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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프랑스 침공 준비


  다시 시계를 돌려 독일이 폴란드 침공을 끝마친 1939년 10월로 돌아가보자. 독일군은 레벤스라움 건설을 위해 슬라브족의 터전인 러시아를 공략해야한다. 하지만 세계 1차대전에서 양면전 돌입으로 대패한 교훈으로 말미암아 러시아 지역 공략전 반드시 서부 전선에 대한 안전의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우친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 강화 요청을 제안하지만, 아무런 대답을 받지 못한다. 결국 히틀러는 총통 지령 6호를 발동하며 프랑스 침공을 계획한다.


  폴란드와 프랑스는 차원이 다른 상대다. 세계 1차대전때 독일 군은 프랑스 점령을 목표로 프랑스 진공을 진행했다. 1905년 독일의 육군 참모창장이었던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프랑스 침공에 대한 작전을 내고 이것이 1차 대전의 대프랑스 기본 전략이 된다. 이것이 바로 슐리펜계획이다. 슐리펜 계획은 대실패를 하게 되는데, 완벽한 준비를 하고도 성공 할까 말까한 프랑스 침공을 준비가 덜 된 상태로 프랑스에 들어가게 되고 결과는 알다시피 대실패. 결국 독일은 프랑스와 4년간의 지독함 참호전을 진행하게된다.


  슐리펜 계획의 실패를 맛본 독일군은  슐리펜 작전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프랑스 군사 작전을 기획한다. 슐리펜 계획의 기본은 회전문 효과를 이용한 프랑스 파리 포위 작전이다. 벨기에 방면으로 돌아 들어가는 주공과 프랑스 국경 지대에서의 제2군이 프랑스의 주요도시를 순회하듯이 점령하며 파리를 포위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공을 어디로 두느냐가 문제였다. 황색 작전을 가만히 살펴본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작전을 기획하게 된다.



만슈타인의 낫질 계획


  프랑스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이미 마지노선을 만들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겨울전쟁에서 소련이 그랬듯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마지노선 돌파는 그냥 병력을 허공에 날리는 소모전에 불과했다. 만슈타인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연합군을 집 안에서 불러 낼 필요성이 있었다. 만슈타인은 마지노선이 없는 벨기에를 빠르게 통과해 파리 북부로 도달하먼 회전문 효과가 승리의 기본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벨기에 국경지대가 위험 지대라는건 프랑스도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마지노선 설계를 통해 분명 독일 군은 벨기에 국경을 넘어 파리로 들어올게 눈어 뻔했기에 자신들의 병력을 벨기에 국경에 집중시킬 것이다. 만슈타인은 이런 프랑스의 대비를 무력화 시키기위해 다시한번 변수를 만드는데, 프랑스-벨기에 북부 해안가를 주공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실제로 전력을 아르덴 지역으로 돌려 최대한 빠르게 벨기에를 돌파해 파리로 도달하는 양면 전술을 기본으로 하는 전술은 자신의 직속 상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에게 제출한다.


  룬트슈테트는 만슈타인의 전술을 보고 완벽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는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에게 보고하게 된다. 하지만 할더는 육군 내 파벌이 만슈타인과 달랐을 뿐만 아니라 철두철미한 성격 답게 도박성이 짙은 만슈타인의 전술을 쓸모없다며 기각하게 된다. 결국 만슈타인의 계획은 그렇게 버려지는 듯 했다.


  만슈타인이 작전을 기획하면서 기갑 병력을 동원해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킬 수 있을 시 자문을 구하기 위해 독일 육군 내 최고의 기갑 전문가인 하인츠 구데리안을 찾아갔다. 구데리안은 당시 만슈타인의 작전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결국 그렇게 무너질뻔한 만슈타인의 작전을 구데리안 다시 한번 끄집어내게 된다.



회의중인 만슈타인과 히틀러



만슈타인의 실각과 메헬렌 사건


  육군 사령부에서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여 주지 않자 만슈타인은 상급 부서에 지속적으로 채택을 요구했다. 하지만 육군 원수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계속 그의 의견을 계속 무시하고 자신들의 황색작전을 밀어붙혔다. 결국 그들은 다른 파벌이었던 만슈타인은 폴란드와 대치 중인 제38군단장으로 좌천시킨다. 독일 내 가장 유능한 장군을 최후방으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만슈타인의 작전이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황색작전에 대해 불만이 많던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작전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그를 직접 만나보기로 한다. 만슈타인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 히틀러에게 설명하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가짜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1월 10일 독일 공군 장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소령 2명이 탄 비행기 메서슈미트 BF-108기가 쾰른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폭풍우와 나침반 고장으로 위치를 잃은 비행기는 라인강으로 가려다 실패하고 방향을 잘못 틀어 네덜란드 국경 지대 메헬렌에 불시착하게 된다. 그리고 해당 비행기에는 독일 총통 지령 2호가 있었는데 여기에 포함된 내용 덕분에 독일군의 군사 전략이 벨기에에 노출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메헬렌 사건 발생으로 히틀러는 황색 작전을 완전히 포기하고 만슈타인의 작전을 본격적으로 채택했다. 



