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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해군 원수, 카를 되니츠
영국의 고독한 전쟁
다시 시계를 돌려 1941년 3월로 돌아가자. 독일의 공습을 간신히 막아낸 영국은 여전히 대서양에서 외로운 전쟁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독일의 U보트는 이런 영국의 고립에 주요 원인이 되었다. 독일은 U보트와 샤른호르스트, 비스마르크 전함을 이용해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작전을 지시했다.
독일은 베저위붕 작전에서 참여 했던 귄터 뤼첸스 중장에게 지시하여 비스마르크 전함을 이끌고 통상 파괴작전을 전개한다. 뤼첸스는 나치 독일의 해군 제독인 카를 되니츠와 해군 사관학교 동기이자 오랜 친구였다. 되니츠는 뤼첸스에게 U보트와 많은 양의 연료를 지원했다. 그리고 그에게 비스마르크의 승함을 지시하고, U보트와 긴밀히 연락할 수 있는 지휘권을 주웠다. 그만큼 친구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던 되니츠는 그에게 지휘권까지 위임하면서 이번 작전을 대대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그리고 뤼첸스는 곧장 카보베르데 섬에 당도하여 자신이 탑승하고 있는 비스마르크 군함과 구축함 6척을 이끌고 발트해로 향했다. 이 날이 바로 1941년 5월 21일 이었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급 전함
영국 해군의 대응
영국도 독일의 움직임을 눈치 챘다. 영국 입장에서는 독일이 어떤 작전을 펼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은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대항할 만한 전함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이 보유하고 있었던 함수는 대체로 막 건조된 함선이었다. HMS 킹 조지 5세 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 함 등을 보유했다. 모두 민간인 기술자를 이용해 막 건조된 함선이어서 아직 전쟁에 투입하기 이르다는 평이 많았다.
하지만 영국의 선택지는 없었다. 발트해를 향해 서서히 다가오는 비스마르크 전함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내야했다. 영국이 추측한 비스마르크 함선의 도착지는 노르웨이 북부 혹은 아이슬란드 상륙이었다. 영국의 해군 대장 존 크로닌 토비 제독은 군대를 둘도 나누어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해협으로의 이동을 지시했다. 이중 빅토리어스 함선은 아이슬란드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덴마크 해협으로 이동했다. 이외의 다른 군소 군함들도 비스마르크 수색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1941년 5월 23일 아침, 아이슬란드와 북극해를 탐험하던 노포크와 서포크 순양함이 드디어 비스마르크를 발견한다. 이 날은 게다가 안개가 매우 심하게 꼈는데, 영국군이 레이더를 통해 비스마르크를 발견한 반면, 독일군은 이 두 함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노포크와 서포크는 비스마르크에 대한 미행을 시작한다.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덴마크 해협 전투
비스마르크를 미행하던 도중 노포크가 실수로 너무 비스마르크에 근접해 이들의 미행이 들키게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곧장 노포크에 포격을 가했지만 안개 덕분에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들은 23일 내내 비스마르크를 미행했다. 그리고 영국 해군 중장 홀랜드 제독과 그가 지휘하는 함선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 비스마르크에 대한 포격 명령이 내려진다.
5월 24일 새벽 홀랜드 제독이 이끄는 함선이 비스마르크를 발견하고 즉시 포격을 실시한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되니츠 제독이 지시한 자신들의 임무가 있었으므로 대응사격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들은 전날 영국 해군을 공격하다 레이더가 손상되었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영국군에 대한 공격은 전력 소모라고 생각했다. 뤼첸스 제독은 빠르게 전장을 벗어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장이었던 에른스트 린데만 대령의 생각은 달랐다. 배의 후미에 붙은 전함을 달고 가는 것은 너무 위함하기 때문에 화력을 이용해 영국군을 격참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비스마르크의 화력은 상당했다. 불과 2분만의 영국군 후드 한척을 박살내었다. 이 후드가 삽시간에 격침되어서 당시 배에 있던 1400명의 승조원 중 불과 3명반 살아남았다고 한다. 홀랜드 제독 역시 이 후드 폭발로 인해 사망했다. 후드가 격침당하자 비스마르크 전함을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모든 전력을 다 쏟아 붇는다. 갓 건조된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제대로 작동되는 포탄도 많지 않았다. 결국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더이상의 전투가 어렵다 판단하고 후퇴했다. 다행히 비스마르크 함선의 연료 탱크를 명중하여 독일 해군도 더이상의 추격은 하지 못했다.
