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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프랑스의 리더, 샤를 드 골



적색 상황 발발


  덩케르크를 독일군에게 함락하며 프랑스는 마지막 남은 북부 지대를 모두 헌납하게 된다. 영국 해협 연안의 모든 도시를 차지하며 근방의 제공권 마저 빼앗기게 되며 영-불은 서로 작전을 공유하기도 어려운 상태로 전락한다. 연합군은 황색 상황이 지속 될 동안 총 140여개 사단 중 61개의 사단이 무너지며 절반에 가까운 병력 손실을 입게된다. 프랑스의 패전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원수 베이강은 파리 근교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비를 마친 B집단군이 이제 파리를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금새 무너질것이라고 예상한 베이강의 방어 전술이 의외의 효과를 보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지켜야할 전선의 크기를 줄이면 방어하는 입장에선 더욱 효율적이다. 게다가 프랑스군의 바로 뒤에 있는 1000년 이상 프랑스의 심장 파리다. 파리 함락은 곧 국권 손실을 의미한다. 더이상 프랑스는 질 수 없었다. 


  특히 가장 큰 접전이 이루어 진 곳은 아라스에서 파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솜 주와 주도 아리엘이었다. 6월 10일까지 독일 B집단군은 양면으로 파리를 공략했으나 베이강의 방어 전술에 무릎을 꿇었다. 결국 독일은 최후의 수단인 공군 병력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독일 보병이 프랑스 주요 지역에 위치한 대공포를 제거하고 곧바로 공군 병력을 투입하는 작전이 성공하면서 베이강의 방어선도 서서히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마지노 선 요새



빛의 도시의 몰락


  프랑스는 더이상 파리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무저항 도시로 선포한다. 이 선언 날짜가  6월 10일이다. 사실상 항복이나 다름 없는 선언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베이강의 방어선도 무너진다. 결국 독일 군은 베이강의 방어선을 뚫고 거대한 병력을 파리로 진군시키는데 성공한다. 6월 13일 처칠은 프랑스에 연방 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프랑스에선 당연히 거절했다. 결국 6월 14일 독일군에 의해 파리는 무너진다. 


  파리가 함락되었다고 프랑스가 아예 전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6월 14일 부터 프랑스 군과 시민을 탈출 시키는 아리엘 작전을 시작했다. 아리엘 작전은 이제 패배한 것은 프랑스 내부적으로 인정 했으니 최대한 병력과 시민을 보존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노르망디 항구와 셰르부르 항구를 통해 병력을 최대한 보존 할 계획을 세운다.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 지역을 쑥대밭을 만든 롬멜은 또 다시 프랑스의 약점을 파고든다. 롬멜이 이끄는 기갑 사단은 센 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서부 프랑스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아리엘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는 노르망디와 셰르부르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롬멜을 6월 18일 셰르부르 항구를 점령하면서 프랑스의 희망을 꺽었다. 이 과정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던 영국군 51사단의 항복도 받아낸다. 


  그래도 아리엘 작전이 완전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두 항구와 부르타뉴 지방을 활용해 연합군 20만여명을 탈출 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자유 폴란드나 영국 혹은 샤를 드 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에 소속되면서 전쟁이 끝낳 때 까지 연합군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독일 C집단군 사령관, 에르빈 폰 비츨레벤



마지노 선 붕괴


  A,B 집단군이 파리를 함락하는 와중에 C집단군 역시 제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다. 잘 수행했다기 보단 딱히 할일이 없었다. 프랑스 마지노 선의 병력이 만에하나 독일로 넘어오게 될 상황을 대비 하기 위해 존재했는데, 이들은 마지노 선에 눌러 앉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파리를 함락하고 온 A,B 집단군의 포위를 받게 된다. 마지노 선의 후방을 지키기 위해 존재했는데, 후방에 적을 두는 상황이 된 것이다. 


