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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브 전투 초상화




이슬람의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 몰락의 시발점


VS


성지 보호 및 중동 지역 안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전쟁



  1차 십자군 전쟁은 그리스도의 완승이었다. 하지만, 유럽에서 예루살렘은 너무 멀다. 십자군 국가들은 명맥상으로 교향을 지지 했지만 얼마나 불안한 충성 관계가 지속 될지 모를 일이다. 더불어 이슬람 세력이 반격을 준비하면서 교황청은 성지를 다시한번 이슬람에 뺏길 위기감에 휩싸인다.


  어렵게 얻은 성지를 쉽게 뺏길 순 없다. 결국 교황은 유럽 제후들에게 다시한번 호소하게 된다. 불안했던 십자군 국가의 안전을 확보하고, 강대해진 이슬람 세력의 기세를 다시 한번 꺽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다. 교황의 손짓으로 다시한번 유럽이 아랍으로 움직인다.



주요 사건


1138년 4월, 시리아 샤이자르에서 요한네스가 장기에게 패배하다.

1143년, 동로마 제국의 요안니스 2세 사망

1143년, 폴크 왕 낙마 사고로 멜리장드 여왕이 예루살렘 왕국의 단독 통치자로 떠오름

1144년, 장기 왕조에 의해 에데사 백국 멸망

1145년, 장기 왕조의 지도자 이마디 앗 딘 장기 사망

1147년 10월, 십자군 리스본에 도착하여 포르투갈 내 무슬림 세력 축출

1147년, 독일의 콘라트 3세의 공격으로 동방 원정 시작

1148년, 프랑스의 루이 7세 니케아 도착

1148년 7월 23일,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의 다마스커스 공략

1149년, 2차 십자군 원정 종료 



이마드 앗 딘 장기



개요

 

  유럽 십자군에게 한번 호되게 당한 이슬람 세력은 반격을 준비한다. 1127년,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가 셀주크 왕조의 술탄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이라크 남부에 위치한 바스라 총독은 군대를 이끌고 셀주크의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를 구원한다. 술탄에 편에 서서 알무스타시드를 격파하여 바스라의 총독은 술탄의 총애를 받는다. 그는 모술의 태수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알레포 지역을 접수하며 무슬림 국가의 주권을 차지하게 된다. 이 남자의 이름은 바로 이마드 앗 딘 장기다.

  1128년 알레포의 군주에 오른 장기는 서서히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의 최대 적은 셀주크 제국을 놓고 오랜 시간 싸워 온 알무스타시드였다. 1133년 장기는 알무스타시드와 싸우기 위래 바그다드로 향한다. 하지만 알무스타시드는 그가 오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었다. 장기는 대패하고 붙잡힐 위기에 놓여있었는데 티크리트의 사령관인 아이유브라는 젊은 무장이 그의 목숨을 구해주는 덕분에 간신히 모술로 도망칠 수 있었다. 장기를 상대로 대승을 거든 칼리프 알무스타시드는 셀주크의 술탄으로 하여금 충성을 맹세하며 전성기를 이어간다.


  모술로 돌아온 장기는 칼리프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그러던 와중 1135년 다마스쿠스의 왕자 이스마일이 그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스마일은 다마스쿠스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는 수시로 십자군 왕국을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고, 백성들에게 전쟁 준비를 위한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보다못한 귀족들은 왕비에게 이스마일을 암살하고, 다른 아들은 마흐무드를 왕자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이스마일은 장기에게 손을 내밀었고, 장기가 이를 수락하며 그는 군대를 이끌고 다마스커스로 향했다. 하지만, 그 사이 이스마일이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한다.

  비록 왕자는 죽었지만 이대로 물러설 장기가 아니었다. 장기는 이 사실을 알고도 다마스쿠스에 입성을 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다마스쿠스 공략은 쉽지 않아 보였기에 휴전 협정을 맺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모술로 돌아가는 길에 몇몇 소도시를 점령했지만, 장기의 성에 찰리 없었다. 1137년 호무스의 영주 우나르와 강화 협정을 맺고 다마스쿠스를 다시 공략하려고 한다. 다마스쿠스 역시 장기의 세력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십자군 국가인 예루살렘 왕국과 트리폴리 백국에 구원을 요청한다. 십자군과 장기 왕조는 바린에서 마주친다. 이는 향후 일어날 두번째 십자군 전쟁의 전초적 역할을 한다. 결과는 장기 왕조의 승리였다. 장기는 이에 그치지 않고 더욱더 십자군을 몰아 붙이려고 했지만, 안티오키아를 공략중인 동로마제국의 황제 요한네스 2세가 남하한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의 왕 폴크와 장기 왕조는 강화 조약을 맺는다.




