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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솔리니의 선전 포고
히틀러가 프랑스를 비롯한 영국을 완전히 휩쓸고 있었던 1940년 중반. 같은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놀랍게도 가만히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타국보다 한발 늦게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이탈리아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 비해 빈약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합병한 국가는 리비아-에티오피아 축선의 몇몇 약소 아프리카 국가와 발칸반도의 알바니아 왕국 뿐이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있을 때, 무솔리니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해 발칸반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리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한다면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들이 연합국에 가담할 것이 뻔했다.
그 사이 히틀러는 프랑스가 항복함으로서 자신들의 침공을 마쳤다. 무솔리니는 뒤늦게 전리품을 획득하려는 목적으로 프랑스를 공격했지만, 대패하고 나와 창피함만 얻고 물러났다. 이렇게 된 주요 원인이 바로 이탈리아의 군대가 너무 약했다. 앞서 에티오피아 전쟁에서도 한번 언급 했듯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는 전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독일은 전쟁 준비를 위해 항공기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전차 전술 교리를 갖춰 나갈 동안, 무솔리니는 자신의 사리사욕만 챙길 뿐 전혀 발전된 모습을 못 보여주고 있었다. 애초에 독일과 경제력 차이가 상당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착각은 무서웠다.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다고, 무솔리니는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자신들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쪽에 개입해 전세를 굳힐 것이라는 전략을 내세운다. 프랑스 침공이 끝나자 무솔리니는 본격적으로 히틀러에게 협력하며 연합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실시한다. 실상은 어느 진영으로부터 환영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히틀러 역시 겉으로는 무솔리니의 추축국 가입을 환영했지만, 속으로는 달갑지 않았다. 적 보다 무서운게 무능한 아군이듯이 무솔리니의 선전 포고로 독일은 영국, 소련과의 전쟁도 버거운 와중 아프리카에 병력까지 투입해야 되는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집트로 향하는 이탈리아 군
무솔리니는 더이상 히틀러의 선전을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히틀러의 전쟁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것만 같았다. 독일의 대규모 항공기는 연이어 영국 본토를 포격했다. 유럽 본토에서는 대표적인 중립국인 스페인과 스위스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연합국에 가담한 그리스와 자유 프랑스만이 전쟁을 이어갔다. 무솔리니는 영국과 프랑스가 반반씩 나눠가진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차지하는 것이 주요 목표였다.
이들의 첫번째 목표는 이집트였다. 무솔리니가 이집트를 첫번째 목표물로 삼은데는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반도다. 알바니아 합병 역시 그리스 침공을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부터 공략하기엔 부담이 따른다. 그리스가 제법 강한 나라임과 더불어 자신들의 함대를 그리스로 향하게 된다면 지중해에 있는 모든 영국 함선의 집중 공략을 받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식민지로 삼고 있었기에 이집트까지 확보하게 된다면, 지중해 동쪽 절반을 완전히 차지하고, 이 병력을 그리스에 집중한다면 쉽게 확보 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물론, 그리스보다 이집트의 국력이 더욱 약한 것이 한 몫 했다.
칼라브리아 해전
이탈리아는 이집트로 가기 위해 리비아로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출전한다. 잉글랜드 역시 이탈리아가 이집트로 향한다는 첨보를 듣고 알렉산드리아로 보급을 위해 이동했다. 이탈리아는 나폴리를 출항해 리비아의 도시인 벵가지로 향했는데, 연합군을 속이기 위해 트리폴리로 가는 시늉을 했다. 영국의 전함은 이탈리아의 전력에 비해 부족했다. 독일과 북해와 대서양에서 해전을 하고 있었기에 지중해로 많은 병력을 돌릴 수 없었다. 영국 해군은 이탈리아의 리비아 보급을 그냥 지켜 볼 것인지, 이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진행에 우위를 점할 것인지 선택했어야 했다.
영국의 선택은 선제공격이었다. 영국 함대의 지휘를 맡은 앤드류 커닝햄 제독은 이탈리아가 리비아에 도착해 공군 병력과 협조를 통한 전투 체계를 구축한다면 지중해에서의 주도권을 내주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가 리비아로 전함을 보낸 1940년 7월 6일, 영국 역시 동시에 알렉산드리아로 구축함을 보내고 전투를 준비했다.