  6월 15일 A집단군과 C집단군이 연합하여 마지노선을 공략했다. 독일 군은 이 작전을 호랑이 작전이라고 칭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완벽한 실패로 끝난다. 독일군 297명이 사상자를 낼 동안에 프랑스 군의 사상자는 단 2명이었다. 마지노 선의 방어력은 실로 대단했다. 마지노 선 요새 곳곳에 배치된 150mm 포는 무적이었다. 독일군이 마지노 요새가 깔려있는 남쪽 국경으로 안넘은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벨기에 방면이 아닌 남부 국경을 넘었다면, 마지노 선을 뚫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마지노 선은 프랑스 정예 병사들과 최신식 무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결국 독일 군은 또 어쩔 수 없이 공군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금방 끝날 것 같던 마지노 공략이 점차 늦어지게 되었고, 독일군은 아주 천천히 요새 하나씩 점령해 나간다. 결국 6월 17일에는 또 다시 구데리안이 프랑스-스위스 국경에 도달해 마지노선을 점령했다. 결국 6월 25일 까지 버텼던 프랑스 군은 더이상 버틸 힘을 잃고 항복하게 된다. 마지노선의 프랑스 병력은 예상보다 엄청 오랜 시간 버티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침공을 효과적으로 성공시킨 독일 군 3명의 장군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 하인츠 구데리안 그리고 에르빈 롬멜이었다. 만슈타인은 프랑스 침공에 대한 전반적인 플랜을 짯고, 이를 구데리안과 롬멜이 효율적으로 성공 시켰다. 특히나, 롬멜의 인기는 대단했다. 일개 사단장에 불과했던 롬멜은 프랑스 침공을 계기로 독일군의 영웅으로 등극한다. 나치는 그를 선전에 활용하기 위해 그가 침공에서 보인 모습들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롬멜은 앞으로 그가 독일 군 지휘관으로 보여줄 퍼포먼스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콩피에뉴 휴전 협정



프랑스의 항복


  프랑스의 신임 수상 필리프 패탱은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항복을 제의한다. 6월 22일 정전 협정이 체결된다. 그사이에 콩고물이라도 얻어볼 생각으로 이탈리아 군이 프랑스를 공격하지만 패전을 기록하며 망신만 사게 된다. 독일군 참모총장 빌헬름 카이텔은 영국에 도달해 프랑스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아낸다. 공식적으로 양 국가 간의 정전 협정이 체결되며 독일군의 일방적이었던 프랑스 공방전이 막을 내리게 된다.


  히틀러의 복수는 처절했다. 세계 1차대전 독일은 프랑스에 항복하는 굴욕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이 일을 기억하고 있던 히틀러는 당시 프랑스 항복 사절단이 탔던 열차를 그대로 타고 프랑스로 향했다. 그리고 항복 협상 역시 당시 협상을 펼쳤던 콩피에뉴로 정했고, 심지어 프랑스 항복 문서를 가져왔던 포슈 원수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정확히 앉았다. 프랑스로서는 이보다 큰 치욕이 없었다.


  독일군은 프랑스에 들어와 각종 전리품을 챙겼다. 나치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최대한 많은 물자를 챙겨야 했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프랑스의 패배의 원인이 되는 것들을 모두 조롱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군대가 이길 생각이 없었다는 점 부터 비꼬았고, 전쟁 당시 무용지물이었던 마지노 선 역시 조롱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필리프 패탱을 앞세워 나치의 괴뢰 정부인 비시 프랑스를 수립한다. 비시 프랑스가 물론 나치의 괴뢰국이긴 했지만 나치로 부터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인정 받았다. 패탱은 최대한 프랑스 인을 많이 구하기 위해 조기에 나치에 항복하고 최대한 많은 자치권과 프랑스 인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패탱은 세계 1차대전의 영웅 이었다. 그는 국민적 인기가 대단한 전쟁 영웅이었고, 위기의 프랑스를 구원하겠다는 생각으로 정계에 복귀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가 망하게된 이유는 나약한 좌파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시 정권 수립 후 보수파를 결집 시켜 프랑스를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즉, 패탱의 기본 기조는 프랑스의 힘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나치에 항복하고, 다시 프랑스르 재건 시키자는 생각이었다.



파리 개선문을 통과하는 독일 병사




자유 프랑스 수립


  하지만 모두가 필리프 패탱처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공방전에서 유일하게 사람 구실을 한 국방 차관 샤를 드 골이 그랬다. 간신히 런던으로 살아 돌아온 그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결사 항전을 호소 했다. 이들은 비시 프랑스를 나치에 동조한 반역자로 간주하고 연합군과 공조하기 위해 런던과 캐나다를 오가며 진정한 프랑스의 적통성을 있는 정부를 만드려고 했다. 연합군의 편을 많이 만들어야 할 처칠은 당연히 드 골을 지지하면서, 비시 프랑스가 아닌 자유 프랑스를 정식 국가로 인정했다.


