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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축국 (출처: 위키백과)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


  나치 정권 내부에 있는 모든 장성들이 전쟁에 찬성하지는 않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나치 정권 내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명은 독일 국방군 원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육군 장관 베르너 폰 프리치 였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위해 비밀 회의를 소집했는데, 여기에 포함된 인원이 블롬베르크를 비롯해, 육군 사령관인 프리치,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이었다. 이 회의에서 블롬베르크와 프리치는 호전적인 히틀러의 정책을 비판했고, 히틀러는 이 둘에 대해 의견 차이로 갈라서게 되었다.


  1938년 1월 블롬베르크는 에르라 그룬이라는 26세 여성과 결혼하게 되는데, 둘의 나이차는 무려 33살이었다. 블롬베르크를 평소에 맘에 들지 않아 했던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과 게슈타포의 수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에르나 그룬의 매춘 경력을 폭로하며 블롬베르크를 몰아갔다. 이를 알게된 히틀러는 그에게 이혼할 것을 명령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독일군 원수 직책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리고 프리치의 경우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폭로하여 그 역시 육군 사령관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 두명에게 쓰여진 누명은 전부 거짓이었고,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작품이었다. 이 사건으로 독일 국방군은 완전 해체가 되고, 원수 자리는 헤르만 괴링이 공군 사령관 자리와 같이 겸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일련의 과정을 기획한 게슈타포의 수장 하인리히 힘러는 독일 돌격대의 수장이 되어 수많은 유대인과 전쟁 포로를 학살하는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게 된다.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으로 독일 군대에서 히틀러의 역할을 더욱 커져갔고, 히틀러의 오른팔 헤르만 괴링이 나치 군의 중심이 되어 레벤스라움 건설을 위한 초석을 쌓아갔다.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출처: 위키백과)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뮌헨협정으로 주데테란트를 손에 넣은 나치 독일은 이에 멈추지 않았다.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 첫 목표는 프랑스 점령이었다. 프랑스 침공을 위해서는 프랑스 반대편에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던 두 나라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그리고 프랑스와 동맹은 아니지만 멀리 소련까지도 우호국으로 돌려 놓아야 프랑스와의 전면전에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에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에게 뒷통수를 맞은 체코슬로바키아가 나치군은 막을 여력은 전혀 없었고, 결국 체코는 나치 독일에 의해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으로 전락해 나치 독일로 편입 시킨다. 슬로바키아는 결국 괴뢰국으로 전락해 두개의 나라로 분리된다. 최대 방어 시설이 있는 주데테란트를 나치에 뻇기고, 서방에 배신을 당했기에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를 막을 수 있는 동력과 의지를 모두 잃고 히틀러의 손아귀에 떨어지게 된다.


  히틀러의 팽창은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긴장상태를 야기했다.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뭉쳤던 4개국 영국, 프랑스, 폴란드, 소련의 동맹체제가 완전히 분해되었다. 소련의 경우 서유럽의 배신을 지켜 보면서 더이상 영국과 프랑스와 손을 잡지 않는게 자신들의 이익에 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었고, 폴란드와 프랑스는 이제 코앞에 다가올 전쟁을 위해 전시 체제로 전환해 갔다. 뮌헨 협정으로 전쟁을 피했다고 착각한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전시 준비에 손놓고 있었다. 단 한사람, 윈스턴 처칠만이 앞으로 다가올 히틀러와의 전쟁을 대비해야 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보헤미아 모라바 보호령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히틀러와 동맹을 맺고 있던 이탈리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파시즘인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스파치오 비탈레는 과거 로마제국이 건설한 유럽, 지중해,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차지하는 영토 팽창 계획이었다. 에티오피아 침공도 일련의 과정으로 발생한 것이다. 북아프리카의 패권을 어느 정도 회복한 이탈리아의 목표는 그리스였다.


  이탈리아가 그리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드리아해를 건너 가야만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 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작은 나라 알바니아가 군사적 요충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알바니아를 점령하게 된다면 그리스-발칸 반도에 군대를 손쉽게 수송 할 수 있었다. 무솔리는 1920년대 부터 알바니아 점령을 기획하고 있었으므로,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힘썻다. 