이틀 뒤인 7월 8일 이탈리아의 항공기가 영국 함대를 포착했다. 이탈리아의 순찰 항공기 캔트 Z.506은 영국함대가 자국 함선을 향하고 있다고 이탈리아의 지휘관 이니고 캄피오니 제독에게 알렸다. 전쟁 준비가 안된 이탈리아는 전투를 피하려고 했다. 일부 함선이 유급을 위해 시칠리아에 대기중이었기에 타란토의 일부 함선을 보충해 영국 공격에 대비했다. 그사이 이탈리아 항공기가 영국 함선에 타격을 주며 양국의 첫번째 교전이 발생한다. 이탈리아는 이 공격으로 영국이 반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벵가지로 순조롭게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캄피오니의 오산이었다. 7월 9일 버닝햄 제독은 이탈리아 함선과 약 140km 가량 떨어져있었다. 그는 워스파이트 전함으로 하여금 이탈리아 함선의 접근을 명령했고, 동시에 항공모함 이글호에서 9대의 전투기를 출격시켰다. 그리고 15시 15분을 기점으로 워스파이트는 공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도 이윽고 반격을 시작했다. 15시 22분 함선 주세페 가리발디가 연합군을 상대로 포격을 시작했다. 이윽고 약 30분여군간 양대 함선이 뒤엉키며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전함과 순양함의 숫자는 이탈리아가 압도적이었지만 영국군은 항공모함과 더불에 포탄의 정밀성에서 이탈리아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양측은 적 구축함을 침몰 시키기 위해 어뢰를 여러차례 쏘았지만 단 한발도 명중시키지 못했다. 결국 영국군은 구축함 2척의 손상을 입고 물러났고, 이탈리아는 전함 한척과 구축함 한척의 손상을 입으며 후퇴했다. 결국 양국은 각각의 목적지로 돌아왔다. 아직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은 양국은 서로 전면전을 피하고 약간의 교전만 주고 받으며 전면전에 대비한다.
이탈리아 제독 이니고 캄피오니
이탈리아의 선제 공격
이탈리아는 이집트 침공을 위해 넘어야 할 한가지 걱정거리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영국령 몰타 섬이었다. 시칠리아 섬 바로 아래 위치한 몰타 섬은 연합국이 전술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위치였다. 몰타 섬에서 출항하는 전투기는 이탈리아 본토를 코앞에 두었기에 이탈리아 입장에선 큰 걱정거리였다. 이탈리아 공군은 선전 포고를 시작한 직후인 6월 11일 몰타 섬에 대한 폭격으로 자신들의 참전 소식을 전세계에 알린다. 38대의 폭격기와 12대의 전투기는 몰타의 수도 발레타를 폭격했다. 이탈리아의 참전을 예상하지 못한 연합군은 몰타에 대한 구원은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단 3기의 이탈리아 글래디에이터에 당하면서 영국 공군은 치욕을 당한다. 영국은 6월 21일 호커 해리케인은 몰타에 배치시켰다.
호커 해리케인은 상당히 강력한 함선임에 틀림 없었으나 몰타의 방공망은 너무나 열악했다. 영국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던 만큼 영국의 도움이 없이는 몰타의 방어는 힘들어 보였다. 이탈리아는 발레타 항구에 지속적으로 폭격을 가했고, 항상 긴장상태에 놓인 몰타는 그저 영국의 구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역시 독일과의 일전으로 많은 병력을 활용하지 못했던 때라 몰타의 미래는 어두웠다. 이탈리아의 이집트 침공이 본격화 되었던 8월에 이르러서 영국은 몰타의 중요성을 인지했다. 영국은 몰타에 대규모 함선을 배치시켰다.
타임지 표지에 실린 이탈로 발보
이집트 국경을 넘는 이탈리아 군대
이탈리아는 전쟁 준비 도중 토브룩에서 공군 원수 이탈로 발보를 잃는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허무없었다. 그는 영국과의 전쟁을 대비해 토브룩 상공을 순찰하던 도중 아군의 오인사격에 비행기가 격추되어 사망하게 된다. 1940년 6월 28일 한창 영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이탈리아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불의의 일격을 당한 것이다.
이탈리아는 이집트 국경 앞에서 머뭇거렸다. 당초 7월 초에 공격하기로 했지만, 독일의 영국 공격이 시작됨과 동시에 시간을 맞추기 위해 7월 15일로 미뤄졌다. 하지만 독일의 공세가 취소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탈리아도 계획을 미루게 되었다. 두번째 계획은 8월 22일로 잡혔다. 하지만 무더위가 지속됨에 따라 병력을 온전히 가동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계획은 다시 한번 미뤄졌다. 그리고 9월 9일을 시점으로 하는 세번째 계획이 세워진다. 하지만 리비아에서 항공 작전을 수행되던 중 영국군에게 발각되어 공군 병력의 계획을 대거 수정해야 했고, 또 다시 계획을 미루게 된다.
그사이 리비아-이집트 국경 지대에서는 지속적으로 양국의 힘겨루기가 이뤄졌다. 폴란드의 기병 부대인 후사르의 이름을 딴 영국의 11기갑부대 후 사르 사단은 리비아 국경 지대를 수색하면서 카 푸조 요새를 장악했다. 그리고 9월 9일 안니발레 베르고졸리가 이끄는 제 10군이 해안선을 따라 이집트 국경지대로 향한다.
1940년 9월 13일 이탈리아의 이집트 공세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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