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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에서 의자를 놓고 편하게 보초를 서는 프랑스 경계병



독소 폴란드 분할 통치


  1939년 10월 6일 한달여 간의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이 독소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폴란드는 양국의 협공으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국가 주권을 양국에 넘기게 된다. 앞서 체결한 독소 불가침 조약에 의거하여 양국은 폴란드를 절반으로 나누어 분할 통치 하기로 한다. 양국 모두 폴란드인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터라 이들의 폴란드 통치 방침은 민족 말살이었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 학살을 본격적으로 실시한 것도 이 시기 부터다. 당시 폴란드에는 많은 유대인계 폴란드인들이 있었다. 다민족 협의 국가였던 폴란드였던 만큼 유대인, 게르만인, 슬라브 인들이 모두 같이 살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점령했는데, 바르샤바의 총 인구수의 30%가량이 유대인이었다. 나치 독일은 게토 지역을 지정해 많은 유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게 된다. 2002년 나온 영화 ‘피아니스트’의 배경 역시 바르샤바이다.


  소련의 통치 방식역시 나치와 비슷 할 정도로 잔혹했다. 러시아 혁명 시기 한번 폴란드에 한번 당해본 소련이기에 이들 역시 잔혹하게 폴란드를 통치했다. 폴란드 내의 게르만 족을 몰살 시킬 뿐 아니라, 카틴 학살을 통해서 수많은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을 암매장시켰다. 그리고 이시기 소련은 폴란드 괴뢰국을 소련 연방에 편입시키기 위한 여러 사전 작업을 실시했다.



독소 폴란드 분할 점령



가짜 전쟁


  앞서 말한대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협약에 의해 즉시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진짜로 선전포고만 했다. 전쟁 준비가 불완전 했던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어설프게 이어가고 있을 때 프랑스 육군은 마지노선 안에 눌러 앉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폴란드와의 협약이 있기에 프랑스 군대가 독일 국경 지대로 행군을 진행 했지만, 전투는 한차례도 일어나지 않았고, 실질적인 군사 행동도 전혀 없었다.


  독일은 영불이 서부 전선을 침공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그래서 독일 군은 서부 국경지대에서 프랑스 군인들에게 삐라와 방송을 통해 자신들은 프랑스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온갖 방송을 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로 폴란드 침공을 멈추지 않으면 독일 국경을 넘을 것이라고 삐라만 뿌려댔다. 서로 선전포고를 한 전장에서 총알이 오가는 것이 아니라 삐라만 오고 가고 있으니 가짜 전쟁이라고 부를만 하다.


  훗날 독일의 상급대장에 오른 알프레드 요들은 당시를 회상하길 “영불에서 110여개의 사단을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을 반면, 독일은 단 20여개의 사단만 서부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프랑스와 영국이 이 시기에 나치를 공략했다면 세계2차대전은 일어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환호하는 폴란드 시민



자르 공세


  가짜 전쟁 기간에 벌어진 유일한 프랑스의 군사 활동이 바로 자르 공세이다. 현재 독일-프랑스 국경 지대에 있는 자를란트 주로 프랑스 40개 사단과 2200여대의 전차가 진군하게 된다. 선전포고와 총 동원령이 선포된 1939년 9월 1일로부터 보름가량이 지난 6월 16일 프랑스 군이 독일 국경으로 출발한다. 


  프랑스 군은 매우 느리게 진군하며 독일 12개의 마을을 점령했다. 프랑스를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는 독일군은 형식적인 저항만 이어가며 서부 전선에서 후퇴를 하고 있었다. 지크프리트 선 안으로 들어가기 싫었던 프랑스 군은 매우 느린속도로 독일을 공략하며 폴란드 전선에 투입된 독일 군이 서부쪽으로 이동하기를 요구했다. 의미없는 공략으로 프랑스 병사 수십여명이 쓰러지자 프랑스 육군 대장 모리스 가믈랭은 지크프리트 선에서 손을 떼고 군대가 마지노선 부근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마지노 선

프랑스의 전략 - 마지노 선 사수


  프랑스의 전쟁 방침은 절대 영토 사수였다. 가뜩이나 세계 1차대전에서 주요 참전국으로 활동했던 프랑스는 젊은 이들이 씨가 마른 상태였기에 인구 절벽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1차대전 당시 겪었던 공포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는 1927년 앙드레 마지노의 제안에 의해 독일 국경 지대에 독일 군을 막을 완벽한 요새를 설계하게 되는 데 이것이 그 유명한 ‘마지노 선’이다.


