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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리처드 1세 (사자왕)




  바르바로사의 원정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동로마 제국의 이사키우스 1세는 쉽게 그들에게 길을 내줄 생각이 없었다. 사이가 안좋았던 양국은 애초에 서로에게 이득이 될 행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화가난 바르바로사가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도시를 반환 받는 조건으로 길을 터주게 된다.

  바르바로사의 대군은 이크니온으로 향했다. 원래 신성 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은 동맹 관계였지만, 서로의 이해관계 앞에서 적으로 변했다. 바르바로사의 대군은 룸 술탄국을 공략한다. 순식간에 이크니온을 점령한 십자군은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항복을 받아내고, 통행권을 보장받게 된다. 십자군은 다음 목표인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향했다.

  그러던 와중 1190년 6월 10일, 바르바로사가 소아시아 지역의 살레프 강을 건너던 와중 급사하게 된다. 워낙 고령의 나이에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장거리 원정은 체력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호기롭게 십자군의 선봉대가 되어 예루살렘 원정에 참여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이렇다할 전투 한번 치르지 못하고 결국 국왕은 사망하고 대부분의 군대는 본국으로 복귀한다. 바르바로사의 원정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게 된다. 이제 십자군의 희망은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영국의 리처드 1세에게 달려있었다.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를 통해 해로로 접근했다. 명목상 예루살렘 국왕을 유지하고 있던 기 드 뤼지냥은 원래 티레로 향할 계획이었으나 티레의 성주 코라도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아 성 밖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십자군은 티레에 도착해서 기 드 뤼지냥의 편을 들어주며 코라도를 비난했다. 그들을 기를 앞세워 아크레로 향한다. 아크레는 이스라엘 지방 주요 항구도시로 아크레를 확보하게 된다면 지중해를 통해 많은 병력을 안전한 이동이 가능했다. 

  아크레 공략을 위해 먼저 티레에 도착한 사람은 필리프 2세였다. 그는 티레에 도착하여 기 드 뤼지냥과 코라도 모두 만나보았는데, 실상을 알고보니 기는 예루살렘을 살라딘에게 빼앗긴 무능한 왕이고 코라도는 살라딘의 공격에 맞서 오랜 시간동안 성을 지켜왔던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코라도가 향후 예루살렘 국왕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그의 손을 들어준다.

  궁지에 몰린 기는 리처드 1세에게 손을 뻗는다. 리처드 1세는 기와 동맹을 맺고 티레 성벽을 열어 같이 아크레로 향할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코라도와 필리프는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리처드는 성 밖에서 야영을 하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본 리처드는 십자군의 통합 없이는 예루살렘 원정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봤다. 결국 리처드는 내부 단속에 신경쓰게 된다. 



아크레 공성전




  리처드는 기 드 뤼지냥과 함께 키프로스를 점령한다. 소아시아 지역이 살라딘과 셀주크의 손에 있는한 육로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결국 키프로스를 통한 해상 보급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필리프와 리처드는 다시 손을 잡고 아크레를 점령했다. 이들은 다시 한번 아크레의 지휘 문제로 다퉜다. 힘겨루기에서 필리프가 밀리자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다. 갑작스런 회군에 당황하지만 리처드는 혼자 힘으로 살라딘과 대항하기로 결정하고 예루살렘 근교의 야파를 공략했다.

  리처드는 확실히 군대 통솔에 재능을 보였다. 최대한 살라딘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성을 향해 서서히 진입했다. 살라딘은 십자군을 도발하며 정면 대결을 유도했지만 리처드는 쉽게 걸려 들지 않았다. 결국 조급해진건 살라딘이었다. 당시 이슬람과 십자군의 군대가 그렇듯 많은 용병으로 이루어졌다. 결국 살라딘의 용병들은 빨리 십자군을 공격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영토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고, 살라딘은 울며 겨자먹기로 십자군을 공격한다. 9월 7일 살라딘의 군대는 아르수프에서 리처드의 군대와 맞붙는다. 리처드는 이미 살라딘이 공격할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살라딘의 군대를 완벽히 박살냈다. 십자군을 얕잡아본 이슬람 군대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제 리처드가 선택지에 놓이게 되었다. 야파에서 곧장 예루살렘으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아슈켈톤을 점령하여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넓혀 나갈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리처드는 아슈켈톤을 공략하고 싶었지만, 그의 용병들은 예루살렘 공격을 주장했다. 동시에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평화 협상을 펼쳤다. 살라딘 역시 매우 솔깃 했지만, 동생과 자신의 여동생을 혼인해야 된다는 조항 때문에 서로 결렬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리처드가 울며 겨자먹기로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1192년 1월 십자군은 아슈켈톤을 점령한다.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리처드는 아무리 십자군이 강해도 예루살렘 공략을 여전히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처드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예루살렘 공략을 차일피일 미뤘다. 결국 십자군 용병들은 예루살렘을 공략하지 않는 리처드에게 불만을 표출했다. 일부 용병들은 자국이나 키프로스로 회군했다. 심지어 필리프와 결탁하여 리처드의 영토를 공략하는 왕들까지 생겨나고 있었다. 결국 리처드는 6월 7일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이끌고 향했다. 

