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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오스트리아 국경 검문소 철거



히틀러와 슈슈니크의 대립


  돌푸스가 살해된 이후 슈슈니크는 총리에 올라 오스트리아 내의 나치당과의 전면전을 돌입했다. 나치당은 줄곳 독일과의 합병을 주장했는데 슈슈니크는 이에 대해 절대적으로 반대했고, 히틀러는 당연히 슈슈니크가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에 군침을 흘리던 나라는 독일뿐 만이 아니었다. 바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역시 오스트리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양국은 지속적으로 오스트리아 문제에 개입하며 서로의 이권 챙기기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와중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게 되자 다른 나라로 부터 큰 비난을 받게 된다. 이탈리아는 국제적 고립을 막기 위해 히틀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오스트리아에서 손을 떼고, 절호의 기회를 잡은 히틀러는 더욱 더 거세게 오스트리아를 압박했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내무장관 자이스-잉크바르트


  히틀러는 슈슈니크를 자신의 산장으로 초대해 오스트리아를 보호국으로 만드려는 목적으로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슈슈니크가 그의 말을 들어줄리 없었다. 둘의 대화는 큰 성과가 없이 끝났지만, 히틀러의 노력 끝에 오스트리아의 내무장관 직에 나치당 출신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올려 놓는데 성공한다. 


  슈슈니크는 나름 히틀러의 목적을 막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의 생각은 달랐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오스트리아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독일 군이 진군해 들어올것이라 판단했다. 슈슈니크는 더이상 이를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독일과의 합병 찬반을 국민투표할 것임을 선언한다.


  이는 히틀러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제대로 열받은 히틀러는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 점령을 시도한다. 이 계획이 오스트리아에 먼저 들어가게 되고, 독일군과의 전쟁을 두려워하고 나치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슈슈니크의 사임을 요구했다. 슈슈니크는 어쩔 수 없이 국민투표 중지와 사임을 선헌하고 차기 총리 직을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물려주게 된다.



빈으로 진군하는 나치 독일군



안슐루스, 오스트리아의 몰락


  1938년 3월 12일, 독일 육군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와 참모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오스트리아로 진군한다. 독일 군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속에 쉽게 수도인 빈에 도달 할 수 있었고, 바로 다음날은 3월 13일 대통령이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병 조약에 동의하고 사임함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손아귀에 쉽게 떨어진다. 


  오스트리아 수상 자이스-잉크바르트는 형식적인 합병 절차가 필요했으므로, 스스로 앞장 서 합병 찬반 국민투표를 지시했고, 독일 군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97%라는 어마어마한 찬성 비율을 기록하며 합병은 승인된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정책에 첫번째로 넘어간 나라로 기록되게 된다.



뮌헨 협정으로 변화 된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주데테란트 문제


  오스트리아 합병은 유럽 내 많은 게르만 족에게 대제국 설립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들었다. 폴란드를 비롯한 발칸반도에 위치한 게르만 족들이 나치 독일로의 합류를 열망했다. 그 중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테란트 지방이 먼저 행동을 개시했다. 이 곳은 체코슬로바키아 외곽지역에 위치한 독일인 거주 지역이었다. 주데테란트에서 계속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동맹국인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볼 히틀러가 아니었다. 프랑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바로 군대를 이끌고 체코슬로바키아로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 이렇게 되면 로카르노 조약에 따라 프랑스의 동맹국인 영국 역시 주데테란트에 참전할 의무가 생긴다. 이를 어길시 영국은 자신들의 최대 아군인 프랑스를 잃게 되는 결과가 나온다. 마치 라인란트 재무장에서 프랑스가 아무 행동도 못할 것이라는 예측 했던 것처럼, 주데테란트 문제에서 영국은 아무 행동도 못할 것이라는 히틀러의 예측이 다시 한번 맞아 떨어졌다.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뮌헨 협정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이 상황을 최대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이 문제를 히틀러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뮌헨으로 향한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만은 꼭 피하려고 했다. 그들은 독일 군대의 역량을 과대 평가 했고, 특히 국민들의 반전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아 내면서 주데테란트를 독일로 합병 시키는 조약에 동의를 하면서 뮌헨 협정이 체결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동맹국이라고 생각했던 프랑스와 영국에게 크게 뒷통수를 맞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 폴란드, 헝가리 등 주변국에게 눈 뜬 채로 영토를 뺏기게 된다.


  반면 체임벌린이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사실에 영국인 들은 열광했다. 지금 히틀러의 행적을 아는 우리야 체임벌린과 영국인들의 결정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세계1차대전을 겪은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의 무서움을 직접적으로 겪은 상태였다. 그들의 제1목표는 전쟁 방지였다. 


  뮌헨 협정을 체결한 체임벌린은 9월 30일 본국으로 돌아와 영국인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는 동의서를 국민들 앞에 보여주고, 영국 시민들은 그런 체임벌린에게 열광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 2차대전이 시작되기 정확히 1년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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