  자유 프랑스는 프랑스 본국의 경우 나치 독일과 비시 프랑스가 양분하고 있는 상태로 이 곳에선 기반을 세우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비시 프랑스가 보유하고 있었던 식민지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 북아프리카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나치에 대항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들을 끝까지 히틀러와 싸울 것을 선언했다. 대다수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비시 프랑스를 지지하고 있어서 기반이 매우 미약했지만, 유일하게 차드 식민지 만이 자유 프랑스를 지지했다. 


  나치의 침공으로 프랑스는 나치의 괴뢰국이자 필르프 패탱이 이끄는 비시 프랑스와 런던에서 결사 항전을 주장한 샤를 드 골의 자유 프랑스로 양분되었다. 그리고 이 둘도 기존 프랑스 식민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또다른 내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공방전 이후 유럽 세력도




캐터펄트 작전


  자유 프랑스와 비시 프랑스 그리고 영국간의 갈등이 수면위로 올라온 사건이 바로 캐터펄트 작전이다. 독일 군은 전격전을 활용해 프랑스 육군과 공군을 완전히 봉쇄시켰다. 하지만 해상에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즉 프랑스 전함들은 멀쩡히 남아 있던 상황에서 전쟁이 종결되것이다. 전쟁이 좀만 더 오래 지속되었으면 이들을 활용한 전술 변화가 가능 했을 지 모르지만 너무 빠른 전쟁의 종결로 프랑스 해군은 공중에 붕 뜨게 된다.


  영국과 독일 양국이 이 전함들을 가만 둘 리 없었다. 특히나 독일과의 결전을 앞두고 있던 영국 군 입장에서는 이들의 힘이 절실히 필요했다. 독일도 어떻게든 프랑스 전함을 점령 했어야 했지만 이들은 원칙적으로 비시 프랑스 소속이었기 때문에 그리 급할 것이 없었다. 결국 먼저 움직인 건 영국이었다.


  영국 해군 제임스 서머빌 대장은 프랑스 함대에 대한 통제를 시작했다. 함선은 이끌고 가 이들에게 행복을 요구하고 연합군으로 가담하라는 협박에 가까운 권유를 했다. 대부분의 항섬들이 서버밀의 권유에 따라 순순히 항복 했지만 메르 엘 케비르의 함선을 달랐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영국을 곱게 볼 수 없는게 덩케르크 작전으로 동맹을 배신하고 자기들만 본국으로 귀환한 존재들이었다. 당시 프랑스 인들은 영국을 곱게 볼리가 없었다.


  그리고 서머빌 대장의 요구는 항복 아니면 격침이었다. 자신들에게 항복하여 영국군의 통제를 받지 않을 것이면 격침을 시킨다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사실 양국의 입장이 이해 안가는 것은 아니다. 영국군 입장에서 함선이 항복하지 않는 다는 것은 비시 프랑스의 가담을 의미하고, 비시 프랑스는 영국의 적국이다. 적국의 함선을 격침 시키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반대르 프랑스 해군 입장에서는 과연 영국을 믿을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비시 프랑스에 가담할 지 연합군에 가담할 지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군의 통제를 받으라는 것은 그냥 가진거 다 내놓으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메르 엘 케비르의 함선들은 서머빌의 요구에 반기를 들었고, 같은 연합국 소속의 프랑스와 영국간의 해전이 발생한다. 결국 서머빌이 이끄는 함선이 메르 엘 케비르의 프랑스 함선을 격침 하면서 영불간의 교전은 영국의 승리로 끝난다. 당연히 영국 내에서는 잘했다는 반응을 보였고, 비시 프랑스는 분노 했다. 히틀러는 손 안대고 코 푼 격이니 최선의 결과 였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와 영국은 완전히 틀어져 비시 프랑스는 영국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게 된다. 안되는 집은 뭘해도 안된다는 격언이 있듯이 이 시기에 연합군은 정말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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