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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5월 4일 동아일보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수권법과 히틀러 독재의 시작
1933년 3월 히틀러는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자신의 독재 체제 기반을 만들었다. 물론 이런 수권법 자체에 통과에 모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사회 민주당의 오토 벨스는 히틀러의 수권법에 맞서 반대연설을 펼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히틀러의 수권법이 독일인들의 자유를 빼았고, 국가를 국난에 몰아 넣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반대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리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을 수 있지만, 우리의 명예를 빼앗을 수는 없다.”
하지만 많은 정치인과 국민들이 모두 오토 벨스 처럼 생각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 내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나치 당이 원내 제1정당으로 등극할 수 있던건, 그가 당시에 독일 내에서 인기기 상당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옆의 조력자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국민 선동도 한몫했다.
오토 벨스
히틀러 1인 독재 체제의 시작
수권법을 통해 히틀러는 대통령과 총리직을 겸임했다. 히틀러가 1인 독재를 할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의회에서 그와 나치당을 너무 약소평가 했기 때문이다. 보수당은 히틀러를 이용하면 충분히 좌파 세력을 누를 수 있다고 판단했고, 좌파 역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를 따라하는 미치광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나치당은 나치당 집권을 위해 꽤나 오랜 기간 준비했다. 그들은 뮌헨 폭동 실패 이유 아무도 모르게 칼을 갈아오고 있었다. 무능한 집권층,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열망이 있는 독일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나치당은 자신들 이외에 모든 정당을 부정했고, 1934년 총선 때 100% 의석으로 국회를 구성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나치 집권의 1등공신, 파울 요제프 괴벨스
나치당의 선전(Fight-well)에는 나치당의 선전(Propaganda)국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역할이 컸다. 일찍이 나치당 활동을 시작한 괴벨스는 나치 청년당 활동 시절 히틀러와 마주치게 되고,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처음 봤을때 그를 반인반신이라고 말했으며 심지어 그를 그리스도에 비유했다. 이 사람도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괴벨스는 언론 선동의 달인이었다. 그는 현대 가짜뉴스의 아버지라 불릴 만큼 언론 플레이를 정말 잘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호르스트 베셀 사건이었다. 1930년대 초 나치당과 공산당이 정치 깡패들을 동원해 서로의 진영을 공격하던 시기 호르스트 베셀은 나치당의 유망한 젊은 나치 돌격대 대장 중 한명이었다. 베셀은 빌헬름 법과대학을 졸업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해 나치 지도자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공산당원들 때려잡는 실력이 대단해 상대진영 사이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공산당원들은 베셀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마침 그가 거주하던 집주인 할머니와 서로 월세 문제로 다툰다는 제보를 받고 집주인의 도움을 받아 그에게 총을 쏜다. 베셀을 경찰에서 발견할 당시 목숨은 붙어있었지만, 1달간의 사투 끝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괴벨스는 베셀이 죽자 그의 죽음을 선전에 이용햤다.
베셀을 죽인 공산당원 중 한명이 경찰에 붙잡혀 베셀을 사살하게 된 전말을 모두 말하게 되자, 상황은 나치당에 매우 유리하게 돌아갔다. 괴벨스는 베셀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뤄줌과 동시에 공산당의 만행을 언론에 지속적으로 폭로 했다. 장례식에는 나치당 주요 인물 헤르만 괴링, 독일 전 황제 빌헬름 2세의 아들까지 참가할 정도로 성대하게 치뤄졌다. 괴벨스는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만들것을 지시 했고, 장례식에서 이 노래가 울려퍼지게된다. 이 노래는 나치당원의 사기 진작을 가져옴을 물론이고, 훗날 나치 독일의 국가로 제정된다.
괴벨스는 10년 뒤 전 독일에 이 노래가 울려 퍼질것이라고 예언했다. 괴벨스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노래가 전 독일에 울려 퍼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5년이면 충분했다.
호르스트 베셀
히틀러의 오른팔, 독일 선전부 장관에 오르다.
괴벨스의 이런 행보는 히틀러의 입맛에 정확히 들어 맞았다. 게다가 괴벨스는 선전을 통해 힌덴부르크가 대통령 직에 재선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괴벨스는 힌덴부르크 유세 때 그를 '독일군 최고의 원수', '백전백승의 영웅적 인물' 이라며 그를 띄워 줬고, 힌덴부르크를 당선 시키는데 1등 공신이 된다. 힌덴부르크는 이런 괴벨스에게 요직을 주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 신설된 선전부 장관직이었다.
선전부 장관의 주 업무는 언론 장악이었다. 괴벨스는 이제 독일 전역의 신문, 잡지, 방송을 직접 관리하고 검열 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것이다. 35살의 젊은 장관은 선전부 장관 직에 올라 나치 선전에 앞장섰다. 괴벨스는 권력욕 또한 상당했다. 사소한 문제까지 개입하지 않는 히틀러의 성향 상 괴벨스가 여러 부서를 통폐합 하며 권력을 쌓아가는 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그의 권력 팽창을 막는 인물은 나치 독일의 2인자이자 부총리 헤르만 괴링이었다. 괴벨스와 괴링은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데 도움을 준 1등 공신이었지만, 둘은 사소한 문제로 자주 부딪쳤다.
에른스트 룀
장검의 밤
다시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나치 독일 얘기로 돌아가자. 나치당은 원래 정치계에서 비주류 세력이었고, 그들은 국회에서의 의정활동 보다 정치 깡패인 돌격대들의 사회 혼란 조장의 주된 업무 였다. 하지만, 이제 독일에서 제1당이 되며, 정치 활동이 주 역할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돌격대들은 이제 경찰과 비슷한 역할로 격상된다. 당시 나치 돌격대의 대장은 히틀러의 오랜 친구 였던 에른스트 룀이었다. 룀은 괴링과 괴벨스와 더불에 유일하게 히틀러 총리를 '너' 라고 지칭 할 수 있었던 막역한 사이었다.
룀은 돌격대를 이용해 주요 지방 행정 인사들과 행정 부처 사람들은 나치쪽에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나치 돌격대의 힘은 점점 커졌다. 반면 고령이 된 힌덴부르크는 점차 건강이 악화가 되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히틀러는 자연스럽게 육군 권력을 힌덴부르크로부터 양도 받게 되는데 히틀러 입장에서는 군부보다 돌격대의 힘이 커지는 걸 두려워했다.
결국 히틀러와 룀은 돌격대의 영향 범위 문제를 놓고 자주 충돌 했고, 룀은 히틀러를 무시한채 돌격대의 힘을 키웠다. 이는 히틀러와 힌덴부르크 입장에서는 반란 기도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결국 힌덴부르크의 승인이 떨어지고 히틀러는 룀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권력욕이 강했던 괴링과 괴벨스 역시 룀의 처단을 벼르고 있었다. 괴링은 프로이센 주 정부 비밀경찰인 게슈타포를 동원해 룀의 뒤를 추적했다. 게슈타포의 장관 하인리히 힘러는 룀이 프랑스로부터 뇌물 2000만 마르크를 받고 돌격대를 이용해 히틀러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거짓 증거를 만들고, 살생부를 만들어 히틀러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들을 처단하게 된다.
1934년 6월 30일, 괴링과 힘러는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다. 룀의 쿠데타를 꾀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퍼트리고 룀을 비롯한 히틀러 반대 인사들을 모두 처단했다. 여기엔 전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의 죄명은 모두 룀의 반란 기도에 참여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좌파 세력은 물론이고, 나치당 내 반 히틀러 세력 모두 와해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장검의 밤이다.
이제 더이상 독일에서 히틀러를 견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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