요한네스 2세



  첫번째 십자군을 일으킨 동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요한네스 2세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재위 초반 그는 아버지가 이룬 성공을 잘 이어나가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을 괴롭히던 룸 술탄국을 아나톨리아 지방까지 몰아내고, 시칠리아 섬을 점령해 내부적 문제를 줄였다. 서방을 안정시킨 요한네스는 동쪽으로 눈을 돌린다. 그의 목표는 현 터키 영토의 최 동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 역할을 하는 요새이자 대도시 안티오키아 정렴이었다. 

  요한네스 2세는 제국의 숙원을 풀기 위해 1137년 대규모 원정을 실시한다. 무려 4만 5천의 병력이 동쪽으로 행했다.  그는 안티오키아 공국과 우호 관계에 놓인 다니슈멘드를 점령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지도자 레오 1세는 레몽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수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안티오키아 군대는 동로마 제국군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결국 레몽 공작은 안티오키아 성문을 열고 요한네스 2세에게 항복한다. 요한네스는 지역 제후들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했고 알레포, 홈스, 샤이자르의 영토를 받아내는 조건으로 협상을 마치고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안티오키아 공국을 없애는 것보단 살려 두는 것이 이들을 후일 이슬람 세력의 완충 역할로 두는 데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요한네스는 안티오키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북시리아 지방으로 향했다. 이번 원정을 통해서 무슬림 세력을 확실히 견제하려는 의도였다. 그러자 이젠 이슬람 세력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대로 다마스커스를 공격하고 잇던 아미드 앗 딘 장기 역시 이 소식을 듣게 된다. 요한네스는 병력을 활용해 샤이자르 요새를 포위한다. 샤이자르에 있는 무슬림들은 장기가 자신들을 구원하러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포위가 된지 보름이 지나도 장기의 군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성벽은 무너지고 로마군은 샤이자르의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한다.

  샤이자르가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기 직전 장기가 드디어 구원을 온다. 당황한 요한네스는 안티오키아의 레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레몽은 이미 안티오키아를 초토화 시킨 동로마의 제국군을 도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동로마 제국을 구원해봤자 어짜피 안티오키아에서 자신을 내쫓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레몽은 요한네스의 출병 요구를 들어주는척 차일피일 미뤘고, 그 사이 요한네스는 장기의 구원병에 패배하고 만다. 결국 요안네스는 샤이자르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안티오키아로 돌아온다. 그는 자신을 돕지 않은 레몽을 내쫓아내려고 했지만 오히려 레몽 공작의 술책에 빠져 안티오키아에서 쫒겨난다.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그는 다시 안티오키아를 정복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의 숙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4년 후인 1142년 다시 동방원정군을 보냈다. 하지만,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아 황태자 알렉시오스가 사망하게 되었고, 본인도 원정 도중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이마드 앗딘 장기는 제국군이 없는 틈을 타 다시 십자군 국가를 공격했다. 그는 1144년 가장 약한십자군 국가인 에데사 백국을 공략한다. 에데사는 본래 안티오키아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과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동로마제국은 황제가 죽어 정신없었고, 예루살렘 왕국은 폴크 왕이 낙마사고로 죽어 멜리자드 여왕이 즉위하는 혼란기였다. 에데사는 결국 셀주크 영주 아스란에게 연합을 요청한다. 하지만 연합군 역시 장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기는 에데사를 포위하고 에데사 백국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하지만, 에데사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에데사 시민들까지 참여해 장기의 군대를 막았다. 장기는 에데사의 방어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북쪽 성벽에 목재를 쌓고 기름을 뿌려 성벽을 불질러 버렸다. 성벽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장기의 군대가 에데사로 들이닥쳤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그랬듯 장기의 군대 역시 오랜시간 포위로 인해 광기에 휩싸인채 에데사 백국의 백성을 학살했다. 장기의 오랜 학살 끝에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 이때 너무 사람을 많이 죽인 탓일까 장기 역시 오랜 기간 버티지 못하고 이듬해 사망하게 된다.