  그러던 와중 히틀러의 확장에 자극을 받은 무솔리니는 1939년 4월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그들은 자신의 보호령으로 귀속시킨다. 알바니아의 황제였던 조구 1세는 추방되었고, 알바니아 최대 토지 소유자인 세프케트 볼라치가 새로운 총리로 올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알바니아 공화국은 세계2차대전 기간동안 추축국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반강제적으로 이탈리아에 많은 원조를 하게 된다.



스파치오 비탈레 영역 (출처: 위키 백과)



강철 조약


  이탈리아의 본격적인 팽창으로 추축국의 기세는 더욱 올랐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각자의 목표를 위해 자신들의 동맹관계를 명확하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히틀러는 평소에 신임하고 있던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에게 지시하여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을 것을 지시했다. 전쟁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 무솔리니 역시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에게 지시하여 나치 독일과의 동맹을 지시했다.


  강철 조약을 위해 앞장선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의 또다른 최측근으로 활약하게 된다. 히틀러의 주 측근들이 서로간 사이가 모두 안좋았듯이 리벤트로프 역시 그랬다. 이미 사이가 안좋았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둘과 정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질투의 화신 괴벨스는 자신과 다르게 귀족 작위를 가지고 있었던 리벤트로프를 미워했고, 괴링은 항상 히틀러에게 리벤트로프를 믿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히틀러는 리벤트로프를 적극 신뢰하며 그가 나치의 외교 장관으로서 많은 업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큰 힘을 보태 준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중일 전쟁 발발


  또다른 추축국인 일본 제국 역시 힘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제국주의 팽창 정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동아 지역의 국가들은 대부분 근대화가 진행되지 않고, 낙후된 지역이 많아 자신들이 이 국가들을 근대화 시켜 대동아 지역에서 서양 세력을 내쫓고 자신들이 중심이 되는 대일본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다. 대동아 공영권은 이미 자신들의 식민지로 포함된 조선과 만주국을 필두로 북쪽으로는 중국과 몽골, 남쪽으로는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서쪽으로는 버마와 인도, 동쪽으로는 하와이까지의 대제국을 건설하는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러던 와중 만주지역을 맡고있던 일본 제국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소속의 일본군 병사가 갑자기 실종되었다가 돌아오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해당 병사는 20분만에 군대로 복귀했지만, 렌야를 이를 빌미로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지시했다. 이를 계기로 화북 지역에서 전역이 시작되며 중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중화민국의 국가주석 린썬은 국민들에게 결집을 호소하고 일본과의 전면전에 대비했다. 



대동아공영권 선전 포스터



할힌골 전투


  1939년 일본 제국은 소련 영토에도 손을 뻗었다. 만주국을 점령한 일본은 다음 목표인 몽골에도 손을 뻗는데 같이 국경을 맞닿고 있는 소련도 일본의 부분별한 팽창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할힌골은 만주국과 몽골, 소련 3국이 국토를 맞닿고 있는 지점으로 군사적 긴장감이 늘 흐르고 있던 지역이었다.


  그러던 와중 소련의 극동아시아 방면 원수 바실리 블류헤르가 연해주 항공대를 이용해 일본제국 19사단을 무차별 폭격했다. 이 전투로 소련은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일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소련은 전략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으나 수많은 항공기와 대포를 잃게 되었고 이에 격분한 스탈린이 블류헤르를 고문한 뒤 숙청했다.



바실리 블류헤르 (출처: 위키백과)



  블류헤르의 뒤를 이어 게오르기 주코프가 새로운 소련의 극동아 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일본군은 몽골 점령을 위해 지속적으로 전차를 보냈지만, 소련의 화력 앞에선 무력했다. 일본군은 기습작전으로 소련-몽골의 방어망을 뚫기위해 시도했지만 번번히 주코프의 화력에 밀렸다. 주코프는 소련군 전차와 비행기로 일본군 기지를 폭격했고, 일본은 할힌골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소련에게 무릎을 꿇는다. 소련에게 된통 당한 일본은 이후 세계 2차대전 진행동안 히틀러의 소련 극동 지역 침공 요청을 무시하게 되어 소련이 향후 독일과의 동부 전선에 (독일 기준) 집중 할 수 있게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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