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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공군



국경을 넘는 이탈리아 군대


  이탈리아의 원수 로돌프 그라치아니의 지휘 아래 총 12개의 사단이 이집트 국경을 넘었다. 이들의 목표는 알렉산드리아를 거쳐서 수에즈 운하를 차지해 인도양까지 세력을 넓힐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수비대보다 4배나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이탈리아는 이집트에서의 낙승을 예상했다.


  수많은 탱크와 오토바이 그리고, 수송 차량이 지중해 연안을 달리고 있었다. 이들의 기세는 대단했다. 이집트 해안 수비대는 이탈리아 군을 전혀 막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전차들 앞에서 그들의 전력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보병 부대가 전차 부대의 뒤를 따랐지만, 굳이 합류할 필요가 없었다. 전차부대 만으로도 이집트의 수비대는 초토화 되고 있었다. 이들은 겨우 이틀만에 130Km를 달렸다. 이들이 멈춘 곳은 시디 바라니라는 해안 도시였다. 


  하지만 이탈리아 군은 이 도시에 멈춰 참호를 파기 시작했다. 전쟁 대비가 전혀 안된 이집트-영국 연합군을 상대로 승기를 잡은 이탈리아는 갑자기 스스로 승기에 제제를 걸었다. 그 이유는 이탈리아 역시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애초에 이집트 침공 자체가 무솔리니의 압박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출전이었다. 그라치아니 원수는 더이상 진격 했다간 영국군에게 반격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해 시디 바라니에서 전쟁을 준비하며 장기전에 대비했다. 영국 역시 이탈리아가 공세를 멈춘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영국군은 본토의 독일군 막기에 바빠서 이집트로 전력을 돌릴 여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양국은 휴식을 준비하며 북아프리카 전선을 장기화할 생각을 한다.





이집트 침공의 결과


  이탈리아가 시디 바라니에 멈춰 시간을 벌고 있을 때, 영국 역시 반격을 준비했다. 영국의 함선들은 지속적으로 이탈리아 보급선을 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잘 구축된 이탈리아의 포격 어뢰들에 번번히 막혔다. 영국은 이런 단순한 괴롭힘만으로 이탈리아를 괴롭힐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한다.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쉬는 시간동안 독일이 영국을 점령해주길 바랬다. 자신들도 전투가 준비가 안되었고, 영국이 무너지면 자연스럽게 이집트의 영국군을 본국으로 돌릴 것이라고 판단했기에, 수비적인 전략을 취했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영국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다. 나치의 대대적인 공세를 막아낸 영국은 오히려 북아프리카로 만약 병력을 가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바란 상황과 정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오히려 이들이 마주한 건 숨을 고른 영국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대대적인 반격이었다.


로돌프 그라치아니




타란토 공습


  이탈리아군의 오판으로 시간을 번 영국군은 반격을 준비했다. 영국은 이전부터 지중해에서의 재해권 장악에 많은 비용을 투자했다. 실제로도 이들의 해군 전력은 유럽 어느 국가보다 월등했다. 독일의 영국 본토 침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들은 바로 계획은 수립한다. 영국은 1940년 10월 21일 이탈리아 해군이 주둔하고 있는 타란토를 공략하기로 한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소드피시에서 화재 사고가 발생해 공습을 미루게 되었다. 소드피시는 무엇보다 야간 공습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매우 중요한 항공기였다. 결국 영국은 소드피시 확보를 위해 작전일을 11월 11일로 미룬다.


  당초에 항공모함 이글호가 출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연료 시스템에 이상이 발생해 일러스트리어스호가 대신 수행하도록 전략이 변경되었다. 이들은 소드피시 5대와 항공모함 호위를 위한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을 배치했다. 그리고 11월 11일 타란토의 이탈리아 함대에 야간 공격을 실시하기 위해 몰타 섬에서 정찰기를 출격 시켜 타란토 정찰을 시작한다. 이탈리아는 경보시스템을 통해 영국군 정찰기가 타란토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지만 레이더 망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아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군은 이들이 대규모로 호송선단을 보내는 것을 보자 단순한 호송 작전이라고 파악하고 영국군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밤 9시 영국 항공모함 일러스트리어스에서 윌리엄슨 중령이 이끄는 815비행중대 소드피스 12대가 출격했다. 이들은 밤 10시 58분 타란토에 도착했다. 이들은 16발의 조명탄을 발사하며 공격을 시작했다. 첫번째 타겟은 항구의 유류 저장고였다. 이들은 5000 피트에 달하는 거리를 급강하하며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e Cavour)에 어뢰를 발사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탈리아 대공포가 윌리엄슨 중령이 탄 소드피시를 명중시켜 그를 포로로 잡았다. 이윽고 등장한 2대의 항공기가 전함 리토리오(Littorio)에 어뢰를 발사해 명중시켰다. 곧바로 뒷 편대가 기함 비토리오 베네토(Vittorio Veneto)를 향해 어뢰를 발사했지만 이는 명중시키지 못했다. 또다시 뒤에 파견된 편대는 카이오 두일리오(Caio Duilio)에 어뢰를 명중 시켰다. 곧바로 이탈리아도 대응 사격을 했고, 이 과정에서 영국 공군 베일리 대위가 전사한다.