  이미 갈라설대로 갈라선 십자군이었다. 아무리 군사적 재능이 출중한 리처드여도 내분에 휩싸인 십자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리처드는 해안 지방만이라도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살라딘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이미 고령이된 살라딘 역시 더이상 전투를 지속하기 힘들었다. 살라딘의 군대 역시 많은 이슬람 용병으로 이뤄져있었다. 리처드는 야파로부터 이어지는 해안 도시에 대한 영유권 점령과 가톨릭 순례 행렬의 안전 보장을 얻었고, 살라딘은 아슈켈톤을 반환 받는 조건으로 협상이 이루어졌다. 평화 협상 기간은 총 3년이었다. 리처드의 영국은 지금 동생 존이 반란을 일으킨 상태여서 그는 속히 귀국해야 했다. 살라딘은 건강이 악화되어 휴식이 필요했다. 둘은 다음에 다시 만나 승부를 볼 것을 기약하고 전쟁을 끝냈다.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하지만, 둘의 재대결은 이뤄지지 않았다. 리처드 1세는 귀국하는 길에 배가 난파되어 오스트리아의 레오폴트 공작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어머니의 도움으로 훗날 풀려나는 리처드는 왕위를 빼앗은 존을 내쫒고 다시 왕위를 되찾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원정을 떠나 있는 동안 자신의 영지를 침범한 필리프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해 프랑스의 영토를 공략했다. 그는 전쟁 도중 전장을 순찰하다가 프랑스 군의 석궁에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이 해가 1199년 이었다.

  리처드의 라이벌 살라딘은 1193년 3월 4일 목숨을 잃는다. 전쟁이 종료된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죽을을 맞이한다. 그의 동생인 알 아딜이 군대를 물려 받았지만, 강력한 지도자가 없는 이슬람이 항상 그랬듯이 분열을 맞이한다. 또다른 3차 십자군의 영웅 필리프 2세는 리처드가 죽고 국가가 안정이 되자 다시 한번 십자군 원정을 꿈꾼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은채로 무리하게 원정을 준비하다 결국 그 역시 원정의 꿈을 이루지 못한채 죽음을 맞이한다.


  3차 십자군은 완벽한 성공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냥 실패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원정이었다. 우선 그들의 목표였던 예루살렘 회복에는 실패했다. 살라딘이라는 이슬람 역사상 손꼽히는 영웅이 등장하여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십자군 국가 전체를 집어삼킬만한 위세를 떨쳤다. 십자군은 100년 만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할려고 했지만 살라딘의 대군은 강력했다. 리처드가 앞장서 공략했지만, 결국 도시의 높은 성벽을 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리처드의 활약으로 서방세력은 중동 지방에서의 지휘권을 어느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의 활약이 없었으면 십자군 국가들은 모두 무너졌을 것이다. 기 드 뤼지냥을 비롯한 십자군 제후들의 목숨을 연장 시켜준 것이 바로 사자왕 리처드이다. 살라딘을 예루살렘 안에 묶어 두는데는 성공했다. 결국 십자군 때문에 소중한 시간을 허비한 살라딘은 십자군 왕국 정복에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또한 어느때보다 뛰어난 장수들이 많이 나왔다. 빌리앙 디블랭, 사자왕 리처드, 존엄왕 필리프, 그리고 이슬람 최고의 영웅 살라딘. 이들은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비록 완벽한 승리까지는 얻지 못하나 자신들이 원하는 바는 달성하는 쾌거를 이룬다. 특히나 리처드, 빌리앙, 살라딘은 자신들을 믿고 따르는 백성과 병사들의 목숨울 건졌나는 점에서 더욱 칭찬받을만 하다. 늘 그렇듯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이들이 전쟁에서 보여준 품격은 훗날과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지켜야할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 주는 중요한 역사로 기록되었다.



