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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에 인준하는 리벤트로프와 이를 지켜보는 스탈린과 몰로토프



히틀러와 스탈린의 동상이몽


  히틀러와 스탈린, 이 두사람은 서로를 넘어야될 산으로 생각했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꿈꾸는 레벤스라움 건설을 위해서 동유럽으로 확장이 필수불가결했다. 이 점을 스탈린이 모를리 없었다. 히틀러의 끝없는 팽창의 목적지는 과거 러시아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이다. 스탈린은 이런 위기를 프랑스, 영국과의 동맹으로 해결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스탈린을 빼놓고 뮌헨 협정을 체결하며 서구 국가들이 동유럽의 안전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탈린은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뮌헨 협정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이 소극적인 선택을 이어나가자 히틀러는 전쟁에 대한 대비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했다. 히틀러가 가장 두려워 했던 것은 과거 1차대전이 동서로 나누어진 전선으로 인해 패배했듯이 양면전쟁 양상으로 흘러가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독일은 유럽 지리상 정중앙에 위치한만큼 소련이 서구 국가들과 힘을 합친다면 순식간에 포위당하는 형태가 된다.


막심 리트비노프




리트비노프의 구상


  독일이 소련으로 가려면 중간에 폴란드를 반드시 넘어야 한다. 이점을 활용해 스탈린은 소련-폴란드-영국-프랑스 4개국의 집단 안보체제를 세워 히틀러를 저지하려는 계획을 짠다. 소련의 외교부 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이 4개 나라와의 협상에 나서게 된다. 리트비노프틑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가면서까지 4개국의 동맹 체결을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했다. 문제는 이 3개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발목을 잡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선 공산국가 소련과 손잡는다는 것이 영 껄끄러웠다. 실리적으론 소련과 손을 잡아 커질대로 커진 히틀러를 막는게 최선의 방책임은 분명하지만, 공산국가 소련과 손잡게 된다면 우방국가를 표방한 두나라의 꼴이 우습게 되는 것과 더불어 국민들의 불만도 꽤나 많이 쌓일것이다. 폴란드가 소극적인 이유는 폴란드는 애초에 러시아 제국 시절 부터 사이가 좋지 못했다. 폴란드야말로 독일제국과 러시아제국 사이에 끼여서 역사적으로 많은 수모를 당했기에, 소련에 대한 반감이 애초에 높았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서구에 손을 내민 스탈린


  막심 리트비노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4개국의 동맹은 체결되지 못했다. 리트비노프의 구상이 최선의 방책이었지만, 체코가 무너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스탈린은 더이상 이를 두고볼 수 없어 그를 해임하고, 바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새로운 외교장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몰로토프는 타국과의 동맹을 위해 친절했던 리트비노프와 달리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영국과 프랑스에 만약 발트해와 지중해의 국가 중 한 곳이라도 침략을 받게 된다면 세 나라 모두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는 문서를 양국에 전달한다.


  문서를 받은 영국과 프랑스는 6주나 지나서 반응을 했다. 1939년 8월 12일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스탈린은 협상을 위해 자신의 최측근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를 대표로 내보낸다. 하지만, 양국의 협상단 대표는 이에 비해 상당히 서열이 낮은 사람이 왔다. 프랑스는 육군 대장 조제프 두망을 보냈는데 이 사람은 프랑스 군 내 서열이 40위 정도 되는 사람이었다. 영국은 한발 더 나아가 해군 소장인 레지널드 드랑스 경을 협상단 대표로 내보냈다. 이 모습을 보자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의 진위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폴란드 역시 소련과의 협상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소련의 잘못도 존재했다. 과거 적백내전이 한창이던 소련 초기에 양국이 맞붙었던 전력이 있었다. 당시 러시아 상황은 혼돈 그자체였고, 독립이후 똘똘 뭉친 폴란드를 이길 수 없었다. 폴란드의 승리를 통해 그동안 러시아 제국 하에 있던 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게 된다. 양국은 이렇듯 사이가 안좋았는데, 이제와서 히틀러가 무섭다고 자기들에게 손내미는 스탈린이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체결된 양국의 국경 (출처: 위키백과)



