈약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합병한 국가는 리비아-에티오피아 축선의 몇몇 약소 아프리카 국가와 발칸반도의 알바니아 왕국 뿐이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을 때,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해 발칸반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한다면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들이 연합국에 가담할 것이 뻔했다. 그 사이 히틀러는 프랑스..
영국의 고독한 전쟁 다시 시계를 돌려 1941년 3월로 돌아가자. 독일의 공습을 간신히 막아낸 영국은 여전히 대서양에서 외로운 전쟁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독일의 U보트는 이런 영국의 고립에 주요 원인이 되었다. 독일은 U보트와 샤른호르스트, 비스마르크 전함을 이용해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작전을 지시했다. 독일은 베저위붕 작전에서 참여 했던 귄터 뤼첸스 중장에게 지시하여 비스마르크 전함을 이끌고 통상 파괴작전을 전개한다. 뤼첸스는 나치 독일의 해군 제독인 카를 되니츠와 해군 사관학교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다. 되니츠는 뤼첸스에게 U보트와 많은 양의 연료를 지원했다. 그리고 그에게 비스마르크의 승함을 지시하고, U보트와 긴밀히 연락할 수 있는 지휘권을 주웠다. 그만큼 친구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던 되니츠는 그에..
대서양에서의 두번째 전쟁 1940년 6월 프랑스가 항복했다. 이제 독일은 프랑스의 항구들을 차지하며 해군 병력을 대서양으로 보낼 만반의 준비를 한다. 독일군은 프랑스의 괴뢰정부인 비스 프랑스와 협정을 맺고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항구를 적극 활용해 영국을 압박한다. 프랑스의 항구들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독일의 항구인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 영국까지는 거리가 꽤 멀다. 하지만 로리앙, 보르도와 같은 프랑스 항구에선 쉽게 대서양으로 해군 병력을 보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노르웨이 나르비크에서 벌어졌던 첫번째 대서양 전쟁에 이어 두번째의 대서양 전투가 시작될 준비가 끝났다. 해군 병력이라면 영국도 매우 강했다. 이미 나르비크에서 나치 독일의 해군을 격퇴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해상에서의 전쟁은 자신있었다...
Keep Calm and Carry On 독일군의 런던 공습은 꽤나 무서웠다. 히틀러는 9월 21일을 바다사자 작전 수행일로 선언했다. 이를 위해 9월 17일 까지는 런던의 공군 병력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기를 바랬다. 9월초와 중순을 거쳐 런던은 완전히 폐허로 변해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런던 대공습을 받은 영국은 당황했다. 처칠은 시민들을 독려했다. 영국 시민들은 포격에 있는 날 지하철에 몸을 숨기고 대피했다. 그리고 기간 시설들을 유지하기 위해 이번엔 조종사가 아닌 소방관들이 런던 곳곳을 돌아다니며 방화 작업에 나섰다. 괴링은 영국 왕국까지 폭격을 지시했고, 영국의 대응이 미흡한 것을 보곤 매우 흡족하며 영국 공군의 괴멸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런던 시민들의 항전 의지는 대단했다...
영국 공군의 야전 지휘관, 키스 파크 독일은 지속적으로 영국의 비행장을 공략해왔다. 독일 군의 공격은 프랑스와 인접한 영국 남동부 비행장이 주 목표였다.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공군 사령관은 영국 제11비행단 지휘관 키스 파크 소장이었다. 1차대전 에이스 조종사 출신인 키스 파크는 독일 공세를 막기위해 Big Wing 전술을 도입하게 된다. 이 전술은 일렬로 퍼진 기존의 항공 편대와 다르게 좌우측에 힘을 실어 적의 전진을 지연시킨다. 그 사이 적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전술이었다. 기존의 일률적인 공군 전술을 깬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이를 이용해 키스 파크 소장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독일 항공기를 잡아 낼 수 있었다. 비록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보다 3배가 넘게 출격해야 하는 전술이었지만, 영국 입장에선 유일..
1940년 6월, 지옥불 모퉁이 7월 10일 바다사자 작전 이전에도 양국은 이미 도버해협에서 전초전을 진행했다. 양국 모두 이 시기에는 전력을 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진 못했다. 하지만 독일 군 입장에서는 도버 해엽에서의 제공권 장악이 필요했고, 영국 역시 제공권 수호가 필요했다. 게다가 영국은 아직 이렇다할 공중 전투를 경험해보지 못해 본격적으로 본토에서의 항공전 이전에 경험을 쌓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양국은 1940년 6월에 약 서너차례의 교전을 펼쳤다. 물론 전면전은 이뤄지지 않았기에 양측의 손실은 크지 않았다. 양국의 조종사들은 이번 교전으로 양측의 전투기가 실제로 얼마나 강력한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특히나 독일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bf109가 세계 최고의 전투기라고 자부..
연합국의 절망적인 상황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드 골 소장과 구데리안의 항명 등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전쟁에서 이정도로 상대를 압도하기란 쉽지 않다. 그로 인해 1940년 여름 히틀러와 나치당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는 비단 독일 내에서의 인기로 그치지 않았다.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독일과 동맹 조약을 맺으며 추축국으로 들어간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도 반 강제적으로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된다. 무솔리니 역시 히틀러에 감명 받아 자신의 야욕을 펼치기 위해 곧바로 아프리카와 그리스로 침공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자. 반대로 연합국은 절망적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포병을 가지고 있다는 프랑스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영국과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