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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괴링



연합국의 절망적인 상황


  히틀러의 프랑스 침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드 골 소장과 구데리안의 항명 등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전쟁에서 이정도로 상대를 압도하기란 쉽지 않다. 그로 인해 1940년 여름 히틀러와 나치당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는 비단 독일 내에서의 인기로 그치지 않았다. 연합국과 추축국 사이에서 간을 보고 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독일과 동맹 조약을 맺으며 추축국으로 들어간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도 반 강제적으로 독일과 동맹을 맺게 된다. 무솔리니 역시 히틀러에 감명 받아 자신의 야욕을 펼치기 위해 곧바로 아프리카와 그리스로 침공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다시 살펴보자.


  반대로 연합국은 절망적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포병을 가지고 있다는 프랑스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영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나라는 아무도 없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로 이어진 서유럽 4개국 동맹이 완전히 무너지고 영국 혼자 남은 꼴이었다. 그나마 유럽에서 그들과 손을 맞출 나라는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프랑코 정권의 스페인과 무솔리니의 침공이 불보듯 뻔해 영국 만큼이나 절망적인 상황의 그리스였다. 타 대륙에 광활한 식민지가 있긴 하지만 본국까지는 거리가 꽤 된다. 사실 이는 영국 본인들의 업보이기도 하다. 동유럽 국가들이 히틀러의 손에 차례차례 무너질 때 손놓고 지켜보기만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동맹을 배신한 국가와 동맹을 맺을 국가는 어디에도 없다.



덩케르크에 버려진 연합군 물자



아리엘 작전과 독일 해군


  다이나모 작전과 아리엘 작전의 성공은 영국에게 있어 너무 소중했다. 영국이 두 작전으로 구한 50만의 병력은 거의 유럽 1개 국가 병력에 맘먹는 병력 숫자다. 히틀러의 느슨한 공격이 영국에겐 엄청난 힘이 된 것이다. 1940년 6월 25일 프랑스의 항복 직후 독일 내부에서 지체하지 않고 영국을 공격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병력으로 전쟁을 치르기를 포기했고, 잠시 쉬어가며 영국 침공을 위한 작전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히틀러의 이런 판단이 나쁜 생각이 아닐 수 있던 것이 독일 해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아무리 독일이 강력한 전차부대를 가지고 있어도 영국은 섬나라다. 수송선을 동원하여 전차부대를 도하하는 작전이 필수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영국 해군의 방어막을 반드시 뚫어내야 한다. 이미 수개월 전 나르비크에서 영국 해군에게 한번 당한 경력이 있던 독일이었다. 상륙에만 성공한다면 자신들의 승리가 보장되겠지만 영국 해군은 분명 강력했다. 그리고 나치의 해군 원수 에리히 레더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히틀러는 영국을 너무 얕잡아 봤다. 프랑스 칼레에서 영국 런던은 정말 가깝다. 이 짧은 거리만 어떻게든 버텨낸다면 충분히 영국 상륙이 가능할 것이라 본 것이다. 하지만, 샹륙 작전이 항상 실패하는 이유는 도하 지점으로 가는 것도 힘든데, 도달 해서 병력이 땅으로 들어가 요새를 뚫는데 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게다가 영국의 뒤에는 미국이 있었다. 발트해와 북해를 차지한 독일이었지만 저 넓은 대서양 연안은 미국과 영국이 더 영향력이 컷다. 영국은 대서양을 통해서 식민지로부터 공급되는 물자를 받으면 그만이다. 히틀러는 지속적으로 처칠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처칠은 국민들 앞에서 결사항전을 선언하며 독일과 끝까지 싸울 것임을 선포했다.



런던 상공을 감시하는 영국군 병사



괴링의 호언장담


  히틀러가 에리히 레더에게 독일 해군을 이길 전략을 세워오라고 지시했지만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유럽 2위 규모의 독일 해군이라고 해도 1위와의 격차는 상당했다. 이미 한번 대패를 겪어봤으니 무서움은 더했다. 레더 입장에서는 승산이 전혀 없는 전투의 작전을 짜오라고 하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고, 전략 회의에서 소극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와중 레더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이었다. 


  사실 괴링과 레더의 사이는 그닥 좋지 못했다. 물론 괴링과 사이가 좋았던 나치 수뇌부들이 누가 있겠냐만은. 괴링은 히틀러와 나치당 활동을 오랬동안 같이 해온 동지이자 그의 오른팔이었다. 그랬던 괴링은 다른 군 수뇌부들 보다 더욱 더 히틀러와 가까웠고, 그만 큼 권력 남용과 타 군에 대한 간섭이 심했다. 늘 괴링은 레더와 육군 원수 브라우히치를 아랫사람 처럼 대했다. 실제로 프랑스 침공 까지의 독일 공군 루프트바페의 활약은 대단했다. 