서구의 입장


  몰로토프와 서구의 협상 과정을 살펴보면 영국과 프랑스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에 상당히 의문이 든다. 우린 지금 히틀러의 향후 목표와 전쟁 양상을 모두 알고 있는 미래 시점에서 사건을 보기에 의문이 들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동맹에 소극적인 행동은 양국의 입장에선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다. 애초에 소련은 당시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공산주의 열강국가다.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영국과 프랑스 입장에서 공산주의 강대국은 자신들의 시장 하나를 잃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이 한창이던 적백내전 시기에 공산당 전복을 목적으로 양국에서 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영국은 소련에 차관을 빌려줄 것을 약속했다. 어짜피 전쟁은 불보듯 뻔하고, 영국입장에서 가장 최우선적이면서 이기적인 방법은 자국민들은 전선에 내몰지 않으면서 전쟁을 참여하는 우방국가를 많이 만들어 이들에게 차관을 빌려주고 전후에 받아내면서 막대한 자본을 벌어들이는 것이다. 세계 1차대전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재미를 보았기에 영국은 다시 한번 소련에 자본을 많이 빌려줄 생각을 하게 된다. 실질적인 군대 파견을 원했던 스탈린 입장에선 영국이 매우 얄밉게 보인것이다.


  또한, 전술적 오판도 존재한다. 세계1차대전 처럼 참호전 양상이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과 프랑스는 마지노 라인에 세운 요새들의 힘을 믿었다. 서부 전선에서 마지노 요새 덕분에 히틀러의 침공을 오랜시간 끌 수 있을 것이고, 그 사이 미국을 활용해 외교적인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점들이 작용해 서구 국가들은 스탈린의 제의에 소극적이었다. 또한, 아쉬운 쪽은 스탈린이다. 애초에 히틀러가 반공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와중에 그들의 제1목표는 분명 소련이다. 여유로웠던 영불과 소련의 행동은 대조적일 수 밖에 없었다.



1939년 8월 23일 동아일보 기사 (출처: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히틀러와 스탈린 극적으로 손을 잡다


  히틀러와 스탈린 모두 자신들 앞에 놓은 딜레마를 해결 했어야 한다. 결국 양면전쟁을 두려워한 히틀러가 스탈린에게 손을 뻗게 된다. 히틀러도 영불과 소련의 협상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결국 나치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스탈리과의 협상을 조언했고, 히틀러는 스탈린에게 서신을 보낸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스탈린은 히틀러의 제안에 반응하게 되었고, 1939년 8월 21일 본격적으로 나치와 소련의 협상이 시작된다.


  서신을 받은 스탈린은 영불과의 협상을 완전 폐기했다. 그리고 히틀러에게 외교권을 위임받은 리벤트로프가 소련으로 비행기를 타고 간다. 배를 타고 오며 한달 가까이 시간을 허비한 영불과 대조적으로 리벤트로프는 비행기를 타며 단 하루만에 러시아 크렘린에 도착한다. 몰로토프와 리벤트로프는 크렘린에서 하루만에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다. 스탈린과 히틀러 모두 이 조약에 엄청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언론에 공개된 조약의 내용은 양측이 10년간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실제 양국의 조약 내용은 달랐다.


  • 독일과 소련 양국은 폴란드를 분할하여 지배한다.

  • 소련은 루마니아령 베사라비아를 차지한다.

  • 양국은 발트 3국을 분할하여,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소련이, 리투아니아는 독일이 차지한다.

  • 핀란드는 소련이 차지한다.

  • 양국은 전쟁에 필요한 여러 물자를 서로 지원한다.


  1939년 8월 23일, 리벤트로프와 몰로토프가 위의 내용이 담긴 조약에 서명하면서 양국의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과 국경을 맞댄 프랑스와 폴란드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양국은 시간을 계속 끌며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지만 계획이 완전 뒤틀리게 된다. 폴란드는 이제 전쟁이 눈앞에 왔음을 직감하고, 모든 국가 체제를 전시로 전환한다.


  그로부터 정확히 8일 후인 1939년 9월 1일,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 시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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