콘테 디 카보우르 전함



공습이 끝나고 난 뒤


  타란토 공습의 결과로 이탈리아는 전함 세척을 잃는다. 콘테 디 카보우르(Conte de Cavour), 리토리오 (Littorio), 카이오 두일리오(Caio Duilio) 총 세대를 잃게 되었다. 물론 이후 수리되어 복귀하긴 하지만 엄청난 전력의 누수를 가져온다. 이외에도 주요 유류탱크를 잃게 되어 이탈리아 군은 심각할 정도는 아니지만 꽤 아픈 타격을 입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것은 전함의 숫자보다 이탈리아 군의 사기일 것이다. 이전까지 승승장구하며 북아프리카 지역을 정복하던 상승세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이탈리아는 타란토 공습에서 당한 피해를 갚아주기 위해 훗날 몰타 섬과 알렉산드리아에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


  영국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왜나면 그들이 목표로 했던 만큼의 물리적 성과는 이루지 못했다. 손실비율로 보아도 상당한 이득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2대의 항공기와 4명의 조종사를 잃었지만, 이탈리아 전함 3대의 손실을 가져왔다. 훗날 1대는 현역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나머지 2대는 반년간의 전력 공백을 이끌어 냈다. 하지만, 조종사 4명의 손실은 뼈아팠다. 크지 않은 물리적 성과에 비해 전략적 성과는 상당했다. 절망적이었던 연합군들은 한숨 돌렸고, 역시 지중해에서는 아직 영국이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탈리아가 쉬고 있던 시간동안 영국은 자신들이 아직 전쟁을 수행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연합국에 참가한 모든 나라들에게 알릴 필요성이 있었다. 항복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던 이집트와 그리스에게 다시한번 영국의 의지를 표출한 것이다. 


  또한가지 타란토 공습의 의의는 해전 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항공기만으로 구성된 편대가 얼마든지 해군 함대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항공기로 전함을 가격하는 것이 가능할 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국 공군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를 지켜본 일본 군은 훗날 진주만에서 미국 해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공습을 하는 데 배경이 된다.





마타판 해전


  타란토 공습 이후 영국군은 지중해 패권 장악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이들은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튀니지에 정박하고 있던 해군들을 공략했다. 이윽고 수단과 소말릴란드의 이탈리아군도 몰아내며 승기를 잡아가자, 그리스와 합동작전을 펼쳐 타란토 공습보다 더 큰 피해를 주기 위해 계획한다. 


  1941년 3월 28일 영국군의 라이트 포스가 전대를 이끌고 공격을 감행한다. 이들은 안젤로 아치노 제독이 이끄는 이탈리아 함대와 만난다. 영국군의 전력은 퀸 엘리자베스 급 전함과 구축함 9척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탈리아는 전장에 다시 복귀한 비토리오 베네토 전함을 비롯해 순양함 8척과 구축함 9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은 크레타 섬에 있는 말레메 비행장으로부터 브리스톨 블렌헤임 폭격기를 출격시켰다. 10시 58분투터 11시 27분동안 영국 항공대 라이트 포스와 비토리오 베네토 사이의 교전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시간 동안 영국은 전함에 대한 포격을 성공한다. 


  정오에 들어 양측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영국 항공대는 트렌토급 전합인 트렌토, 트리에스테, 볼차노를 공격했다. 이후 연합군은 총 6차례의 공격을 더 진행해 세 함데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다. 17시 30분 구축함 4척이 폴라 순양함을 구원하기위해 돌아갔다. 그 사이 영국은 이탈리아 구축함 4척을 침몰시키며 이탈리아 군은 타란토 항과 브린디시 항으로 퇴각했다. 


  영국군은 타란토 공습에 이어 마타판에서도 확실히 자신들의 지중해에서의 우위를 가져왔다. 이탈리아는 또 다시 해군 전력은 영국보다 열세에 놓여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나 라이트 포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이틀은 크레타 섬이라는 지중에 한가운데의 훌륭한 요새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런 지리적 이점들이 영국의 지중해에서 재해권 장악을 유리하게 가져갔다. 반대로 이탈리아 역시 지중해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지중해 상실은 곧 이탈리아 본토 침략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꼴이다. 결국 이탈리아는 지중해 장악을 위해서는 그리스와 크레타 섬 확보가 중요하다고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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