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분열과 유산의 파괴를 야기한 동유럽의 재앙 VS 지중해의 새로운 지배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등장 3차 십자군 당시 서방 세력의 화려한 군단이 뭉쳤지만 실속은 없었다. 그나마 리처드의 노력 끝에 멸망 직전의 예루살렘 왕국을 간신히 살려 내는데에만 그쳤다. 세번의 십자군을 겪으면서 서방세력들은 십자군 자체에 대한 강한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군주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머나먼 중동으로 향했지만 전혀 소득 없이 돌아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교황청은 여전히 십자군 국가들을 유지시키고 싶었다. 100여년 가량 지켜온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빼앗긴데다가 십자군 국가도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레반트 일대를 전부 이슬람 세력에게 내줄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서방 ..
그리스의 반격 이탈리아 군의 공세를 막아낸 그리스 군은 반격을 계획한다. 그리스 군은 알바니아의 영토인 코르치아와 사란데로 향했다. 그리스 군의 총 사령관은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였다. 11월 22일 그리스가 코르치아를 점령했고, 11월 30일에 이르자 그리스 군은 알바니아의 영토 4분의 1일 점령한다. 바돌리오 원수가 걱정했던 부분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 타국에 원정을 보낼 정도의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폭설이 내리고, 추위가 지속되자 그리스도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들은 12월에 들어서 알바니아 공세를 종료했다. 하지만, 그리스 국민들은 이탈리아를 저지한 것에 크게 열광 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겨우 한달만에 그리스에서 공세를 실패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스 ..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신흥 세력에 대한 진압 VS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조선의 가톨릭 대규모 탄압 병자호란이 끝남에 따라 조선은 청의 거대한 세력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서방세력과도 잦은 교역을 하던 청나라 였기에 조선 내부에서도 그들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 힘을 길러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방의 문물이 서서히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중에는 한문으로 작성된 성경 책도 있었다. 서구의 선교사들이 청의 백성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데, 이 책이 조선에까지 들어오게된다. 이 책들이 재야 사이에 서서히 퍼지게 되고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들 사이에서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게 된다. 이들은 중국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기도 하면서 조선에 가톨..
베니토 무솔리니의 등장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그는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포를리의 작은 마을인 프레다피오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게 된다. 매우 반항적인 아이었던 그는 교사에게 대들다가 퇴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워낙 학업 성적을 뛰어나 새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졸업 할 수 있었다. 병역 기피를 위해 스위스로 이민을 갔지만, 스위스는 그를 추방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군대에 지원해 1904년부터 1906년까지 2년간 군복무를 수행한다. 제대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당에 들어가 활동을 이어가며 열렬한 사회주의 신봉자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와중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면..
바르바로사의 원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동로마 제국의 이사키우스 1세는 쉽게 그들에게 길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사이가 안좋았던 양국은 애초에 서로에게 이득이 될 행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화가난 바르바로사가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반환 받는 조건으로 길을 터주게 된다. 바르바로사의 대군은 이크니온으로 향했다. 원래 신성 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은 동맹 관계였지만, 서로의 이해관계 앞에서 적으로 변했다. 바르바로사의 대군은 룸 술탄국을 공략한다. 순식간에 이크니온을 점령한 십자군은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항복을 받아내고, 통행권을 보장받게 된다. 십자군은 다음 목표인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던 와중 1190년 6월 10일, 바르바로사가 소아시아 지역의 살레프 강을 건너던..
국경을 넘는 이탈리아 군대 이탈리아의 원수 로돌프 그라치아니의 지휘 아래 총 12개의 사단이 이집트 국경을 넘었다. 이들의 목표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쳐서 수에즈 운하를 차지해 인도양까지 세력을 넓힐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수비대보다 4배나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이집트에서의 낙승을 예상했다. 수많은 탱크와 오토바이 그리고, 수송 차량이 지중해 연안을 달리고 있었다. 이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집트 해안 수비대는 이탈리아 군을 전혀 막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전차들 앞에서 그들의 전력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보병 부대가 전차 부대의 뒤를 따랐지만, 굳이 합류할 필요가 없었다. 전차부대 만으로도 이집트의 수비대는 초토화 되고 있었다. 이들은 겨우 이틀만에 130Km를 달렸다. ..
구 체제 붕괴의 시작이자 세계 역사의 변곡점 VS 종교적 사상 보존을 위한 성스러운 이념 전쟁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후한말 중국, 16세기 말 일본, 고려 말기 한국을 보더라도 난세에 특히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2세기 말 유럽과 이슬람도 그랬다. 11세기부터 예루살렘과 동로마 제국을 두고 붉어진 양 세력간의 다툼은 각지에 숨어있던 영웅들을 한데 모으는데 성공한다. 3차 십자군 전후로 중세 시대가 변곡점을 가져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동로마제국의 중흥을 이끈 콤니노스 왕조는 원정 이후 왕조가 끝나며 제국의 몰락을 불러왔다. 유럽의 제후들도 더이상 교황을 믿지 않았으며 가톨릭 봉건제에서 벗어난다. 이슬람 역시 술탄국이 몰락하고 튀르크 족이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게된다. 유..
무솔리니의 선전 포고 히틀러가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을 완전히 휩쓸고 있었던 1940년 중반. 같은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타국보다 한발 늦게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 비해 빈약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합병한 국가는 리비아-에티오피아 축선의 몇몇 약소 아프리카 국가와 발칸반도의 알바니아 왕국 뿐이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을 때,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해 발칸반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한다면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들이 연합국에 가담할 것이 뻔했다. 그 사이 히틀러는 프랑스..
전 후 대한민국 안정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 VS 헌법을 무시하고 권력을 쟁취한 독재 시대의 시발점 사사오입.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만한 말이다. 말 그래도 숫자 4는 내리고, 5는 올린다는 반올림의 법칙을 의미한다. 이 말이 유명해진 계기는 다름아닌 1공화국에서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때문이다. 6.25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입법과 사법체계를 무너뜨리고 교모하게 자신의 권력을 이어간 사건이다. 대통령의 권력을 이용한 대국민 사기극이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무너진 계기이자 대통령 독재 체제의 시발점이 된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 알아보자. 사건 경과 1948년 7월 24일,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
영국의 고독한 전쟁 다시 시계를 돌려 1941년 3월로 돌아가자. 독일의 공습을 간신히 막아낸 영국은 여전히 대서양에서 외로운 전쟁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독일의 U보트는 이런 영국의 고립에 주요 원인이 되었다. 독일은 U보트와 샤른호르스트, 비스마르크 전함을 이용해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작전을 지시했다. 독일은 베저위붕 작전에서 참여 했던 귄터 뤼첸스 중장에게 지시하여 비스마르크 전함을 이끌고 통상 파괴작전을 전개한다. 뤼첸스는 나치 독일의 해군 제독인 카를 되니츠와 해군 사관학교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다. 되니츠는 뤼첸스에게 U보트와 많은 양의 연료를 지원했다. 그리고 그에게 비스마르크의 승함을 지시하고, U보트와 긴밀히 연락할 수 있는 지휘권을 주웠다. 그만큼 친구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던 되니츠는 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