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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파크




영국 공군의 야전 지휘관, 키스 파크

  독일은 지속적으로 영국의 비행장을 공략해왔다. 독일 군의 공격은 프랑스와 인접한 영국 남동부 비행장이 주 목표였다.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공군 사령관은 영국 제11비행단 지휘관 키스 파크 소장이었다. 1차대전 에이스 조종사 출신인 키스 파크는 독일 공세를 막기위해 Big Wing 전술을 도입하게 된다. 이 전술은 일렬로 퍼진 기존의 항공 편대와 다르게 좌우측에 힘을 실어 적의 전진을 지연시킨다. 그 사이 적 항공기를 격추시키는 전술이었다. 기존의 일률적인 공군 전술을 깬 획기적인 전술이었다. 이를 이용해 키스 파크 소장은 적은 병력으로 많은 독일 항공기를 잡아 낼 수 있었다. 비록 영국 조종사들은 독일 보다 3배가 넘게 출격해야 하는 전술이었지만, 영국 입장에선 유일한 선택지였다.

  8월 13일 독일의 수 많은 Ju 87 폭격기가 키스 파크가 방어하고 있는 11그룹의 항공장으로 출격했다. 스페인 침공에서 맹활약 한 Ju 87은 파괴력은 엄청났지만 속도가 다소 느렸다. 키스 파크는 이 점을 잘 알았고, 다우딩이 세운 방공 망을 통해 독일 폭격기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해 Ju 87에 엄청난 손실을 가했다. 이 날은 개전 이후 영국 공군의 최대 승리일이었다. 영국의 스핏파이어는 독일의 느린 폭격기를 상대로 엄청난 활약을 했다. 영국은 이 날을 8월 13일의 신나는 뇌조 사냥이라고 명명했다. 반면에 독일은 Ju 87이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파악해 영국 본토 항공전 기간에 Ju 87을 단 한차례도 쓰지 못했다. 


영국 방공 체계, 체인 홈




정보력과 의지의 차이

   양국은 정보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영국은 독일의 애니그마를 해독하고, 방공 체계를 건설해 이들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키스 파크는 독일 공세의 정보를 완벽하게 보고 받고 있었다. 이는 파크의 효율적인 수비 작전을 기초가 되었다. 정보력과 의지는 영국군의 최대 무기였다. 영국 공군은 항공장이 파괴되면 병사들을 동원해 빠르게 비행이 가능한 상태로 비행장을 복구 시켰다. 영국은 체인 홈(Chain Home)이라 불리는 조기 경보 체계가 있었다. 이 체계는 영국의 정보 체계와 병사들의 의지가 반드시 필요했다. 영국 국민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가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반면에 독일은 영국의 경보 체계를 전혀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알았더라도 자신들의 승리를 낙관했기 때문이다. 승리가 뻔해 보인 독일 공군은 그저 괴링에게 아부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괴링에게 잘보이기 위해 공군 지휘관들은 자신의 부대가 더 많은 전과를 올렸다고 뻥튀기 했다. 그리고 괴링은 부풀려진 영국의 피해를 보고 승리가 머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항공기를 얼마나 보유하고 있고, 비행장의 복구 속도나 항공기 생산 능력 등 아주 기초적인 정보 파악도 전혀 안하고 있었다. 독일 공군은 두 달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 놓였는데도 승리를 낙관하며 바다사자 작전 개시만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체인 홈 커버리지



검은 목요일

  1940년 8월 15일 괴링은 이제 영국 남부 항공군을 괴멸시키기 위한 마지막 공세를 시작한다. 물론 본인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다. 제2, 제3항공군을 동원하여 북해를 가로 질러 영국의 14전투비행단을 향해 출격했다. 괴링의 손에 쥐어진 보고에 따르면 키스 파크의 11전투비행단은 일찍이 괴멸 되었어야 했는데, 갑자기 자신들의 항공기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고 경악하게 된다. 독일 공군은 놀라긴 했지만, 최후의 발악이라고 생각하고 이들과 맞서 싸웠다. 이렇게 영국 제11전투비행단과 독일의 2,3 항공군의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독일은 그 사이 약 100여기의 후속 부대를 출격시켰다. 이들 역시 북해를 가로 질러 영국의 동부 해안가로 달렸다. 하지만 이 역시 영국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 영국은 자신들의 항구에 도달하기도 전에 40여기의 스핏파이어를 출격 시켜 독일의 후속 공격을 저지했다. 영국의 후속 공격에 괴멸 당한 것은 독일 제5항공군이었다. 이들은 이 때 당한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핬다. 영국의 완벽한 승리였고, 괴링은 경악했다. 충격에 빠진 독일 공군을 이 날은 검은 목요일이라고 불렀다. 괴링은 이 날을 영국 최후의 날이라고 호언 장담했지만 오히려 피해를 입은건 자신들이었다.

  독일은 전면적으로 전투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이들은 이제서야 조금씩 영국 방공 체계의 무서움을 느꼈다. 자신들의 모든 공세가 파악되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채고 이들은 적 비행장이 아닌 방공 레이더로 목표물을 변경했다. 그리고 키스 파크의 Big Wing 전술을 막기 위해서 전투 방식도 변경했다. 주 공격대를 출격 시킨 뒤, 영국의 스핏파이어가 요격하려 올 때 빠르게 후속 부대를 출격 시켜 이들을 막아 내기로 한 것이다. 