귄터 뤼첸스
영국과 독일의 자존심 싸움
홀랜드 제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차선임자인 프레데릭 웨이크워터 소장이 사령부에 후드가 격침이 되었다는 보고를 올리게 된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영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후드는 영국 해군의 상징이었다. 해군 대장 존 크로닌 토비 제독과 윈스턴 처칠은 비스마르크는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었다. 이는 영국 해군의 자존심 문제였다. 그래도 지금껏 자신들이 해군 만큼은 독일에 앞선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은 비스마르크 한척을 잡기 위해 자신들의 병력을 총 동원하게 된다.
자존심에 상처가 난 건 독일도 마찬가지 였다. 비록 적국의 후드를 격침 시키는 소기의 성과를 얻었으나, 독일 공군 전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스마르크 호가 자신들의 작전을 실패하고 괴멸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해군 상급대장 알프레트 잘베히터 제독은 모든 U보트를 서부 해역으로 이동 시킬 것을 지시했다. 귄테 뤼첸스의 작전 수행에 최소 병력을 남긴 모든 가용 가능한 U보트가 투입 된 것이다. 이들은 비스마르크 작전 수행을 돕기 위해 그린란드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프레드릭 웨이크워터 경
비스마르크 포획하기
연료 탱크를 손상당한 비스마르크 함선은 근처 항구로 급하게 회항해야했다. 영국은 그들의 항로상 독일에 우호적인 중립국이나 프랑스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군은 지브롤터의 순양전함 리나운과 항공모함 아크 로열을 출격 시켰다. 그리고 캐나다 헬리팩스에서도 리벤지 전함을 출격 시켰다. 다른 임무가 있었던 영국 함선 모두 비스마르크 찾기에 투입되었다. 다행히 연료부가 손상되 계속 바다에 연료를 뿌렸기에 비스마르크의 항로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항구에 들어가기 위해 무선신호를 발사했고, 이를 영국 해군이 포착했다. 그 즉시 신호의 발원지를 추측하여 모든 병력을 돌렸다. 영국이 예상한 경로는 아이슬란드를 경유하여 독일로 들어갈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계산이었다. 아이슬란드 경유 항로를 아무리 수색했지만 비스마르크는 발견되지 않았다. 영국이 자신들의 계산이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 챈 시점은 두번째 비스마르크의 무선신호를 관측 한 이후였다.
두번째 신호로 새로운 비스마르크의 항로가 계산되었는데,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항로였다. 이 들은 북아일랜드 지방에서 프랑스 영해로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영국 해군 중에서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영해에 도달하기 전까지 비스마르크를 격침시킬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제임스 섬머빌 제독이 그나마 유일하게 가능성이 있었다.
5월 26일 저녁 7시경 섬머빌 제독이 이꾸는 소드피시가 출격했다. 독일도 비스마르크 전함 보호를 위해 U보트를 출격 시켰다.
에른스트 린데만
비스마르크의 최후
날이 밝았다. 어두운 저녁에 전함을 찾기란 쉽지 않았기에 소드피시는 비스마르크의 예상 경로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포드의 비스마르크 발견 속보가 내려왔다. 소드피시와 U보트 중 먼저 비스마르크 전함에 다가간 것은 영국의 소드피시 였다. 비스마르크는 거대 전함이기에 항공 어뢰 한발로 무너질 전함이 아니었다. 하지만, 맞은 곳이 교체 직전의 매우 낡은 키였다. 키에 적중하자 같이 연결되어 있던 모든 키가 뒤틀리면서 배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뤼첸스 제독은 급히 수리를 지시했지만, 물살이 세 수리공들의 접근 조차 어려웠다.
비스마르크는 완전히 조종 능력을 상실했다. 조타수들은 어떻게든 배를 조종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연속되는 영국의 공격에 비스마르크는 속수무책이었다. 뤼첸스 제독은 패배를 직감했다. 제독과 승조원들은 '총통 각하 만세'라는 전문을 사령부로 보내고 비행 전력에게 자신들의 위치를 최대한 많이 알렸다. 하지만, 이미 배의 통신 능력이 상실에 함선의 위치가 항공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결국 비스마르크는 해상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이동하지 못하는 사이 영국의 킹 조지 5세와 로드니 순양함이 도착해 비스마르크에 일제 사격을 가한다. 비스마르크도 응전했다. 하지만 완전히 포위당한 비스마르크였기에 이들의 응전은 최후의 발악에 불과했다. 결국 비스마르크호는 영국의 포격에 못견디고 바다속으로 침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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