  마지노 선은 오늘날의 벙커라고 동일한 모습과 기능을 수행한다. 이 벙커가 국경지대 곳곳에 위치하고 있어 국경을 넘어 오는 독일 군을 사살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1차대전이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 간 만큼 참호의 역할을 하는 벙커를 통해 영토 사수 역할을 강화 한다는 것이 주요 개념이다. 프랑스는 베르샤유 조약을 통해 알자스-로렌 지방을 얻어냈다. 기본적으로 이 지역들을 사수하기만 해도 그들은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벨기에 국경 지대 방면에는 마지노 선을 설치하지 안았는데, 설령 독일 군이 그 방면으로 넘어오더라도 벨기에라는 완충 지대가 있고 독일군의 행동을 억제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술적 우위를 가져오는 것이다. 결국 이 지방까지 요새를 건설하는 것은 예산 낭비라 판단한 프랑스는 직접 독일과 맞닿은 국경 지대에만 마지노 선을 구축한다.


  프랑스는 가짜 전쟁 기간 동안에 사실상 마지노 선에 눌러 앉아 있었는데 그래서 가짜 전쟁을 ‘앉은뱅이 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 격언 중 ‘끝낼 수 있을 때 끝내야 한다’ 라는 말이 있다. 마지노 선을 신봉한 프랑스 군은 이 격언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곤 전혀 알지 못했다.



독일 육군 상급대장, 프란츠 할더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 준비


  폴란드 점령을 완료한 히틀러는 이제 프랑스로 눈을 돌린다. 폴란드 점령과 독소 불가침 조약은 히틀러가 그렇게 두려워 하던 양면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불완전한 준비로도 폴란드를 삽시간에 공략한 히틀러는 자신감이 솟구쳤다. 히틀러는 빠른 시일내에 프랑스과의 일전을 하길 바랬고, 계속 프랑스 육군 장교들을 재촉하게 되었다. 프랑스가 가짜 전쟁에서 보여준 한심한 움직임은 히틀러의 자신감을 끌어 올리는데 큰 몫을 한다. 9월 1일에 총 동원령을 선포했지만 폴란드 침공이 끝난 시점까지도 프랑스의 동원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히틀러는 11월 늦어도 올해 겨울 안에는 프랑스를 침공할 것이라고 장성들 앞에서 선언했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 군 역시 사정이 좋지 못했다. 엉망진창 수준이었던 프랑스에 비해서 다소 나았던 것이지 독일군의 병력도 형편없긴 마찬가지였다. 독일 군은 폴란드 전역을 통해 필요 이상의 탄약을 소모했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독일 육군 수뇌부들은 간신히 히틀러를 설득해 프랑스 침공을 이듬해로 연기 할 수 있었다.


  히틀러를 제외한 모든 나치군 수뇌부는 프랑스 침공에 대한 성공 확신이 전혀 없었다. 신생국가 폴란드와는 차원이 다른 완벽한 체계를 갖춘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다. 세계 1차대전에서도 프랑스에 패배를 겪었던 독일이었기에 이런 두려움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프랑스 공략에 대한 이렇다할 전략도 전혀 세우지 않았다. 폴란드 침공의 총 책임자 발터 폰 브라우히치에 이어 프랑스 침공의 책임자는 프란츠 할더로 낙점되었다. 히틀러는 계속 할더에게 프랑스 공략에 대한 작전을 가져오라고 다그쳤다. 할더는 거의 매일마다 히틀러 앞에 끌려갔고, 할더는 실제로 독일을 위해 히틀러를 암살하는게 맞지 않나 지속적으로 고민했다고 한다.

  

  그렇게 할더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1차대전의 슐리펜 계획을 관심있게 살펴보다 한가지 묘책을 할더에게 말하게 된다. 바로 그 사람이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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