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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ing/세계 2차 대전

#7 - 스페인 내전

gyulee0220 2019. 7. 28. 14:03



  스페인의 역사


  '무적함대(Armada)'는 스페인의 전성기를 상징하던 단어였다. 스페인 축구국가대표팀을 무적함대라고 불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16세기 스페인 제국의 황제 펠리페 2세는 콜럼버스를 시켜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무적함대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이후 멕시코와 페루를 시작으로 남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해 거대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후 에스파냐 왕국은 카스티야 지방을 중심으로 점점 커져나갔다. 카스티야 중심의 정권은 자연스레 주변 지방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먼저 반응한 지역은 카탈루냐 였다. 카탈루냐 지방은 포르투갈의 독립에 자극을 받아 1640년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카탈루냐에 이어 안달루시아, 나폴리, 아라곤 등 지방의 지속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스페인은 반란 진압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것이 17~18세기의 스페인 지역의 주된 흐름이었다. 이어 프랑스에 나폴레옹이 등장해 전 유럽을 휩쓸고 프랑스의 강세가 이어지고, 식민지였던 멕시코가 미국의 비호로 독립을 이뤄내며 스페인은 강대국의 반열에서 완전히 내려오게 된다.


  20세기로 들어서며 스페인은 동네북으로 전락했다. 모로코의 독립운동도 막지 못할 정도로 쇠퇴했다.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국민들의 삶은 힘들어져 갔으며, 왕국의 부패는 여전했다.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가 승리를 거두면서 왕권이 무너지며 잠시나마 스페인은 공화국이 된다. 스페인 제2공화국의 대통령 알칼라사모라를 중심으로 지방자치, 여성의 참정권, 토지 개혁등이 포함된 정책을 펼쳐 나갔다. 



스페인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 니세토 알칼라사모라


  스페인 내부 분열의 시작


  제2공화국 총리였던 아사냐 내각에게 주어진 가장 큰 임무는 토지개혁이었다. 제국 시절부터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계급간 빈부격차가 극심했기에 시민들에게 효율적이고 공정하게 토지를 배분해주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사냐는 이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1933년 총선때 실각 해 우파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우파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노동 운동을 탄압하고 다시 지지율이 급락했다.


  1936년 총선 다시 스페인 사회주의노동당, 공산당 등의 좌파 정권이 승리하며 제2공화국은 정세가 매번 급격히 변화해 혼란은 가중되었다. 좌파정권은 이전 내각에서 지지부진 했던 토지 개혁을 집행하게 된다. 하지만, 지난 정권때의 보복이 두려웠던 우파 정권은 기존 토지를 내주기 싫었던 기득권과 손을 잡는다. 이들은 모로코에 머무르고 있었던 스페인 군 참모총장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에 도착한 프랑코에 의해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다.



스페인 제2공화국 총리, 마누엘 아사냐


  스페인 내전의 진행


  전쟁 초기는 좌파 정부군의 우세한 흐름속으로 흘러갔다. 프랑코는 호기롭게 마드리드를 점령하기 위해 들어갔지만, 정부군의 저항으로 쉽게 들어가지 못했다. 반란군의 목표는 모로코에 있는 주력 병사들은 이베리아 반도로 수송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스페인 최대 항구 도시 였던 카디스를 점령해야 했고, 카디스를 지키는 거대 도시 세비야가 그들의 집중 공략 포인트였다.


  결국 반란군은 세비야를 점령하게 되었고, 이는 프랑코에게 엄청난 호재로 돌아선다. 이어 카디스 항구를 확보한 반란군은 빠르게 군대를 이베리아 본토로 데려올 수 있었다. 공화국에게 세비야 패전은 엄청난 실책이 되었는데, 조금만 더 반란군의 진군을 늦췄다면 프랑코와 손 잡은 나치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연합군이 공화군의 편으로 돌아설 확률이 컸다.



스페인 총통, 프란시스코 프랑코



  나치 독일의 참전


  자기 편이 필요했던 히틀러는 파시스트 동지 프랑코와 손을 잡게 된다. 프랑코 역시 반란을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나치 독일의 힘이 필요했다. 나치의 적극적인 지원은 반란군이 점차 스페인 내전의 힘겨루기에서 우위를 가져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시즘으로 무장한 히틀러, 무솔리니, 프랑코의 동맹은 매우 견고 했다.


  상황이 어려워진 공화파는 주변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소련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스페인 내전 참전에 큰 관심이 없었다. 스페인 공화국이 좌파 정권을 표방하고 있었기에 영국, 프랑스의 우파 세력들은 스페인 파병에 반대를 표했다. 또한 미국 역시 당시엔 유럽에 큰 관심이 없었고, 중립 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에 스페인 파병을 포기했다. 1차대전을 겪은 시민들이 군대 참전에 동의할리 없었다. 유일하게 소련만이 군대를 파병했으나 스페인 정부로 부터 엄청난 양의 금괴를 요구했고, 이마저도 끊기자 파병을 중단했다. 연합국들은 형식적으로나마 국제여단을 결성해 공화파에 지원을 해줬을 뿐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오랜 전쟁경험을 했던 프랑코가 나치의 힘까지 얻게 되자 공화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군다다 프랑코에게는 히틀러라는 든든한 아군이 있었지만, 공화파의 아군 스탈린은 소극적이었다. 훗날 처칠과 루스벨트는 스페인 내전에 파병하지 않을 것을 크게 후회했다.



로버트 파카가 촬영한 스페인 내전



  게르니카 폭격과 내전의 종료


  1937년 4월 26일, 공화군 세력하에 있던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에 나치 군이 비행기를 이끌고 무차별 폭격을 가하게 된다. 당시 도시의 3분의 1에 해당되는 시민들을 죽거나 다치게 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폭격을 가한 부대는 나치 독일에서 폭격을 위해 특별히 선별한 집단인 콘도르 사단이었으며, 수장은 세계 1차대전 파일럿을 활약한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중령이었다. 


  게르니카 학살에 사용된 나치 독일의 신형 항공기는 Ju 87과 He 111 두 기종이었다. Ju 87은 급강하 할때 나는 금속성 소리 때문에 '악마의 사이렌'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해당 기종은 나치 초기 항공기 조달을 담당한 공군 상급대장 출신의 에른스트 우데트가 미국에가 비슷한 폭격기를 보고 만들었다. 또한, He 111은 초기엔 고속 여객기로 개발되었으나, 빠른 속도로 인해 여객기로만 사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던 나치 독일이 고속 폭격기로 전환해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나치의 도움으로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로서 유럽에 파시스트 국가 하나가 추가된다. 외교 처세술에 능했던 프랑코는 내전에서 승리한 1939년 부터 1975년 사망할 때 까지 스페인의 독재자로 남게 되었다. 공화파 대부분은 프랑코에서 총살 당했고, 살아남은 일부 인원은 프랑스로 망명을 가 훗날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프랑코의 독재가 길었던 만큼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멕시코나 프랑스에 터전을 잡고 1975년 스페인에 민주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서 반 프랑코 운동을 진행하거나 조용히 살며 지냈다. 

  

게르니카 공습 지휘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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