1135년 십자군 국가 위치



  에데사 백국과 동맹관계였던 예루살렘 왕국은 초비상상태였다. 멜리장드 여왕은 곧바로 교황에게 요청했다. 40여년 전 수많은 목숨을 잃어가며 간신히 수복한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에 손이 넘어갈 위험에 처한다. 교환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채무 변제를 조건으로 내걸며 예루살렘 원정에 참여할 것을 요청한다. 교황은 프랑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에게 요청해 유럽 제후들은 십자군 원정에 참여시키라고 명령을 내린다. 프랑스의 루이 7세를 필두로 독일의 콘라트 3세가 참가 서약을 맺었다. 이슬람 교도들의 유입으로 골머리를 썩히던 스페인 역시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게 된다. 

  반면 동로마 제국의 마누일 콤니노스는 십자군 원정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았다. 십자군이 결성되지 직전 마누일은 룸 술탄국과 평화 조약을 간신히 맺었는데, 십자군의 침입은 이들의 관계를 끊어버리기에 충분했다. 마누일은 십자군이 오기전 대비를 하기 위해 투르크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서유럽 세력들은 그리스도 마누일이 무슬림과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맹비난을 했다.


  1147년 5월 19일 십자군의 첫 원정은 무슬림의 공격을 받고 있는 포르투갈의 황제 알폰소 1세를 구원하는 것이다. 알폰소 1세는 전쟁에서 승리 하면여 리스본을 점령하면 약탈할 권리는 주기로 했다. 3개월간의 공방전을 통해 십자군은 리스본을 점령했다. 십자군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리스본에서 채우고 다시 동쪽으로 항해를 이어갔다.

  1차 십자군 당시 동로마 제국 황제의 위상에 비하면 지금 황제의 위상은 많이 떨어졌다. 1차 십자군 당시 유럽의 제후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지 전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사정은 달랐다. 독일의 콘라트 3세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자마자 약탈을 시작했다. 황제는 당연히 콘라트 3세의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신성로마제국과의 관계가 있었기에 쉽게 이들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마누엘 1세는 최대한 빠르게 원정군을 파견해 안티오키아로 이동시켜 약탈을 중단 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1차 십자군때와 달랐던 것이 무슬림들의 십자군에 대한 인식이다. 1차 십자군 당시 이들을 얕잡아보다 크게 당한 전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반세기동안 무슬림들은 십자군 국가들을 수복하기 위해 힘을 비축했다. 콘라트 3세는 호기롭게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도릴라이움을 공격했으나 투르크 군대에게 대패하고 단 2천명만 남기고 니케아로 돌아왔다. 결국 콘라트 3세는 루이 7세의 프랑스 군대가 올때까지 대기하기로 했다.


  니케아에 도착한 루이 7세는 그의 군대가 괴멸 직전 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그는 무리하게 아나톨리아 지방을 공격하는 대신 남쪽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택하였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투르크 군대는 지속적으로 루이 7세를 괴롭혔다. 문제는 그들이 공격받은 위치가 동로마 제국 영토 내 였다. 십자군들은 아직 안티오키아에 도달하기에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투르크의 공격을 받는 것을 보고 동로마 제국이 투르크와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한다고 의심하게 된다. 이런 내부적인 의심과 투르크의 저항을 이겨내고  루이 7세의 군대는 우여곡절 끝에 아달리아에 도착했다.     



루이 7세



  그 사이 십자군을 괴롭힌 이마드 앗 딘 장기가 죽게 되었다. 에데사 백국의 군주인 조슬랭 2세는 이전에 뺴앗긴 에데사를 수복하기 위해 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루이 7세는 요청을 수락하고 조슬랭 2세가 있는 예루살렘에 합류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안티오키아의 군주 레몽과 마주하게 되는데, 둘은 서로를 매우 싫어했다. 루이 7세의 부인인 엘레오노르는 레몽 공작의 조카였다. 레몽은 엘레오노르로 하여금 루이 7세가 예루살렘이 아닌 알레포를 공격하도록 만들게 지시했다. 루이 7세는 자신의 왕비를 연금을 시키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독일의 콘라트 3세, 프랑스의 루이 7세, 예루살렘 왕국의 멜리장드 여왕이 뭉친 대군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이들의 원래 목표인 에데사를 탈환했어야 한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이들이 공격한 곳은 예루살렘 왕국에 우호적인 다마스커스였다. 애초에 십자군들은 무슬림 국가인 다마스커스를 동맹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148년 7월 24일, 3국 연합이 다마스커스로 향했다. 

