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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악수하는 힌덴부르크와 히틀러



바이마르 공화국의 새 총리, 프란츠 폰 파펜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임명한 세 총리 프란츠 폰 파펜은 전형적인 지연관계에 의한 선임이었다. 파펜은 과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 선거에 나갔을 때, 그에게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했고 둘은 친분을 쌓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군소 정당인 나치당과 공산당의 약진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회에는 절대 강자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 놓이다 보니 정당에 오래 소속된 인물 중에서 총리가 나오긴 매우 어려웠다. 게다가 팔순을 넘긴 힌덴부르크의 노망도 파펜 선임에 한 몫 했다. 힌덴부르크는 평소에도 발랄하고 유쾌한 파펜을 매우 좋아했다. 이러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능력이 없는 프란츠 폰 파펜이 바이마르의 새로운 총리로 임명된다.


 파펜 총리는 4달 반이라는 짧은 임기동안 안좋은 정책은 전부 골라서 했다. 국민들 앞에서 자신의 목표는 독재라라는 상식 밖의 발언을 하고, 실업자가 치솟는데 실업 수당을 엄격히 제안했다. 자신과 친한 무능한 슐라이허 장군을 내각 관료로 앉혔다.

 심지어 파펜은 총리직 수락조차 자신의 워라 소속 당인 가톨릭 중앙당의 동의 없이 수락해 이미 당에서 쫓겨난 상태였다. 그리고 자신을 비스마르크에 비유하며 비스마르크 역시 헌법을 어기며 법안을 통과 시켰다는 말을 내뱉으며 헌법을 안지키고 법안을 통과 시켰다.


프로이센 지방



파펜 희대의 삽질, 프로이센 쿠데타

  파펜의 무능하면서 밝은 성격은 그의 주위에 나쁜 목적의 사람들을 많이 꼬이게 했다. 그 중에 절대 곁에 두어서 안될 사람 한명이 있었는데, 바로 아돌프 히틀러다. 일찍이 히틀러는 파펜의 무능하면서 성격 좋은 구실을 예측 했고 히틀러는 항상 파펜에게 깍듯이 대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항상 파펜에게 내각 유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고, 파펜은 이런 히틀러를 보며 깍듯하고 겸손한 인물이라며 무한한 신뢰를 보내주었다.


 잔머리가 평소에도 잘 돌아갔던 히틀러는 파펜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한다. 원내 2당이었던 나치당은 권력을 잡기 위해 2년 남은 국회를 해산하고, 돌격대의 활동을 허용 함과 동시에 나치당은 파펜 내각을 지지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파펜이 이를 수락함과 동시에 나치당 돌격대는 활동을 개시한다.


 그들의 첫번째 목표는 사민당 지지세가 강한 프로이센 지방이었다. 돌격대는 프로이센 지방에서 활동하며 수시로 공산당과 부딪혔고, 보수 성향이 강했던 파펜을 이를 빌미로 프로이센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게다가 파펜은 사민당 지방 조직과 군사 조직의 해산을 지시했고, 내전을 걱정한 사민당 측은 이를 수락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사민당은 더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몰락 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운명을 맞이해가고 있었다.



좌 : 프란츠 폰 파펜우 : 쿠르트 폰 슐라이허



 파펜 내각의 종말


 앞서 히틀러의 제안에 따라 기존의 국회는 해산되고 1932년 7월 31일 새로 총선이 열리게 되었다. 이를 통해 나치당은 손쉽게 제1당이 되었다. 이 이후로 히틀러는 거칠 것이 없었다. 히틀러는 파펜 지지를 파기하고 파펜과 힌덴부르크와의 대화를 거부 했다. 파펜 총리는 제대로 뒷통수를 맞은 셈이었다.

 나치당 인물 중 한명이었던 요제스 괴벨스는 전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이 실각하게 된 것은 파펜 총리가 힌덴부르크를 상대로 인맥과 뒷 조작을 통해 당선이 된 것이라고 언론을 통해 발표하며 민심과 파펜을 멀어지게 만들었다. 국민도 의회도 파펜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파펜의 유일한 편은 힌덴부르크 대통령이었다. 그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파펜에 대한 애정은 대단했는지 그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의회 해산권을 제출한다. 하지만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나치당의 헤르만 괴링은 의회 해산권을 무시하고 군소 정당들과 손을 잡고 내각 불신임안을 국회에 발의한다. 심지어 공산당 조차 파펜에 대한 불신임안에 찬성하며 파펜은 사면초가에 빠진다.


 파펜은 버텼으나 슐라이허는 이를 수락하지 않을 시 전국 곳곳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며 협박했고, 결국, 힌덴부르큭 대통령은 파펜을 총리직에서 울면서 쫓아내고 슐라이허에게 새로운 총리의 자리를 내준다.



 나치 내각의 탄생


 파펜에게 남은 것은 그렇게 친했던 슐라이어에 대한 복수심이었다. 결국 또 다시 나치에게 손을 빌린다. 그는 히틀러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의 총리직 까지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파펜은 히틀러에게 총리직을 제안하고 자신은 부총리에 오를 것을 제안 했다. 평소 파펜을 광적으로 좋아하던 힌덴부르크를 설득하면 가능할 것이라고 말한다.

 히틀러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파펜은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히틀러를 총리로 하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베를린 정계가 발칵 뒤집혔다. 히틀러는 기존의 양당 출신 인물이 아닌 극우 비주류 나치당의 수장이었다. 심지어 당시 히틀러는 정치 경력도 별로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히틀러 내각을 보곤, 실제로 힘은 파펜에게 쏠릴 것이로 히틀러는 그저 바지 총리에 불과 할 것이라는 게 정치계의 주된 생각이었다.


 그리고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임명된다.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풍전등화의 바이마르, 히틀러 내각


 하지만,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장악을 위해 많은 준비를 이전부터 해왔다. 그가 총리가 되자마자 바로 프로이센 내무장관에 헤르만 괴링을 선임했다. 당시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찰 통제권은 내무부에 존재했다. 이를 보고 있던 파펜은 자신이 히틀러 내각을 조정하고 있다고 착각했지만 이미 모든 권력은 히틀러에게 양도되었다.


 히틀러 내각이 처음 행동한 것은 바로 수권법이었다. 수권 법은 쉽게 총리에게 모든 권력이 양도 되는 것을 의미했다. 표면적인 내용은 민족과 국가의 재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 이었지만, 법의 실상은 이와 전혀 달랐다. 입법과 행정 사법이 모두 총리 한명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 법률이었다. 하지만 해당 법안의 통과 되기 위해서는 국회의 2/3이상의 동의가 필요했다. 나치당은 1당이기는 했지만 2/3이상의 의석수를 만족하기 위해선 다른 당의 도움이 필요했다.


 히틀러에게 이때 한번 다시 천운이 따르는데 바로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다. 공산당 소속으로 추정되는 정신이상자 한명이 독일의 국회의사당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계기고 히틀러는 다수의 공산당원과 국회의원들을 체포한채로 수권법을 손쉽게 통과 시킬 수 있었다. 히틀러 독재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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