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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 지역 (출처: 위키백과)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정책


  레벤스라움(Lebensraum)은 독일어로 생활권을 의미한다. 이전부터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생활권이 늘 좁다고 느껴왔다. 서부 유럽 대부분 국가들이 게르만 족 출신 국가이기는 하지만 늘 게르만 족의 중심은 자신들이라 생각해왔던 독일인들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세계 곳곳으로 팽창하는 것을 엄청 부러워했다. 게르만 족의 피해의식은 결국 세계 1차대전으로 이어졌고, 독일은 패전의 멍에를 쓰게 된다. 이로서 독일인들은 더더욱 피해의식이 더 커졌고, 게르만족의 우월성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히틀러는 동방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게르만족의 원래 터전은 서부 유럽이 아닌 동부 유럽이었다. 이들은 과거 훈족의 이동으로 점차 유럽 서부와 남부로 쫓겨나게 되어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은 것이다. 게르만족들은 자신들의 원래 터전인 동부 유럽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자리잡은 민족은 (게르만족 기준으로) 열등한 슬라브족과 유대인이 자리잡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이들은 몰아내고 동부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고 싶어했다. 결국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탄생된 것이 독일 판 민족 우월주의인 '레벤스라움'이다.


  레벤스라움은 나치 독일과 히틀러 사상의 기초였다. 히틀러가 훗날 슬라브 민족의 터전인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를 차례대로 공격한 이유도 이 사상에 따라 실행된 것이다. 히틀러의 최종 목표는 동방 진출을 바탕으로 한 대게르만 제국을 실현이었다. 이제 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레벤스라움을 실행하기 위한 첫번째 발을 내딛게 된다.



레벤스라움 목표에 따른 대게르만 제국 영토 (출처 : 위키백과)


  

  히틀러의 라인란트 진주


  1차 세계대전 이후 맺어진 로카르노 조약에 의하면 라인란트는 비무장지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승전국에 속해 있었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독일이 다시 자신들의 나라를 침공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양국인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독일 영토 중 라인강 서부 지역을 무장하지 못하게 명문화 했고, 이 일대가 라인란트였다.


  히틀러는 외무부 장관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에게 라인란트 재무장 계획을 말했다. 외교부의 실력자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리벤트로프에게 라인란트 재무장시 주변국의 예상 반응을 물어 보았다. 하지만 외교부와 군부 모두 이 정책에 대해 반대했는데, 라인란트 진주 시 프랑스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게 그의 걱정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프랑스는 대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프랑스에는 나약한 군인이 많고 아직도 세계 1차대전 참전 군인들이 여전히 장성급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늙고 병든 군대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이탈리아 쪽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점점 팽창하고 있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활용하고자 했기에 얼른 전쟁을 끝내고 유럽 전선으로 복귀를 원했다. 히틀러는 이런 점들을 정확히 눈치채고 있었다. 모든 나라가 무솔리니에 눈을 돌리고 있을 때, 히틀러는 라인란트로 군대를 보낸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라인란트로 독일군 22,000여명과 지역 경찰 14,000여명을 투입했다.



라인란트로 향하는 독일군 (출처 :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프랑스의 반응


  라인란트 재무장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국가는 바로 프랑스이다. 히틀러의 동방 정책의 실현을 위해서 우선적으로 서부 전선의 안정이 필요했다. 라인란트를 비무장한 상태에선 프랑스에게 뒤를 잡히게 되고, 절대 동방 정책이 성공할리 없었다. 이 점을 프랑스도 잘 알고 있었고, 프랑스의 외무장관 피에르-에티엔 플랑댕은 독일의 이런 행태를 규탄하고 라인란트 철수를 요구했다. 


  프랑스는 충돌을 각오하고 군대를 모아 라인란트에서 독일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육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의 생각은 달랐다. 가믈랭은 이미 독일군의 규모가 프랑스 군을 넘어섰다고 말하면서, 독일군을 몰아낼 확률이 없으니 괜히 반응해서 두번째 세계전쟁의 위험을 감수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라인란트 재무장에 실패했다면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전세계 역사 학자들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독일은 아직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지 채 2년밖에 되지 않았고, 나치 외부는 물론 나치 내부에서도 히틀러 정권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존재했다. 다소 전쟁 준비가 미흡했음에도 상황을 반전 시킬 카드가 필요했던 히틀러는 라인란트 재무장을 지시했다.



1936년 3월 8일 동아일보 기사 (출처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프랑스의 믿을 구석, 마지노 선


  훗날 히틀러가 가믈랭의 라인란트 진주 방관을 보고 “만약 그때 당신이 행동으로 옮겼다면 우린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가믈랭에 이런 오판에는 한가지 믿을 구석이 있었다. 바로 마지노선이다.


  마지노선은 가믈랭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의 대독전선에 세운 일종의 대형 벙커다. 당시 육군성 장관이었던 '앙드레 마지노'의 이름에서 따온 거대 요새는 대독전선 전역에 펼쳐 세워졌다. 참호전이 중심이 되었던 세계 1차대전을 겪은 가믈랭은 훗날 일어난 전쟁 역시 참호전이 될 것이라 예상했고, 이를 대비해 거대 요새를 세우게 되었다. 프랑스는 독일과 더불어 전후 피해가 가장 컷던 나라였다. 그렇기에 프랑스는 더이상 공세적인 전략을 펼치기 매우 어려웠고 수비 전술로 전환하게 된 점도 한 몫을 했다.  



프랑스 정치가, 앙드레 마지노 (출처 : 위키백과)



  라인란트 재무장의 결과


  히틀러는 나이트 말 하나를 적의 체스판 깊숙한 곳으로 찔러 넣었다. 히틀러는 적의 반응은 떠보았다. 프랑스는 적의 공격적인 대응에 맞서 견제를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뒤로 빼는 오판을 저질렀다. 프랑스의 수비적 행보에 기겁한 나라는 라인란트에 국경을 맞대고 있던 또 다른 나라였던 벨기에. 독일의 직접적인 행동에도 수수방관하는 프랑스를 보자 벨기에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철회하고 중립국가로 선회하게 된다. 이렇게 연합국은 소중한 우방국 하나를 잃게 되었고, 서부 전선에 우위를 가져온 히틀러는 동부 전선으로 눈돌리게 된다.


  라인란트 재무장은 베르사유 체제의 완벽한 종말을 가져온 사건이다. 2년뒤 발발하게 되는 세계 2차대전의 예고편 격이었다. 히틀러가 만천하에 전쟁 욕심을 보여줬지만 아무 나라도 이를 견제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지켜만 보았다. 그는 전쟁 승리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레벤스라움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실행할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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