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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



소련의 반격


  스탈린은 자신의 친구이자 혁명 동지 보로실로프를 실각시켰다. 그리고 새로 군사에 대해 정통한 세몬 티모셴코를 육군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티모셴코의 공격은 이전의 소련군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그는 항공기를 적극적으로 가동시키며 만네르하임선 후방을 공략했다. 아무리 뛰어난 방어능력을 자랑한 만네르하임선이라 할지라도 후방과의 보급을 필수적이었다. 결국 핀란드 군은 제때 보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사기는 점차 떨어졌다.


  보로실로프와 티모셴코의 가장 큰 차이는 여유로움이었다. 보로실로프는 전쟁을 빨리 끝내야 된다는 압박감에 무의미한 공세를 수차례 펼치고, 핀란드 군의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반면 티모셴코는 전쟁을 장기적으로 보면서 공군략과 야포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투를 전환했다. 그리고 이는 매우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갔다. 티모셴코는 야포를 활용해 소련군 전차의 진입을 막던 장애물을 모두 격파하고 점차 만네르하임선을 무너뜨렸다.



세묜 티모셴코



만네르하임선 돌파


  1940년 2월 11일 90만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 지원을 받은 티모셴코는 드디어 만네르하임선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한다. 사실 폴란드가 3개월 가까운 시간동안 소련군을 막아낸 것 자체가 엄청난 기적이었다. 포위했던 비푸리도 소련군에게 함락되면서 핀란드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게 된다. 지독했던 겨울도 점차 날씨가 풀려가면서 승리의 추가 다시 소련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탈벨라 역시 이제 국가가 멸망에 직전에 놓였다며 위기감을 내보였고, 국가 원수 칼 구스타프 만네르하임이 다시 반격할 것이라고 선언 했지만, 핀란드의 병력과 군수물자는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다.


  나라를 아예 잃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던 만네르하임은 결국 소련과 평화 협상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게 된다.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가 결사 항전을 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군사 지원을 지시했으나, 핀란드의 입장은 달랐다. 정말 하루아침이면 나라 전체를 소련에 넘겨줄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결국 만네르하임은 모든걸 포기하고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겨울전쟁에 동원된 소련군 전차



모스크바 평화 협정 체결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핀란드와 소련 사이의 평화 협정이 체결된다. 모두가 예상하다시피 이 협정은 핀란드에게 매우 굴욕적인 조건으로 협상이 진행되었다. 우선 핀란드는 제2의 도시였던 비푸리를 소련에 내주고, 카렐리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부 지역을 소련에 할양하게 되었다. 게다가 발트해 중심부에 있던 항코 반도를 30년간 임대해 오면서 언제 있을지 모를 서부 유럽과의 전쟁도 대비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핀란드가 엄청난 피해를 보고 끝난 전쟁 같이만 실상으로 보면 꼭 그렇지 않다.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7만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소련은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상자만 30만명이 넘었다. 겨울 전쟁은 붉은 군대에게 있어 엄청난 치욕으로 남았다. 핀란드 입장에서 살펴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교환 비율을 낸 셈이다. 아무리 약소국이라 할지라도 맘놓고 방어를 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특히 핀란드의 원수 만네르하임에게 있어서 겨울전쟁은 엄청난 호재로 다가왔다. 만네르하임은 겨울전쟁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민들에게 인기가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이 전투로 인해 국가적인 인기가 치솟게 된다. 핀란드 입장에서는 발트 3국처럼 소비에트 연방의 합병 되지 않고 영토 일부를 잃었을 뿐 나라는 지켰고, 그가 소련을 상대로 결사 항전을 했다는 점들이 핀란드 시민에게 크게 어필이 되었다.