하인츠 구데리안



완성된 독일의 프랑스 침공 계획


  만슈타인의 작전의 핵심은 기갑부대 창설이었다. 결국 구데리안과 만슈타인 역시 오랜 시간 논의를 했던 것이 기갑 부대의 빠른 투입이었다. 하지만 만슈타인이 폴란드에 있는 동안 기갑부대의 중요성을 많은 이들이 놓치게 되었고, 작전의 핵심이 빠진 채 만슈타인의 기본 작전에 약군 수정된 내용의 새로운 작전이 채택된다.


  우선 주공은 룬트슈테트가 맞게 되았다. 당시 육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만큼 당연히 그가 맡게 되었는데, 빠른 속공이 중요한 A집단군을 신중하기로 유명한 룬트슈테드가 맡은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갑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프란츠 할더가 만슈타인의 작전을 보고 지적했던 부분 이었던 마지노선에서 반격을 받을 경우의 대책에 대해선 전혀 보완 사항이 없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수정된 만슈타인의 작전이 채택되고 이것이 훗날 사람들이 만슈타인의 낫질작전이라고 불리게 되는 세계 2차대전 독일의 대 프랑스 기본 전략이었다. 


  독일군은 총 3개의 편제로 나눴다. 주공을 맡을 A 집단군은 벨기에 남부에 위치한 아르덴 고원을 목표로 움직였다. A집단군의 사령관은 앞서 설명한 대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가 맡았다. 원래 참모장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맡아야 했으나 할더에 의해 실각 한 이후 게오르크 폰 조덴슈테른이 배정되었다. 그리고 A집단군에 배정된 한개의 기갑 부대를 하인츠 구데리안이 담당했다.


  두번째 조공을 맡을 B집단군은 벨기에 북부집단군을 공략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자신들이 프랑스 침공의 주공이라고 프랑스 군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독일 공군의 지원을 받게 되어 있었다. 비교적 대공화기 체계가 취약한 방면이었다. 사령관은 페드로 폰 보크 상급대장이 맡았다.


  마지막 C집단군은 위의 두 집단군에 비해서 중요도는 떨어졌다. 이들은 기만 전술로 운용되었다. 마지노선과 스위스 국경 방면에서 프랑스의 군에 혼란을 주며 마지노선을 넘어 독일 영토로 오지 않게끔 대비를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사령관은 에르빈 폰 비츨레벤이 맡았다.  



세계 2차대전 서부 전선의 시작



연합군의 대 독일 작전


  영국 프랑스도 독일이 자신들을 공격해 들어올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 육군은 사실 세계 최강의 전력이었다. 세계 1차 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였지만 실제로 이 승리가 국가의 이득이 전혀 되지 못했다. 오히려 막심한 손해만 봤다. 세계 1차대전의 서부전선에서 4년간의 참호전은 프랑스에겐 악몽과도 같았다. 프랑스와 독일의 의미없는 소모전은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양 국의 군사 전력은 어마어마하게 갉아 먹었다. 독일은 패전에 대한 복수심과 히틀러의 파시즘으로 무장에 다시 단기간에 전력을 회복했지만 프랑스는 국민 여론상 절대 군사 전력이 나아 질 수 없는 입장이었다.


  프랑스는 독일은 막기위해 주변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체코 폴란드와 강화 동맹을 맺게 되는데, 만일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게 된다면 양국에서 독일의 뒤를 쳐 전쟁을 타계하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프랑스엔 세계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마지노선이 있었다. 마지노선에 눌러 앉아 버티면서 체코와 폴란드의 도움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알다시피 독일은 피한방을 한흘리고 체코를 합병했고, 프랑스가 손을 쓰기도 전에 폴란드를 함락시켰다. 그나마 반격의 기회가 있었지만 자르 공세와 가짜전쟁으로 골든타임을 허무하게 날리며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멍하니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육군 참모총장 모리스 가믈랭은 새로운 방어 전략을 세웠다. 독일군이 마지노선으로 병력을 투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자 그는 벨기에로 병력을 투입시켜 벨기에 군과 같이 조기에 독일의 공격을 막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아르덴 지역은 울창한 숲이라 독일의 진격이 느리기 때문에 수비하고 용이하고 해안가 방변은 영국의 협조를 구하기 용이하므로 독일은 벨기에의 마스강과 딜강으로 이어지는 축선으로 공격해 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것이 프랑스의 대독일 전선 방어 전략 딜(Dyle) 계획이다.


  영국 역시 같은 연합군이어던 프랑스를 구원할 전략이 필요했다. 문제는 영국은 강력한 해군에 비해 형편없는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은 독일의 기동력을 얼마나 제어할 수 있느냐에 대한 여부였다. 영국군의 사정상 효과적으로 독일 군을 막은 전략이 부족했다. 결국 영국은 프랑스 침공 발발시 약간의 방사 지원만 약속 했을 뿐 독일군을 막기 위한 전략은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1940년 5월 10일 새벽 5시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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