  키스파크의 완벽한 전술 아래 독일 폭격기들은 속수 무책이었다. 이들은 영국 스핏파이어에게 완전히 유린 당했다. 독일 전투기는 완전히 대열을 잃고 본국으로 귀환 하는데 급급했다. 독일 폭격기 16대와 전투기 7대가 완전히 격침 당했고, 30퍼센트 이상의 비행기가 재출격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괴링의 호언장담이 완벽히 박살나게 되는 순간이었다. 괴링이 역사적인 피해를 입은 이 날을 훗날 '검은 목요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트레퍼드 리멜러리


영국의 위기

  검은 목요일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전황은 좋지 못했다. 좋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패전 위기에 몰려있었다. 영국군의 문제는 크게 2가지였다.

  첫 번째로, 턱없이 부족한 조종사 수였다. 다행히 군수 시설에서 빠르게 비행기를 보급함에 따라 비행기 숫자는 독일군과 전투가 성립할 정도로는 유지가 되었다. 그에 비해 조종사의 수는 너무 부족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조종사는 고급 인력이다. 조종사 한명을 키우기 위해서 시간적으로 수년이 걸리고, 그 비용도 만만치 않다. 비행 학교에선 예비 조종사를 위한 연습 비행을 시켜줘야하는데 연습 비행을 위한 비행기와 비용 모두 부족했다. 궁여지책으로 다른 연합국의 조종사를 긁어 모았지만 그 숫자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다.

  두 번째로, 11전투비행단장 키스 파크와 12전투비행단장 트레퍼드 리멜러리의 불화였다. 이 둘은 독일 국경과 가장 가깝게 만나 있는 두 비행단의 지휘관이다. 이 둘이서 힘을 합쳐 독일군의 공습을 막아내도 모자랄 판에 노선 차이로 인해 서로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키스 파크는 11비행단의 전투원들이 독일군과 싸우는 동안 비행 기지를 지켜줄 것을 요구했는데, 리멜러리는 비행단을 지키는 것보다 자신도 요격에 나서 많은 독일군 전투기와 싸우기를 바랬다. 휴 다우딩이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리멜러리에게 비행단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리멜러리는 다우딩의 명령을 무시하고 대편대를 결성해 독일군 요격에 나섰다. 만일 독일군이 정보를 입수해 11 비행단을 지키는 병력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11비행단은 진작에 파괴 당했을 것이고 키스 파크의 놀라운 성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8월 말까지 간신히 선방해온 영국이었지만 독일군의 어마어마한 전투기의 숫자와 내부적인 문제가 맞물려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듯 했다. 윈스턴 처칠은 결사 항전을 외쳤지만, 시민들은 점차 전쟁에 필요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나 조종사들이 너무 지쳤다. 열악한 비행 환경과 살인적인 스케줄은 영국 조종사들을 힘들게 했다. 전투의 최전방에서 싸워야 하는 조종사들이 지친 기색을 지휘부가 모를리 없었고, 지휘부 역시 더이상의 항전은 힘들다는 결론을 내리기 직전이었다.


격추당한 영국의 스핏파이어




런던으로 옮겨간 불씨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의 양상을 정 반대로 바꾼 사건이 발생한다. 8월 24일 독일이 야간 폭격을 하고 있던 어느날 독일의 폭격기 2대가 길을 잃고 영국 상공에서 헤메고 있었다. 이 와중 대공포화를 받게 되자 늘 그렇 듯이 이 두 폭격기는 적진에 폭탄을 바로 투하하고 기지로 급하게 복귀 했다. 근데 이 폭탄이 떨어진 곳이 하필 런던 시가지였다. 여기까진 전쟁 중에 발생할 수 있는 흔한 오폭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윈스턴 처칠은 이를 보고 그냥 넘어갈리 없었다. 이 런던 오폭 사건응르 대대적으로 전시 홍보로 사용하게 된다.

  히틀러는 이 오폭 전까지는 모든 포격을 군사 시설에만 집중시켰다. 이는 상당히 옳은 전략이었다. 공군 원수 알베르트 케셀링은 지속적으로 런던 폭격을 주장했지만, 이는 오히려 역풍을 맞기 쉽다는 걸 히틀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처칠은 런던 오폭 사고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처칠은 영국 국민들에게 더러운 히틀러가 영국의 수도를 공격했다고 홍보했다. 영국 시민들도 이제 런던이 위험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영국의 반 히틀러 여론은 하늘을 찔렀다. 처칠은 곧바로 베를린 포격을 지시했다. 다음 날인 8월 25일 영국의 휘틀리 폭격기가 베를린 공습을 나섰다. 괴링은 전쟁 개시 전에 영국군 항공기 한대라도 베를린 상공을 날게 되면 자신을 마이어라는 성으로 불러도 좋다라고 호언 장담을 했다. 하지만, 전쟁 개시 단 2개월 만에 베를린에 영국 비행기가 폭격에 나선것이다. 

  히틀러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면전으로 전략을 바꿨다. 8월 31일엔 영국의 방공 감시망을 뚫고 비행대를 출격 시켜 무려 4,500여 톤의 폭타를 투하 시켜 영국 비행장 곳곳을 쑥대 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9월 7일 아침 800여 기의 폭격기와 600여기의 전투기가 출격해 바로 영국의 수도 런던으로 향했다. 영국은 당연히 이들이 남동부 공군 비행장으로 올 것이라고 판단해 그곳에 대한 대비를 해두었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지는 런던이었다. 독일군은 영국의 예측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영국은 전혀 런던 폭격에 대응을 못하게 된다. 연 이틀간의 런던 공습은 독일군의 대 성공으로 끝났다. 이제 전쟁의 불씨는 영국 남동부에서 런던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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