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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다우딩



1940년 6월, 지옥불 모퉁이


  7월 10일 바다사자 작전 이전에도 양국은 이미 도버해협에서 전초전을 진행했다. 양국 모두 이 시기에는 전력을 다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력을 다하진 못했다. 하지만 독일 군 입장에서는 도버 해엽에서의 제공권 장악이 필요했고, 영국 역시 제공권 수호가 필요했다. 게다가 영국은 아직 이렇다할 공중 전투를 경험해보지 못해 본격적으로 본토에서의 항공전 이전에 경험을 쌓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양국은 1940년 6월에 약 서너차례의 교전을 펼쳤다. 물론 전면전은 이뤄지지 않았기에 양측의 손실은 크지 않았다. 양국의 조종사들은 이번 교전으로 양측의 전투기가 실제로 얼마나 강력한지 몸소 느끼게 되었다. 특히나 독일 조종사들은 자신들의 bf109가 세계 최고의 전투기라고 자부했는데, 막상 영국의 스핏파이어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양측의 교전은 항공기 성능보다는 조종사의 실력으로 승패가 좌우 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양측은 6월 도버 해협 상공에서 몇차례의 전초전을 치뤘고, 사람들은 이 곳을 지옥불 모퉁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영국의 전투기 허리케인



본토 항공전의 시작


  윈스턴 처칠이 말한 영국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7월 10일 독일의 70여기의 전투기가 폭격기가 영국 본토를 향했다. 이는 영국의 레이더망으로 빠르게 소식이 전해졌다. 이들의 목표는 바다사자 작전 개시를 위한 영국 해안가와 항로에서의 제공권 장악이었다. 영국 공군 역시 그동안 그렇게 아껴두었던 에이스 조종사 들과 50여기의 스핏파이어를 출격시키며 독일의 접근에 대응했다. 도버 해협 상공에서 양국의 조종사들이 맞붙었다. 이 교전은 약 30분간 이어졌고, 독일은 총 4기의 전투기를 손실했으며 영국은 3기의 허리케인과 1척의 수송선의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다음날 다시 바로 출력했다. 이번에도 독일은 30기의 전투기를 파견하는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이번에는 영국은 단 9기를 파견했고, 2기의 스핏파이어의 손실이 있었다. 독일은 지속적으로 30여기 이상의 대규모 공세를 지속적으로 펼쳤고, 양측의 손실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비슷한 교환비로 항공기와 조종사의 손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전쟁이 7월 10일 개전 이후 약 한달간 계속된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은 45대의 스핏파이어와 64대의 허리케인의 손실을 보였다. 반면 독일은 53대의 bf109를 잃었고, 급강하 폭격기를 비롯해 약 100여대의 전투기 손실을 기록했다. 



긴급하게 출격하고 있는 영국 조종사




독일의 방심


  독일은 느긋했다. 비슷한 비율로 계속 손일을 하면 항공기가 2배 이상 많은 자신들의 승리가 뻔하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승리를 낙관하며 항공기 생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항공기 생산에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반면 상황이 열악했던 영국은 항공기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한대의 전투기와 조종사들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에 항공기 부품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면서 독일의 침공을 막아섰다. 항공기 뿐만 아니라 조종사를 키우는 데도 힘썻다. 왜나면 항공기 조종사들은 쉽게 구할 수 없는 초고급 인력이었다. 이들은 영국으로 망명온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 조종사들을 최대한 예우 해주며 전투에 투입했고, 항공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조기 진급 시키며 재빠르게 인원 수급도 진행했다.


  이와 더불에 독일 공군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헤르만 괴링 주변의 호언 장담으로 인한 부정확한 정보 전달에 있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제공권 장악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해 두었는데, 한달동안 영국에 효과적인 방어 덕분에 성과는 예상에 비해 크지 않은 상황이었다. 늦은 속도에 히틀러는 격분했고, 괴링의 부하들은 괴링에게 영국군의 피해를 과장하여 보고하는 지경에 이른다. 괴링 조차도 영국군이 얼마나 소실을 입고 있는지 파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진격 속도가 늦는 걸 보고 답답했지만, 괴링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프랑스-스위스 국경의 알프스 산맥 지대로 가 휴가를 보내는 등 상황을 매우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영국의 관제소



휴 다우딩의 방공 관제소


  반면 영국은 국가 수호를 위해 똘똘 뭉쳐있었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시민들을 염려 시키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영국은 조종사와 항공기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루에 같은 항공기와 조종사를 수차례 출격 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의 조종사들의 스케줄은 끔직한 수준이었다. 독일 군이 야간 비행을 시작하게 되면서 24시간 내내 대기를 해야했다. 이들은 부대에서 쪽잠을 자다가 경보가 울리게 되면 출격하는 조종사를 호명했고, 이들은 자신이 이름이 나오는 즉시 항공기로 달려가 출격을 했다. 


