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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B집단군 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구데리안의 도박


  독일의 보수적인 군사 지휘관들은 여전히 구데리안의 빠른 전차전에 대해 우려했다. 이는 우려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구데리안을 해임하는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그의 상급 지휘관이었던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노력으로 다시 군단장으로 복직할 수 있었지만 어쩃든 여전히 독일의 군사 지휘관은 구데리안을 저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프랑스 침공 성공의 7부능선을 넘은 그들이었지만 여전히 내부 문제로 골머리를 썩혀가고 있었다.


  바로 구데리안이 해임된 5월 17일과 18일 이틀간 독일군은 침공을 중단했다. 히틀러는 구데리안의 빠른돌파를 걱정해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에게 침공을 잠시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히틀러는 세계 1차대전에서 독일군이 너무 빠르게 전진하다 마른에서 후위를 노출당해 패배한 기억이 있었다. 여전히 보수적인 군사관을 가지고 있던 히틀러 덕분에 프랑스는 잠시나마 찬스를 얻게되었다. 이 짧은 찬스 동안 샤를 드 골의 역습, 신임 원수 베이강의 등장이 있었다. 


  5월 19일 구데리안의 진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구데리안은 하루 사이에 영국 원정군 2개 사단을 물리치고 아미앵과 아브빌 지역을 점령했다. 구데리안의 아미앵 점령은 벨기에, 독일, 프랑스 군을 남북으로 완전히 나누게 되었고, 프랑스 군이 드디어 영국 해협에 도달한 것을 의미했다. 히틀러는 여전히 걱정했지만, 할더 원수는 끈질기게 히틀러를 설득했다. 반면, 영국 원정군 사령관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와 프랑스 원수 모리스 가믈랭은 서로 힘을 합쳐 프랑스 북부지역 구원에 나서야 했다..



프랑스 신임 원수, 막심 베이강



막심 베이강의 등장


  구데리안의 돌파로 프랑스 북부지역은 완전히 포위당했다.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역습을 계획했다. 사실 프랑스의 전임 원수 모리스 가믈랭은 조르주 장군에게 베강에서의 반격을 지시한 상태였다. 하지만 가믈랭이 실각함에 따라 그의 반격 계획은 전면 취소된다. 구데리안읜 빠르게 대서양에 도달한 만큼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고 가믈랭의 반격은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베이강은 1분 1초가 시급한 와중에 병사들의 피로를 풀기 위해 숙면을 지시하고 벨기에 국왕과 만나며 쓸데 없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5월 22일 베이강은 반격 계획을 발표했는데, 이를 본 윈스턴 처칠은 가믈랭의 게획과 다른점이 하나도 없다는 악평을 남겼다.


  베이강의 계획은 가믈랭이 이전에 말했던 대로 솜 강 남쪽의 제3집단군을 활용한 역습이었다. 구데리안의 아브빌 점령으로 북 프랑스는 포위 상태에 이르렀고, 독일 B집단군은 영국 해협에 도달할 수 있는 항구들을 하나씩 자신들의 손아귀로 넣고 있었다. 베이강은 구데리안이 만든 회랑을 끊어 내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였다. 하지만 베이강이 벨기에 국왕을 만나고 온 3일 사이에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아라스 전차전 세력도 (1940년 5월 21일)



아라스 전차전


  프랑스 육군의 실책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이언사이드는 화가 단단히 났다. 프랑스 군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접었다. 아이언사이드는 독자적으로 영국군 총사령관 고트 장군과 함께 아라스에서의 반격을 계획한다. 벨기에 국경에서 영국 해엽으로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독일군의 움직임을 끊을 필요성이 있었다. 영국원정군 BEF의 해럴드 프랭클린 장군은 고트의 명령을 받아 아라스 반격을 실행하게 된다. 5월 21일 아이언사이드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영국 원정군은 프랑스에 도달한 이후 이렇다할 전쟁을 아직 치른적이 없었다. 특히나 영국 기갑부대의 경우 온전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본래 이들은 프랑스의 전차부대와 협공하기로 계획되었지만 베이강의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프랑스군을 제외하고 단독으로 구데리안의 부대와 싸우게 되었다. 영국의 2개 전차연대가 아라스에서 독일군을 맞이했다.


  초기엔 영국 원정군의 반격이 효과적으로 먹혔다. 기존의 독일군은 영국군의 마틸다 보병전차를 막아내지 못했다. 다급해진 독일군은 88mm 대공포를 급히 가져와 간신히 전차를 막아냈다. 해럴드 프랭클린은 에르빈 롬멜의 7기갑사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롬멜은 연전연승을 하며 프랑스를 유린해왔기에 패배에 대한 위기감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영국의 아라스 반격은 기고만장했던 롬멜에게 패배의 위기감을 전달해주었다. 독일군은 영국군의 반격을 막아내기는 했지만, 분명 자신들의 전술에 위험성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다. 


  연합군 입장에서도 마냥 실패한 반격은 아니었다. 영국군은 아라스 전차전으로 2가지 희망을 보았는데, 프랑스 군의 의지를 살릴수 있었다. 프랑스 진영은 이미 패배 의식이 가득하여 나치 독일에 패배만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아라스 전차전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자신들이 영국과 힘을 합쳐 반격을 하게 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리고 또 한가지 성과는 마틸다 전차부대가 충분히 독일군 상대로 전략적인 사용이 가능하다고 본것이다. 기존의 영국군은 독일군 전차부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자신들의 무기로도 충분히 대응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전투였다.


