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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중인 베니토 무솔리니



베니토 무솔리니의 등장


  이탈리아의 두체 베니토 무솔리니. 그는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포를리의 작은 마을인 프레다피오에서 태어났다.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게 된다. 매우 반항적인 아이었던 그는 교사에게 대들다가 퇴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워낙 학업 성적을 뛰어나 새 학교에서 우등생으로 졸업 할 수 있었다. 병역 기피를 위해 스위스로 이민을 갔지만, 스위스는 그를 추방했고 결국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군대에 지원해 1904년부터 1906년까지 2년간 군복무를 수행한다. 제대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당에 들어가 활동을 이어가며 열렬한 사회주의 신봉자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그러던 와중 1914년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하면서 30대 예비역이었던 그는 국가의 명령에 의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이탈리아 사회당은 전쟁에 반대했으나 그는 연합국으로 참전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된다. 이 시점 부터 점점 무솔리니의 전체주의적 성향이 나오게 된다. 전쟁이 끝난뒤 그는 자신의 사상을 정반대로 뒤집어 열렬한 전체주의자가 된다. 사회당에서도 쫒겨난 그는 1921년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을 설립한다. 그는 검은 셔츠단이라는 정치 깡패를 모아 이탈리아의 황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권력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주장했다. 1922년 10월 22일 검은 셔츠단과 무솔리니는 무기를 들고 로마로 향한다. 내전을 두려워 했던 국왕이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을 수여하며 사건은 마무리된다. 이것이 바로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이 시작을 알린 로마 진군이다.



로마 진군 직후의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이탈리아


  모든 독재 정권이 그러했듯 무솔리니 역시 시작부터 막나가지는 않았다. 그는 이탈리아 월드컵 개최를 시작으로 국제 연맹의 상임 이사국 지위를 받아오며 이탈리아의 발전을 위해 힘썻다. 또한 이탈리아의 팽창을 위해 식민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했다. 이 당시 리비아 총독으로 파견된 인물이 이집트 침공 당시 이탈리아 군 총 사령관을 맡은 로돌프 그라치아니였다. 이전의 이탈리아가 외교 문제에서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던 만큼 무솔리니는 외교 문제에 큰 신경을 썻다. 같은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와 최대한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즉흥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바꾼 성향 어디 안간다고, 같은 파시스트 동료가 등장하자 그는 갑자기 침략을 선회한다.


  히틀러가 등장하자 무솔리니는 그와 빠르게 군비 감축 동맹을 맺는다. 옛날에 촌뜨기라고 놀리던 히틀러가 어느덧 독일을 유럽 최강국의 지위에 올려 놓지 곧바로 그와 관계를 맺고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를 포기한다. 무솔리니는 히틀러가 동유럽의 국가들을 계속 잠식해가자 자신도 아프리카의 몇 안되는 독립국 중 하나인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식민지로 삼게 된다. 이후 알바니아까지 침략을 하며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를 하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솔리니는 중립국 위치를 유지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폴란드와 프랑스를 차례로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추축국의 승리의 냄새를 맡았는지, 프랑스 침공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시작한다. 이렇게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세계 2차대전을 수행하게 된다.


  이것이 무솔리니와 이탈리아가 세계 2차대전에 참전하게 될 때까지의 이야기다.


이탈리아 원수, 피에트로 바돌리오



이탈리아의 욕망


  다들 알다시피 이탈리아가 이집트를 침공하면서부터 북아프리카 전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집트 침략군이 잠시 멈추고, 지중해에서 이탈리아와 영국의 힘겨루기가 한창일 때, 무솔리니는 지중해 전장에서 우의를 점하기 위해 그리스 침공을 계획한다. 그리스 침공을 성공했을때, 이점은 분명히 있다. 영국은 지중해 동부의 그리스-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탈리아 해군은 고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집트와 그리스를 굴복시킨다면 지중해 동부 전선이 무너지면서 서부의 영국군과의 전투에 집중하면 된다. 이탈리아 해군 역시 그리스-이집트 축선이 존재해 자신들이 계속 영국에 밀리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생각 자체는 틀린게 없었다. 문제는 이탈리아의 전쟁 준비상태와 그리스 침공의 난이도였다. 우선 이탈리아는 애초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이렇다할 기갑 사단 하나 갖추고 있지 못한 구식 보병상태였다. 이탈리아 육군은 구식 전차에 구식 전투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지중해 전투에 몰두하고 있었던 만큼 해군의 성능은 나름 괜찮았지만, 그에 비해 육군의 전투력은 상당히 떨어졌다. 이 마저도 주력 부대들은 리비아에 파견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그리스는 방어전을 하기에 안성맞춤인 지역이다. 육로를 통과하기엔 수많은 발칸반도의 국가를 통과해야하므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육군 병력을 지중해를 통해 해상 수송을 진행해야 하는데, 기적적으로 병력을 그리스 반도에 내린다 하더라도, 서부에 위치한 핀도스 산맥을 넘어야 그리스 주요 도시들에 도착할 수 있다. 아예 지중해를 쭉 돌아 그리스 동부를 침략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 사이 영국 군이 이탈리아 해군을 놓칠리 없었다.