  하지만 다이나모 작전으로 괴링의 위세가 다소 내려갔다. 괴링이 주장으로 연합군에게 쉴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 안에 영국은 탈출에 성공했다. 심지어 괴링은 뒤늦게 탈출을 막기 위해 전투기 출격을 명했지만 탈출을 막아내지도 못했다. 괴링은 히틀러와 독일국방부최고사령부(OKW)의 수장 빌헬름 카이텔, 공군 원수 에리히 레더, 육군 원수 발터 폰 브라우히치가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공군 병력을 활용하면 영국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다. 괴링은 레더에게 병력 수송만 하고 있으면 독일 전투기를 활용해 영국 전함을 제압하겠다고 말했다. 레더는 당연히 옳다구나 하고 그의 작전에 동의한다. 괴링은 영국 침공으로 자신의 위세를 드높이려고 했고, 레더는 입장에선 작전이 실패해도 책일은 괴링이 전부 지게 될 것이 분명하므로 당연히 그의 작전에 동의 했다.



바다사자 작전



바다사자 작전


  괴링의 호언장담에 힘입어 나치 독일의 영국 상륙 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이 완성되었다. 해군 전함끼리 맞붙으면 당연히 패전을 할 테니 해군은 병력 수송에만 집중하고, 루프트바페가 제공권을 장악하기로 한다. 독일 병사가 바다에 발을 담구기라도 하면 득달같이 전함을 보내 집중 포격을 할 영국군이기에 제공권 장악은 무엇보다 필수적이었다. 히틀러는 10곳 이상의 상륙 지점을 세울 것을 요구했지만 해군의 사정상 많은 곳에 상륙 포인트를 잡을 수 없었기에 도버, 브라이튼, 램스게이트 등 5곳으로 줄였다. 


  상륙 후 최전방에는 해군 육전대가 투입되어영국군의 총알받이가 될 것이다. 그뒤를 산악 특공대가 투입 되어 주요 요새를 점령하면 안정적으로 독일 전차가 영국 해안으로 투입하게 된다. 그리고 독일 수송기 메서슈미트 323을 이용해 경전차와 병력을 투입하기로 계획한다. 이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제공권이다. 제공권의 장악이 반드시 동반되야 모든 것이 가능한 작전이었다. 제공권이 동반되어야 해상 작전이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연합군 전투기, 스핏파이어



독일과 영국의 공군 전력


  결국 작전의 성공 여부는 제공권 장악에서 갈릴 것이다. 양국 모두 제공권을 장악 할 수 있느냐가 이번 전투에서 승리의 열쇠 였다. 영국의 해군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공권 장악에 실패한다면 결국 상륙 지점을 독일에게 내 줄 것이 분명하다. 일단 양국의 전력 숫자를 단순 비교하면 독일이 영국의 공군을 압도했다. 독일이 보유한 항공기의 숫자는 1,120대였고 이중 폭격기가 500여대 였다. 반면 영국의 경우 총 62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국은 프랑스 점령이후 프랑스 북부지역의 항공장을 장악하고 항공기를 옮겨 출격 준비를 마쳤다. 독일은 총 5개의 항공군이 존재 했는데, 이 중 3개의 부대가 영국 항공전에 참가하기로 계획했다.


  브루타뉴 지역에 배치된 제3항공군이 잉글랜드 남서부와 웨일즈 지방을 담당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노르웨이에 있는 제5항공군의 경우 영국 동부와 스코틀랜드 지방을 맡게 되었고, 제2항공군은 잉글랜드 남동부를 담당했다. 결국 이 제2항공군이 잉글랜드 폭격의 주 전력이 될 것이다. 나머지 2개 항공군은 후방을 담당하고 유사시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리고 칼레와 덩케르크 등 주요 항구에서 독일 병력은 대기하고 있다가 제공권이 장악되는 즉시 투입할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이러한 공군의 작전은 독일 공군 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이 담당하게 되었다.


  영국은 독일에 비해 항공기의 숫자가 양적으로 한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그들이 믿었던 구석은 다이나모 작전때 독일 항공기를 효율적으로 잡아 냈던 스핏파이어 전투기의 존재와 유능한 조종사들이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레이더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국 공군은 독일의 항공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었고, 이는 레이더 망이 빈약했던 독일 공군과 가장 큰 차이였다. 게다가 영국은 독일 암호체계인 애니그마를 해독하고 있었다. 양적으로는 독일이 우세했고, 질적으로는 비슷했다면, 정보전에서는 영국이 독일을 압도했다. 그리고 독일 공군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들의 주력기인 bf109가 영국을 포격하고 돌아오기에 연료가 약간 부족한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볼 수 있듯이 bf109는 저공 비행을 하다가 급강하를 통해 적 육군에게 타격을 주고 돌아오는데 최적화 된 비행기였다. 항공 작전은 선회력이 좋은 스핏파이어에 비해 수행 능력이 많이 떨어졌다.  


그리고 1940년 7월 10일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바다사자 작전이 개시되면서 영국 본토 항공전이 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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