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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베르사유 조약 - 위키백과)
베르사유 조약의 1320억 마르크
세계 1차대전에서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승전국이 되었다. 세계 1차대전에 많은 국력을 소모했던 승전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하게 된다. 과거 비스마크르에게 호되게 당한 전적이 있는 유럽 국가들은 이번 기회로 독일을 회생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연합국은 독일에 1320억 마르크의 배상을 요구했다.
1320억 마르크라고 하면 감이 안올 것이다. 당시 조약에는 1320억 마르크를 금으로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전쟁을 거치면서 전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화폐 가치는 하락되고 현물의 가치는 어마어마하게 치솟는 상황이었다. 이런 현상은 패전국인 독일에는 더욱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전쟁전 마르크의 달러 환산 가치는 1달러에 4마르크였는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될 시점에서의 달러 환율은 1달러에 330마르크가 되었다. 독일의 경제는 날로 갈 수록 파탄해졌고, 심지어 1달러에 8천마르크까지 떨어지는 현상도 일어났다.
독일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 배상금을 갚기 위해 화폐를 계속 찍어내야 했고, 이럴 수록 화폐 가치는 더욱 떨어져 인플레이션 현상을 더욱 심해졌다. 가뜩이나 전쟁에 대한 패전으로 국민들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와중에 갚을 수 없는 수준의 배상금 까지 떠안게 된 독일 국민들의 세계 사회에 대한 불만은 쌓여갔다.
(바이마르 공화국 - 위키 백과)
독일의 공산화를 두려워한 미국
이때 독일에 한줄기 빛같은 나라가 있었다. 그나라는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경제가 완전히 파탄만 독일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시민들 사회에 공산화 바람이 불게된다. 당시 소련 볼셰비키의 등장으로 전세계 적으로 공산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 와중에 초인플레이션으로 삶이 각박했던 독일 인들에게 한줄기 희망은 바로 공산당 세력이었다. 실제로 전쟁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가장 힘들던 1925년부터 1928년까지 곳곳에서 공산화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독일 시민들은 질서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혼란스러운 정국을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도부읜 사회민주당은 전혀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를 대서양 건너 멀리서 주시하고 있던 미국은 더이상 독일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독일이 공산화 되는것은 시간문제 같아 보였다. 독일은 이를 막기위해 꾸준하게 독일에게 원조를 보내고,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상금 경감을 요구 했다. 당연하게도 처음에 양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된 미국의 압박으로 배상금을 차츰 경감되었고, 이에 따라 독일인들의 삶도 점차 나아지게 된다.
미국의 원조는 절망적이었던 독일인들에게 다시한번 회생의 계기를 심어주게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우와 극좌 세력의 반목이 심해지고 있었다. 공산당을 필두로한 극좌 세력은 노동자 세력을 기반으로 지속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반대로 나치로 대표되는 극우 세력 역시 공산당을 비난하며 사회 곳곳에 혼란을 야기 했다. 이 와중에 독일의 원조로 경제가 점차 나아지자 인기 없던 바이마르 공화국 지도부도 서서히 회복세를 보였다.
(베니토 무솔리니 - 위키 백과)
이탈리아의 불만과 무솔리니의 집권
사실 베르사유 조약에 불만이 있던 나라는 독일만이 아니었다. 승전국 중 하나였던 이탈리아 역시 불만이 가득했다. 이탈리아의 경우 자신들이 세계 1차대전에서 결정적 승리를 가져왔다고 느끼고 있었다. 실제로 꼭 틀린 말도 아닌게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이탈리아 군의 활약은 대단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붕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일과 더불어 주요 동맹국의 한 축을 무너 뜨렸다.
이탈리아는 영국과 세계1차대전 참전에 관한 비밀 조약을 맺었다. 1차대전에 연합국의 손을 들어 주는 대신 아드리아해 건너편의 영토를 보장 받은 것이다. 이탈리아 역시 반도 내부에 머물러 있던 자신들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했다.
근데 베르사유 조약 체결에 참가했던 오를란도 총리가 얻어온 땅은 이탈리아 북동부의 조그만한 땅 뿐이었다. 실제로 오를란도 총리는 이탈리아에 대한 이런 처우에 대해 무척이나 화가 나 협상 장을 뛰쳐 나왔다고 한다. 애초에 약속 받았던 아드리아해 건너편 땅은 1제곱미터도 받지 못하자, 이탈리아 국민들은 제대로 뒷통수를 맞게 된다. 세계 1차대전에 알프스 산맥에서 죽어간 이탈리아 청년들을 달래기에 베르사유 조약에서의 이탈리아 할당량은 매우 부족했다.
이는 이탈리아에 파시즘 정부가 들어서게 하는데 한목했다.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반발, 무능한 정부의 외교술에 분노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새로운 정치체제에 손을 들어주게 되고 이때 나온 사람이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다.
(만주 사변 - 위키 백과)
만주 사변, 일본의 팽창 야욕
베르사유 체제에 또 불만을 품은 다른 나라는 일본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한반도를 점령하며 서서히 열강 세력으로 진입해오던 일본 역시 세계 1차대전에 참가하며 뭔가 콩고물이라도 자신들에게 떨어지지 않을까 하고 큰 기대를 했다. 하지만, 본인들에게 돌아온 것은 겨우 칭다오 지역 일부와 북태평양의 섬 몇개 였다.
다만 이쪽은 이탈리아와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이탈리아의 경우 정말로 세계1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를 거두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알프스 산맥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치열하게 싸웠다. 많은 이탈리아 군인들이 목숨을 잃고 다쳐서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런 와중에 겨우 주 하나도 안될 소 지방 하나를 배당받고, 애초에 약속한 아드리아해 연안 지방에 대한 보상은 입 싹닫아버리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근데 일본은 사실 세계1차대전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 그저 군대 일부 지원해줬을 뿐이다. 사실 그정도에 북태평양의 섬까지 배당 받았으면 꽤나 많은 소득을 얻은 것일지 모르지만 일본의 야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열강들의 관심은 중국이었다. 영국 역시 아편전쟁처럼 중국 시장에 대한 야욕을 꽤나 보여왔다. 다만 과도한 팽창으로 인해 세계 1차대전이라는 위기를 한번 겪고나자 많은 나라들이 조금은 소심해졌을 뿐이었다.
이때 먼저 치고나간 것이 일본 제국이었다. 일본제국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중국 시장 진출에 야욕을 보였다. 당시 중화민국의 지도자는 장제스였는데, 중국 내에서도 장제스에 대한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꽤나 있었다. 이들과 규합한 일본 제국은 만주 영토에 만주국을 성립하게 된다.
그리고 베르사유 체제에 불만을 품을 이 세나라가 결국 세계 2차대전을 일으키는 주요 3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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