  다마스커스의 영주 우나르는 성 주위에 있던 모든 우물을 메우고,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에 우나르는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을 이간질 하려는 목적으로 다마스커스 공략이 성공하게 된다면 가톨릭 세력은 십자군 국가를 없애고 직접 예루살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거짓 문서를 전달했다. 십자군과 예루살렘 왕국의 반목, 누르 앗 딘의 구원, 장거리 원정으로 인한 식량 문제가 겹치면서 원정군은 겨우 4일만에 다마스커스 원정을 취소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이후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과 사이가 좋지 못해 더이상 이 곳에 머물러 있을 명분이 없었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제 2차 십자군은 결과적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수명을 연장시켰다는 성과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2차 십자군 원정은 가톨릭 세력에게 너무 뼈아픈 결과로 다가오게 된다. 물론, 표면적인 모습만 보자면은 멸망 직전의 십자군 3개국의 수명을 잠시나마 연장 시켜놓기는 했다. 하지만, 큰 그림으로 보자면 정말 얻은게 아무것도 없는 졸전이었다.

  우선 십자군의 우방이었던 다마스커스를 적으로 돌린게 가장 큰 실패였다. 본래 다마스커스는 장기 왕조가 사이가 좋지 못했고 이에 대항할 수단으로 예루살렘 왕국을 우방으로 삼았다. 하지만 2차 십자군이 다마스커스를 공략하면서 이 동맹이 깨지게 된다. 유럽의 십자군들이 얼마나 이슬람 세력에 대해 이해도가 낮은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마스커스와 투르크가 2차 십자군을 견제하느라 힘을 뺀 사이 장기의 아들 누르 앗 딘을 중심으로 한 시리아 지역 통일이 가속화되었다. 이는 훗날 이슬람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는 아이유브 왕조의 시초가 된다.

  또 하나 서유럽 세력의 동로마 제국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졌다. 바티칸 교황의 세력권 안에 있는 서유럽 국가들은 해당 세력권에 없으면서 자신들이 위급할때 마다 바티칸 교황을 찾고, 결국 자신들의 백성이 동로마 제국을 구하다 죽어나가야 하는 사실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대 원정을 떠난 루이 7세야 말로 동로마 제국에 대한 반감이 더욱 더 컸다. 교황은 유럽 그리스도의 부흥을 위해 십자군을 결성했지만, 결과적으론 그리스도 세력 내의 분열만 초래한 최악의 결과를 보여줬다. 이렇게 두번째 십자군 원정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대 실패였다. 이보다 더 참혹한 결과는 내기는 어려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수십년 뒤의 유럽 십자군들은 이 어려워 보이는 일을 해낸다.


 

예루살렘 왕국 폴크 왕


이슬람의 부활 그리고 그리스도 몰락의 시발점


  사실 따지고 보면 2차 십자군 전쟁의 실패가 그리스도와 교황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지는 않았다. 1차적 목표인 예루살렘 왕국 지키기는 성공했다. 하지만, 2차 십자군은 앞으로 벌어질 이슬람의 대 번영과 교황 권위 추락의 시발점이 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이 원정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교황의 영역은 말그래도 신성불가침한 영역이었다. 이번 원정에 서유럽 국가의 국왕인 루이 7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참여했다는 점만 보더라도 교황의 권력이 얼마나 막강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지난번 원정의 성공을 보고 참여 했을 것이 분명하다.

  기대감이 크면 실망이 큰 법. 파리에서 다마스커스까지 수천키로미터를 거쳐 도달했건만 그에게 돌아오는 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유럽 제후들 사이에서도 교황의 말이 무조건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교황에게 억눌려 있던 왕권이 서서히 강해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세상의 진리라는 유럽의 통념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교황에게 다마스커스 원정 실패보다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2차 십자군 원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이마드 앗 딘 장기이다. 사실상 2차 십자군 원정의 시작도 장기의 세력이 점점 커져 이를 막기 위해 출전한 것이라고 봐도 된다. 십자군 4개국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을 무너뜨린 것은 장기에게 있어 엄청난 수확이었다. 셀주크는 서서히 힘을 잃어 갔고, 아나톨리아 지방의 룸 술탄국과 장기 왕조가 이슬람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들은 2차 원정 방어 성공으로 가톨릭이 가지고 있었던 전쟁의 주도권을 이슬람으로 가져올 수 있었다.