  이런 점을 눈치채고 있었던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그리스 침공에 반대했다. 얻는 것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 큰 전략이었다. 그리스가 연합국이긴 하지만, 그들 역시 많은 병력을 동원해 독일이나 이탈리아를 괴롭힐 수 있는 실정은 아니었다. 이런 나라들은 괜히 건드렸다가 병력과 시간만 낭비하게 된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영광과 파시즘 유토피아 건설이라는 말도 안되는 허상에 빠져 그리스 침공을 지시하게 된다.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그리스로 향하는 이탈리아 군


  이집트 침공이 한참이던 1940년 10월 13일, 무솔리니는 이탈리아군 원수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총 사령관으로 임명해 그리스 침공을 지시했다. 침공 개시일은 10월 26일. 남은 시간은 단 2주 뿐이었다. 이런 말도안되는 일정을 요구 받은 바돌리오는 침공 성공을 위해서 20개의 사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그리스 침공을 위해 단 10개의 사단을 할당했다. 그리스의 전투력을 얕보고 가용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병력만 배정한 셈이었다. 바돌리오는 전쟁 준비가 매우 미흡하다는 점을 알고 그리스군을 자극하라는 명령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이에 화가 난 무솔리니가 격분하여 바돌리오를 파면했다. 그리고 총사령관 대행으로 세바스티아노 비스콘티 프라스카가 임명되었다.


  바돌리오의 일정 연기로 약 이틀이 미뤄진 10월 28일 이탈리아는 그리스 왕국에 최후 통첩을 내린다. 무솔리니는 그리스 왕국에 이탈리아군 주둔과 주요 거점 햘양에 대해 요구 했다. 그리스에서 독재 정권을 구축하고 있던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총리는 무솔리니의 요구를 듣고, 프랑스 어로 “그래! 전쟁이다.” (Alors, c'est la guerre.)  라고 말했다. 이 말이 그리스 사람들에게 총리가 “아니오.(Οχι, ohi)”  라고 말했다고 전해졌고, 이는 그리스의 세계 2차대전을 상징하는 문구가 된다. 메탁사스와 그리스 인들의 결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탈리아 군대는 알바니아와 그리스 국경지대인 에페로스로 향했다. 23 보병사단과, 51 보병사단 그리고 131 기갑사단이 선봉에 섰다. 기갑 사단은 CV-33, M11/39과 같은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는 독일에 비해 상당한 구식 전차였다. 뒤이어 이탈리아는 해안을 따라 기병과 포병 부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작전으로 핀도스 산맥을 공략했다. 그리스 군은 이탈리아보다 더욱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탈리아는 이 점을 잘 알고 빠르게 핀도스 산맥을 넘어 동부 지대로 상륙하여 그리스의 항복을 받아낼 계획이었다.



핀도스 산맥 위치 (출처: 위키백과)



핀도스 산맥 전투


  제 3군단 지휘를 맡은 세바스티아노 비스콘티 프라스카는 핀도스 산맥으로 향했다. 프라스카의 군대는 이탈리아 최고 정예 부대였다. 이들은 핀도스 산맥의 주요 거점인 메초본으로 향했다. 그리스 군은 주변 지리를 빠삭하게 잘 알고 있었다. 메초본을 25km 남겨둔 시점에 프라스카의 군대는 그리스 군의 저항에 부딪힌다. 그리스 군은 이탈리아 군이 좁을 골짜기를 통과할 떄 마다 군대를 파견해 크게 타격을 주었다. 폭우까지 겹쳐 프라스카의 군단은 제대로 전진하지도 못하는 실정에 놓였다. 전쟁이 개시된지 채 1주일도 되지 않은 11월 3일 프라스카의 정예 부대는 퇴각을 명령한다.


  그리스 군은 퇴각하는 이탈리아 군을 추격했다. 메탁사스는 전쟁을 예견하고 4년전부터 산악지대 운용에 맞는 부대를 육성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군은 독일의 전격전에 감명을 받아 기갑 사단 부대를 만드는 데 힘썻지만, 높은 산악지대를 넘는데는 무용지물이었다. 반면에 그리스 군은 한데 뭉쳐 이탈리아 군대를 막아냈다. 11월 중순이 지나자, 그들을 이탈리아에게 빼았견던 영토를 모두 되찾는 데 성공한다. 프라스카는 다급하게 알바니아로 귀한하기 위해 거점마다 주요 물자들을 그대로 두고 도망쳤다. 그리스 군들은 프라스카가 놓고 간 물자를 통해 보급을 했다. 그리스 군의 완벽한 방어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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