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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발 세계 경제 대공황


 1929년 10월 뉴욕 증권시장에 주가 대폭락 사건이 일어난다. 세계 1차대전 후 미국은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가 적었고, 유럽에서는 계속 전후 복구를 위해 미국의 자본을 많이 끌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미국의 경제는 호황을 누리게 된다. 미국이 강대국 반열에서 초강대국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1929년 1월 1일자 뉴욕 타임스의 사설만 보더라도 당시 미국이 얼마나 큰 호황을 누리고 있었는지, 또한 미국인들이 얼마나 자만심에 빠져 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미국은 지난 12개월 동안 유사 이래의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다. 과거에 근거해 미래를 예측한다면 올해는 축복과 희망의 한 해가 될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해 10월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주가 폭락이 미국 증권시장을 흔들었다. 경제학자들이 아직도 대공황에 많은 원인을 찾고 있지만, 속 시원하게 원인을 한줄로 정리하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찌 되었는 대공황은 미국 사회와 경제를 파괴시켰다. 수십만개의 미국 기업이 파산했고, 수천만명의 미국인들은 길거리로 나가게 되었다. 미국 주식 시장의 시가 총액은 이전 보다 10% 이하 규모로 떨어지게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지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


 경제 대공황의 타격을 입은 나라가 한곳 더 있었다. 바로 미국의 원조를 받던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다. 막대한 베르사유 조약 보상금을 미국의 도움으로 서서히 갚아 나가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20년대 후반 호황기를 누렸다.


 하지만 뉴욕에서 일어난 대공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에도 치명상을 가져왔다.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미국의 단기 자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제 미국은 더이상 남을 도와줄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총리였던 헤르만 뮐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져 가는 걸 바라만 보았고, 자연스레 그에 대한 인기도 곤두박질 쳤다.


 간신히 정상 궤도로 국가를 올려 놓았지만, 미국발 경제 대공황은 독일 국민들에게 다시 한번 혼란을 가져왔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특이하게도 대통령과 총리가 공존하는 정치 체제였다. 대부분의 내각제 체제에서는 총리의 권한이 매우 강력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조금 달랐다. 대통령의 권한이 무척이나 강했다. 대통령이 의회 해산권과 총리 임명권을 지니고 있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탈을 쓴 과거 입헌군주제의 왕과 비슷한 역할을 대통령이 수행하고 있는 구조였다.



(좌 : 파울 폰 힌덴부르크, 우 : 헤르만 뮐러)



대통령과 총리의 반목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에게 있어 가장 강력했던 권한은 다름아닌 비상대권이었다. 평시에는 의회와 총리의 직무 수행으로 국정을 운영한다. 하지만 의회가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오게 된다면 대통령은 비상대권을 발휘하여 의회 해산권을 물론이고, 국정 운영에 필요한 중요 사항들을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전후 바이마르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제1야당은 사회 민주당이었으나 전후 혼란 체계는 의회가 정상적인 구조를 형성하지 못하게 계속 막아왔다. 공산당을 비롯한 다양한 정당들이 난립 하는 구조에서 일반적인 의회 형태가 구성될 확률은 지극히 적었다.


 대공황이 터지자 국가 위기 사태가 온 바이마르에 대통령 비상대권이 발동되었다. 헤르만 뮐러는 내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에게 자신을 대통령 내각의 총리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힌덴부르크는 세계 1차대전에서 활약 전쟁 영웅이었다. 뮐러가 의회 내각을 하면서 군비 축소를 주장 한 적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힌덴부르크는 뮐러를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힌덴부르크는 뮐러의 요구를 무시하고 새로운 총리를 자신의 내각에 포함시킨다. 중도 좌파적 성향을 보인 헤르만 뮐러에서 중도 우파적 성향의 하인리히 브뤼닝이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나치의 등장


 브뤼닝은 대공황으로 파탄난 독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긴축 재정과 임금 상승 억제와 같은 정책을 실시 했다. 여전히 군소 정당이 난립하고 있던 구조였던 의회에서 브뤼닝이 지지를 받아내기란 매우 어려웠다. 계속 된 정책 실패와 비협조적인 의회의 태도는 브뤼닝을 점차 힘들게 했다.


 더군다나 브뤼닝은 온건 보수적 성향을 띄고 있어 공산당을 매우 싫어 했다. 30년에 벌어진 총선에서 나치당과 공산당이 약진하며 의회 안에 두 세력이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나치당은 18.3%, 공산당은 13.1%의 의석을 차지했다.


 브뤼닝은 공산당 세력을 막기 위해 나치당과 손을 잡게 된다. 브뤼닝은 사회 혼란을 해결 하기 위해 대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 대연정에 나치당을 끌어들이게 된다. 당시 나치당의 지도자인 아돌프 히틀러와 협상을 시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브뤼닝이 무작정 나치 당의 손을 들어 준 건 분명 아니었다. 공산당의 세력이 점차 커지게 되는 구조에서 나치당의 도움 없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산화를 막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나치당의 협조가 필요했다.


 브뤼닝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절대 요직을 주지 않으려고 했고, 히틀러는 어떻게든 요직을 받아 나치당을 바이마르 중심에 놓으려고 했다. 이런 브뤼닝의 온건책은 나치당의 성장을 계속 돕고 있었다.


 그리고 시작된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는 재선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는 과반 득표도 실패 했고, 상대 후보인 히틀러는 무려 30.1%의 득표를 보이며 대약진에 성공했다. 비록 히틀러는 대통령에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독일 정치에 있어 2인자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나치당이 더이상 약소 정당이 아닌 바이마르 정치의 중심으로 온 것을 선언하게 된것이다.


 당시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나이는 무려 85세였다.


힌덴부르크는 재선에 성공한 이후 새로운 총리로 프란츠 폰 파펜을 임명했고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패망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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