  사실 이는 어느정도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십자군 원정의 영웅이었던 고드프루아와 보두앵 등이 죽자 십자군 국가는 지속적으로 이슬람 세력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동로마 제국도 십자군 국가를 지키기 위해 계속 동방으로 군대를 파견했지만, 제국은 서쪽 방면도 신경을 썻어야 했다. 그 사이 이슬람 세력은 제국의 견제 없이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었고, 장기와 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더욱 더 박차를 가한 것이다.


  이 처럼 양 세력의 다른 행보는 향후 중세 말기로 갈 수록 더 격차가 벌어진다. 이슬람은 전쟁의 효율성을 위해 노력한 반면 가톨릭 세력은 신성이라는 허울에 빠져있었다. 로마 제국과 유스티니아노스 대제 시절의 영광에 빠져 여전히 이슬람 세력을 얕보고 있던 것이다. 교황청은 그 와중에 사제가 늘어나 돈은 많고, 유럽 제후들은 자신들의 눈치만 보고 있으니 교황청이 얼마나 큰 자만심에 빠졌을 지 짐작이 간다. 교황은 성지 회복이라는 프레임을 이용해 잉여 자금을 사용하면서 세력확장을 진행했다. 그렇게 무의미한 전쟁에 수많은 유럽인들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교황 중심의 정치가 얼마나 비효율적인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2차 십자군 원정이다.



2차 십자군 원정로




성지 보호 및 중동 지역 안전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전쟁


  가톨릭 입장에서는 2차 십자군 원정은 불가피한 결정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에데사 백국의 별망으로 인해 생긴 안보 위협 증대였다. 정말 예루살렘 왕국은 십자군의 구원이 없었더라면 장기 왕조에 의해 사라졌을것이 불보듯 뻔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도 원치 않았던 이 전쟁을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십자군 국가들은 반세기에 걸쳐 중동 지역에 꽤나 정착에 성공했다. 이들은 다마스쿠스 왕국처럼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세력이라면 무슬림 일지라도 서로 손을 잡았다. 가톨릭 신자들 입장에선 무슬림과 손을 잡는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화해의 제스쳐가 없었다면 십자국 국가들은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놓은 십자군 국가를 바티칸 정교회에서 저버린다면 십자군 국가는 교황을 배신하고 오히려 군대를 이끌고 동로마제국을 공격할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미 동로마와 십자군 국가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오래된 일이다. 알렉시오스와 요한네스 재임 시절에도 직접적인 전쟁은 없었지만 양 세력간의 힘겨루기는 지속적으로 존재했다. 정교회가 자신들을 저버린다면 이들은 더이상 교황을 위해 일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십자군 국가 하나하나의 힘은 작았지만 뭉치면 충분히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교황은 정치적으로 이번 원정의 중요함을 잘 알았던 것이다.



총평


  제2차 십자군 전쟁은 십자군 원정중에서도 손꼽히게 인기가 없는 원정이다. 1차 원정에서 고르드푸아와 보에몽과 같이 색이 강렬한 캐릭터가 없다. 장기와 요한네스, 폴크라도 살아있었으면 모를까 이 인물 모두 원정 직전에 죽음을 맞이해 뭔가 김빠진 전투가 이어진다. 그리고 1차 원정의 예루살렘 공방전처럼 극적인 요소도 없다. 그리고 원정군은 정복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전히 가톨릭 신자가 많은 에데사가 아닌 성공확률이 극히 낮은 우방국 다마스커스를 공략하는 실책을 하면서 조기에 원정이 종료된 것도 한 몫했다.

  하지만, 2차 원정은 신성 불가침인 교황의 권위에 금이 간 시발점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카노사의 굴욕과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정점을 찍은 교황의 최전성기의 종점을 의미한다. 이후 스토리를 약간 스포하자면 거듭된 십자군 원정 실패로 유럽 제후들은 볼멘소리를 하게 된다. 그리고 농업 기술의 발달로 국고가 넘쳐나 왕의 재정상태가 나아지며 왕권이 교황권을 앞지르게 된다. 2차 원정은 왕권이 절대 왕권으로 변모하게 되면 시작점이라고 봐도 된다. 비록 사건 자체는 다른 원정에 비해 흥미도가 떨어지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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