  반면 스탈린 입장에선 엄청난 손실이 발생했다. 전쟁에 대비해 완벽하게 훈련했다고 생각했던 붉은 군대가 거의 30%에 가까운 절망적인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서구 열강 강대국이었지 북유럽의 약소국 핀란드가 아니었다. 심지어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3개국 중 가장 어려운 상대는 스웨덴이었지 핀란드가 아니었다.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손실을 본 스탈린은 자신의 계획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핀란드-소련 국경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중요성


  러시아 제국의 보수적인 성향과 지리적인 불리함으로 인해 러시아는 다른 국가들보다 강대국 열강의 반열에 오르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미 전세계 식민지는 포화 상태였기 때문에 소련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기존에 점령당한 식민지를 빼앗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결국 대표적인 열강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견제할 필요성이 존재했다. 그리고 교통 산업이 발달되지 않은 과거라면 무의미하게 넓은 영토가 발목을 잡겠지만, 증기기관으로 철도가 발명되면서 광활한 영토는 이점을 바뀌게 된다. 러시아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대서양과 태평양 시장 모두 잡을 수 있는 유일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련은 동방정책으로 가장 골칫거리였던 일본 제국을 어느정도 정리하고 태평양의 부동항을 확보한다. 이제 소련의 다음 목표는 대서양 부동항 확보였다. 특히 대서양 항구를 확보하며 영국과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노르웨이를 보며 군침을 흘리게 된다. 노르웨이는 소련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국가였다. 노르웨이에 항구를 건설하면 영국을 견제도 가능한 뿐더라 대서양 진출도 가능하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어마어마한 철 생산량은 국가적으로 큰 도움이 되기에 소련의 서방 정책의 1차 종착지는 바로 노르웨이였다.


  이를 독일과 영불이 모를리 없다. 영국이 해상교역으로 큰 재미를 봄과 동시에 소련과 독일을 동시에 고립 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노르웨이의 역할이 컷다. 북해를 구성하고 있는 주요 4개국은 영국-네덜란드-독일-노르웨이인데, 노르웨이를 자신들의 동맹에 넣게된다면 독일은 해상에서 완전히 고립된다. 이를 위해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발트해를 장악하는 카트린 작전을 수행해 독일을 고립시키기를 원했다. 하지만 의회와 국민적 여론에 반대에 그는 자신의 전략을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북해와 발트해 그리고 주요 연안 국가들



히틀러의 플랜B


  반면에 독일군 해군 원수 에리히 레더는 히틀러에게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중요성을 계속 표현했다. 만에 하나 영국이 발트해 연안을 차지하게 될 경우 우군인 소련과의 연락도 힘들어 지고, 해상에서 완전히 봉쇄당하게 된다. 독일에 지도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북해와 발트해에 발을 걸치고는 있지만, 해상에 노출된 면적이 좁아 해상에서 봉쇄당하기 매우 쉬운 구조다. 독일이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북방, 정확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아군 지역이 반드시 필요했다.


  폴란드 전역이 끝나고 히틀러는 모든 신경을 프랑스에 쏟는다. 동부 전선이 안정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서부 전선에 모든 힘을 쏟으려 한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전쟁 준비가 잘 되지 않고 있었던 독일 이기에 히틀러를 제외한 모든 군사 관계자들은 프랑스 침공의 무모함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주위 사람들에 반대에 부딪힌 히틀러는 프랑스 침공을 수정하고 에리히 레더 제독의 조언에 따라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눈을 돌린다.


  초기에 독일은 노르웨이를 중립국으로 두기를 원했다. 노르웨이 마저 침공하게 된다면 독일은 정말로 사방에 적을 두게 되고 이 나라들이 동시에 독일은 견제해 들어온다면 사방에서 포위를 당하는 형국이 된다. 하지만, 에리히 레더의 생각은 달랐다. 무슨일이 있어도 노르웨이를 침공해 완벽하게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노르웨이의 항구들이 영국과의 전쟁에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었다. 에리히 레더는 노르웨이의 친 나치 인사 비드쿤 크비슬링을 소개시켜 주면서 노르웨이 침공을 위한 작전을 계획한다.


  그리고, 1940년 1월 10일 에리히 레더의 노르웨이 침공 작전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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