아르수프 전투




구 체제 붕괴의 시작이자 세계 역사의 변곡점


  3차 십자군 원정은 중세의 딱 중간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중세의 상징은 교황청이다. 3차 십자군 원정이 실패함으로 교황의 위는 크게 꺽인다. 유럽의 여러 제후들을 이끌고 간 1차 십자군의 대성공으로 2,3차 십자군에서는 각국의 국왕들이 직접 원정에 참가하게되었다. 하지만 두번의 십자군 실패는 유럽 국왕들이 교황의 말에 서서히 반발하기 시작하고, 자신들의 힘을 키우는 데 열중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전 원정으로 사이가 가까워진 바티칸 교황청과 동로마 제국은 자신들의 영토였던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아르메나아 지역에 대한 회복이 아닌 해상 경로로 이동하는 행위를 보고선, 더이상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기로 한다. 두 세력의 반목은 서로의 힘을 약하게 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훗날 이슬람 세력에게 멸망하게 되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우린 중세가 끝났다고 기록한다.


  교황청의 약화는 자연스럽게 종교적 가치의 하락을 의미한다. 더이상 가톨릭이 진리가 아님을 깨닫게 되고,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국왕들은 교황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국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열중하고, 이는 근대 시대에 펼쳐지는 절대 왕정에 기반이 된다. 그리고, 가톨릭에 대한 회의감은 많은 종교인들에게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교황이 말하는 가톨릭만이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자신들의 견해로 성경을 해석하는 행위가 서서히 들어났고, 이는 또 근대에 발생하게 되는 종교 개혁에 기반이 된다.


  또, 3차 십자군 원정의 의의 중 하나가 바로 지중해를 통한 해상 공략이었다는 점이다. 기존에는 육로를 고집하여 안티오키아를 거친 먼 경로로 십자군 원정을 떠났는데, 3차 십자군 원정의 주 루트는 이탈리아와 키프로스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향한 해상 경로였다는 점이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유럽의 각 국가들은 선박 기술을 연구하는데 몰두한다. 이전에 중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점이었다. 중세 말기 선박 기술의 발달은 훗날 유럽 국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살라딘의 무덤 (시리아 다마스커스)



종교적 사상 보존을 위한 성스러운 이념 전쟁


  3차 십자군 원정의 실패 요인 중 가장 큰 원인은 원정 군대의 이슬람 이해도가 매우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 무슬림들은 이단이자 처단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십자군 국가에서 자란 병사와 제후들은 그렇지 않았다. 무슬림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이런 인식의 차이가 결국 십자군을 하나로 뭉치는데 실패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십자군 국가에서 태어난 이들은 무슬림 세력과 동맹을 맺기도 하고, 그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며 자라왔다. 이들은 무슬림 세력과 손잡지 않았으면 애초에 중동 지역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이유에서만 인식의 차이를 가져온것만은 아니다. 유럽에서 온 원정군의 목표는 속히 전쟁을 끝내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내 가족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빨리 자신들의 목표인 예루살렘 정복을 달성하고 자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다. 하지만 십자군 국가의 병사들은 당장 눈앞의 평화가 중요했다. 예루살렘 정복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한 목표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살 집만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런 인식의 차이가 있었음에도 교황청은 예루살렘 공략에 열을 올렸다. 원정을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과 원정을 명령하는 사람간의 괴리감이 발생한 것이다. 현실은 점차 종교적인 벽을 허물고 평화와 공존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교황은 예루살렘 정복을 강요하고 있던 것이다. 시대의 변화와 다르게 종교적 가치만 내세우며 원정군을 파견한 것이 바로 3차 십자군 원정이다. 이전 십자군 원정에서는 참여자들 역시 성지 탈환이라는 목표 의식을 같이 가지고 있었기에 원정이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3차 십자군은 완벽히 시대를 역행한 원정이었다.




총평


  3차 십자군은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이 의문은 결국 인류 진보를 가져온다. 왜 우리는 교황의 명령으로 나와 내 가족, 내 부하, 내 백성들의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서서히 들어오게 된다. 물론, 이 의문으로 당장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더 나은 미래로 가는 첫걸음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했다. 가톨릭을 위해서가 아닌 국가를 위해, 국가가 아닌 공동체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닌 내 자신을 위해로 발전해 가며 결국 자유라는 사상이 전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결국 3차 십자군 원정은 향후 근대를 상징하는 국가, 공동체, 탈종교, 자유라는 가치를 얻게되는 시발점의 역할을 한 역사적인 대 사건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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