  그리고 아라스 전차전은 히틀러에게 반격에 위기 의식을 느끼게 했고, 이는 또 하나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프랑스 공방전 주요 격전지 (출처: 구글 지도)



히틀러의 정지 명령


  아라스 전차전 이후 포위당했던 프랑스 북부 지역이 모두 독일 손에 떨어졌다. 단 한곳 덩케르크 만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히틀러의 진격 일시 정지 명령이 떨어지게 된다. 이 시기가 바로 5월 24일이었다. 히틀러가 정지 명령을 내린 이유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유추해보면 너무 깊숙히 파고든 구데리안의 군단과 후방 부대간의 거리를 조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 했던 것과 더불어 아라스 전차전에서 영국군이 성과를 내자 조금 진격 속도를 조절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 두가지 측면이다. 


  독일군 수뇌부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의 이런 지시에 당황했고, 서둘러 히틀러를 설득하여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명령이 구데리안까지 전달되는데는 하루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구데리안 예하의 부대는 칼레 점령에 성공했다. 칼레의 경우 영국 런던의 코앞에 도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요새였다. 뿐만 아니라 덩케르크와 더불어 영국 원정군이 가장 많이 병력을 보내온 항구였다. 5월 225일 칼레를 함락함으로써 영국 원정군은 덩케르크에 갇히게 되었다.


  베이강은 자신이 세운 반격 플랜을 실행할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5월 21일 프랑스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되면서 지휘 공백이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23일 계획되어있었던 반격을 미루게 되었다. 베이강은 원수로서 재빠르게 이런 문제를 대응했어야 하지만 프랑스의 대처는 미숙했다. 결국 프랑스는 자신들에게 온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날렸다. 


  영국군은 이제 더이상 프랑스를 믿지 않았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덩케르크에 갇힌 영국 원정군을 탈출 시켜 본토로 안전하게 귀환 시키는 것이 주된 목표였다. 이를 위해 영국군은 덩케르크에 더 많은 부대를 파견할 까 생각도 했지만, 이는 독일의 포위망에 갇힌 포로의 숫자만 늘려주는 꼴이 되었다. 영국군은 세계 전쟁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래없는 대규모 탈출 작전을 기획한다. 이것이 바로 덩케르크 철수작전, 다이나모 작전이다.


선박을 타기위해 대기 중인 영국 병사들


연합군의 대탈출


  히틀러의 오판은 연합군에게 있어서 엄청난 찬스로 다가왔다. 5월 26일 윈스턴 처칠의 지시아래 덩케르크 지역에 있는 연합군에 대한 탈출이 시작되었다. 영국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에 협조해 최대한 많은 선박을 구했으나 그래도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처칠을 방송에서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탈출 첫 날이 다가왔다.


  덩케르크 해안에는 당초 예상보다 더 많은 선박이 모였다. 무려 650여척의 배가 영국 해협을 건너 총알이 빗발치고 있는 덩케르크 해안으로 모였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의 비행기들이 힘을 보탰다. 독일군 전투기는 영국으로 도주하는 선박을 잡기위해 사력을 다했고, 영국 조종사들도 이에 질세라 대응 사격을 이어갔다. 영국 민간 어선들과 참전 용사들은 최대한 많은 영국인들의 귀환을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이틀간 45,000명의 병사를 구출 시키는 것이 목표였지만 실제로 탈출 시킨 인원은 3만명도 채 되지 않았다. 영국 해협의 기상악화와 더불어 독일 전투기 Ju87과 Ju88의 활약은 영국을 더욱 힘들게 만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5월 27일 히틀러가 다시 진격 명령을 내리면서 덩케르크 탈출 작전은 패색이 짙어져만 갔다.



영화 덩케르크의 한 장면



기적의 바다, 덩케르크


  5월 28일 하늘이 영국을 도왔다. 폭풍이 치던 영국 해협이 완전히 고요해졌다. 민간 어선들의 활약은 영국 내부에 선순환을 가져왔다. 더 많은 시민들이 배를 이끌고 덩케르크로 가 영국인들을 구했다. 신예 전투기 스핏파이어도 출격하면서 점점 영국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군도 이에 질세라 덩케르크 지역에 총 폭격을 가하면서 영국의 철수 작전을 방해했다. 영국 시민들을 선박 정원에 30배가 넘는 인원을 태우면서까지 영국 병사를 구원했다. 독일에게 패배만 거듭한 프랑스 군도 더이상 독일에게 질 수 없다는 집념으로 덩케르크를 사수했다. 5월 30일과 6월 1일 무려 12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영국으로 돌아가는데 성공했다.


  6월 3일 덩케르크가 독일의 손에 떨어지면서 철수 작전은 종료되었다. 덩케르크에 있던 연합군 34만명 가량이 영국으로 귀환에 성공했다. 이 숫자는 덩케르크에서 탈출 시키려는 수치에 80%에 달하는 숫자다. 철수 작전은 대성공을 거뒀다. 프랑스 전선에서 돌아온 영국 병사들은 자국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영국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영국은 이번 철수 작전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포위 당해서 독일군의 포로가 될 처지의 병력의 절반 3분의 2가량을 구원에 성공하면서 전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게다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영국 시민들은 독일에 대항하여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왔다. 자국내 사기가 최고조로 오른 것 그리고 윈스턴 처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물론 이 철수작전으로 영국이 이득만 있던것도 아니었다. 이 철수작전은 다시 말하면 영국의 프랑스 포기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프랑스 국민들은 분노했다. 자신들은 영국의 탈출을 위해 끝까지 도왔는데 결국 영국군은 자국으로 도망가고 프랑스를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이 작전은 끈끈했던 영불 동맹에 금이 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말그대로 사람만 탈출 했을 뿐 영국은 덩케르크에 많은 물자를 그대로 두고 도망쳤다. 사람 살리기에 급급했기에 많은 물자들은 고스란히 독일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 없이 홀로 파리 사수를 위해 결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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