  영국이 독일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공군 대장 휴 다우딩이 설계한 방공 관제소 덕분이었다. 이 관제소는 약 130Km의 반경에서 레이더를 감지 할 수 있는 대규모 레이더 망이었다. 다우닝은 전쟁 시작전 부터 레이더 망의 중요성을 미리 예측하고 처칠에게 건의하여 영국 동남부 해안 전체를 커버할 수 있는 방공망 체계를 건설했다. 레이더 망은 독일 항공기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있었지만, 항공기의 고도는 알 수 없었다. 영국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독일 해안가에 정찰병을 대거 투입했고, 이들이 직접 망원경으로 독일의 항공기를 살피고, 고도를 본부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신속하고 정확한 방공 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독일은 레이더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영국이 이를 활용하여 자신들의 방어 전술에 활용한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독일은 매번 영국의 빠른 대응에 감탄할 뿐이었다.


  휴 다우딩의 별명은 고집쟁이였다. 다우딩이 처음 레이더를 활용한 방공체계 구축을 말했을 때 영국 군인들은 반신반의 했다. 레이더가 적 전투기의 위치를 정확히 예측 할 수 있었는지도 몰랐고, 그 비용으로 전투기와 조종사를 늘리는데 투입하는게 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우딩은 고집스럽게 방공망 건축을 밀고 나갔다.


  고집쟁이 다우딩의 일화는 이것만 있지 않았다. 처칠은 프랑스가 무너지고 있을 때 다우딩에게 항공군의 출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다우딩은 이것을 거부하면서 이미 무너진 프랑스를 구하는데 자국의 조종사와 비행기의 손실을 입을 수 없다고 말했다. 처칠 입장에서는 이를 잘 모르진 않았으나 외교적인 문제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연합군 전체가 와해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다우딩은 고집스럽게 공군의 출격을 거비했고, 이때 지킨 항공 전력을 본토 항공전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영국 해군에서 도버 해협으로 수송을 하고나 해상 작전을 위해 다우딩에게 항공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다우딩은 이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항공 전력을 지켰다.  

   


항공에서 전투중인 독일과 영국 항공기



영국 본토에서의 항공전


  영국은 독일의 공세를 잘 막고 있었지만, 독일이 초기에 예상한대로 서서히 독일 쪽으로 전세가 기울어 갔다. 영국은 더이상 무의미한 전투기 손실을 해서는 안된다고 파악했고, 영국 해협에서의 제공권을 포기해다. 이제 독일군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농성전을 펼치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는 바다 사자 작전 시작을 위해 영국 공군을 완전히 궤멸 시키야 한다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괴링에게 독일 본토의 항공장, 방공 관제탑, 군사 시설의 파괴를 지시했다. 이들은 이제 적기를 격추 시키는 것이 아닌 본토 폭격을 목표로 하게 된 것이다. 독일 공군 대장 알베르트 케셀링은 이와 더불어 영국의 수도인 런던을 폭격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오히려 영국인들의 결속만 다져줄 뿐이라고 이를 거부했다.


  1940년 8월 1일 히틀러는 총통 명령 17호를 하달했다. 괴링은 명령에 따라 8월 10일 영국의 주요 항공 시설을 파괴하는 작전을 계획하고, 이 날을 독수리의 날이라고 명명한다. 제 2,3 항공군 예하의 거의 대부분의 작전기를 출격 시키기로 하며 대대적인 영국 공세를 준비한다. 8월 10일 악천후로 인해 공세를 지연시켰고, 실제 공세는 8월 13일에 개시된다.


  70여기의 독일 폭격기가 영국 공군 공항을 항해 날아갔다. 영국은 레이더로 이를 감지 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독일의 병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1대의 스핏파이어를 출격 시켰다. 예상과 덜리 어마어마한 군대의 독일 부대와 마주친 영국군은 크게 당황했다. 너무 차이나는 전력으로 인해 영국은 다시 귀환했고, 독일 폭격기는 순조롭게 비행장을 폭격하고 떠난다. 비행장은 완전히 사용이 불능한 상태인 것을 확인하고 독일군은 쾌재를 불렀다. 이런 식으로 지속해서 영국의 항공장을 파괴하다보면 자신들의 승리가 눈 앞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행장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영국군이 이를 사용 가능하도록 바꾸는 시간은 단 24시간이라는 사실을 독일 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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