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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제문 원문




사림 견제를 위한 연산군과 훈구 세력의 지나친 학살 


VS


왕과 국가를 부정한 사림들에 대한 정당한 처벌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 그리고 세조를 도와 조선 권력에 중심으로 오르는 세력을 바로 훈구파라고한다. 세조와 훈구파는 기존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을 수호하며 신권 중심의 조선 흐름을 바꿔놓고 있었다. 그리고 이 권력을 바탕으로 훈구파들은 조선 권력의 중심의 권력을 대물림 하기 위한 기반을 만들기 위해 타 세력의 도전을 저지 했다.


  누군가 권력을 잡으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대 세력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해 비난하는 세력들이 재야에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과거 조선 건국시 이를 부정하고 재야로 내려간 온건 사대부의 후예들이었다. 훈구파 세력이 성리학을 전혀 수호하지 못하고, 조선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강력히 비난하게 된다. 더군다나 성종이 즉위 함에 따라 권신들이 똘똘 뭉치는 걸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들은 조정으로 불러들인다. 이 세력의 이름이 바로 사림이다.




무오 사화 관련 주요 사건


1453년 (세조 원년): 수양대군, 단종을 몰아내고 조선 7대 왕으로 등극

1469년 (성종 원년): 조선 9대 황제 성종 왕위 등극

1486년 (성종 17년):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과거 급제하여 신하로 입문

1492년 (성종 23년): '조의제문' 작성자, 김종직 사망

1494년 (연산군 원년): 세종의 아들 연산군이 조선 10대 왕으로 등극

1498년 (연산군 4년) 7월: 유자광과 이극돈 등에 의해 김일손 등 사림파 대거 숙청




세조 어진





사건의 경과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여 왕위에 오른 세조 였지만, 그의 치세는 나쁘지 않았다. 물론, 기존의 이성계와 정도전이 세운 조선 철학에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신권과 왕권의 조화를 꿈꾼 정도전의 사상을 짓밟으면서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만드는 데 힘썻다. 6조 직계제를 시작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대거 만들었다. 그리고 찬탈을 통해 왕위에 오른 만큼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도 필수적이었다. 공신의 대표격인 신숙주와 한명회는 중심으로 권람이나 구치관, 정창손 같은 주요 중신들에게 요직을 나눠주었다. 세조의 지지로 인해 공신들의 세력을 더욱 커져갔고, 그 후 왕위에 오른 성종은 공신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다. (물론, 예종이 있긴 하지만 치세가 짧아 다루지 않았다.)

  조선의 대표적인 성군 중 한명이었던 성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림파를 대거 등용했다. 훈구파가 똘똘 뭉쳐있던 카르텔을 최대한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사림은 앞서 설명한대로 재야에서 성리학을 배우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에 대해 굉장히 자긍심을 느끼며 이외의 학문들을 저급하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반대로 세조의 공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은 성리학 이회의 잡학들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일례로 세조때에 신하가 된 사림파 김종직은 세조에게 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에 관심을 갖는 훈구파를 비난하다 세조에게 큰 미움을 산 적이있다. 결국 김종직은 다시 재야로 내려가게 되고 지방 사대부 양성에 힘을 쓴다.

  이런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의 경제 기반에 대한 약화때문이다. 훈구파 세력은 은퇴 후에 지방으로 내려와 유향소를 설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유향소는 조정의 힘을 앞세워 많은 부를 축적한다. 지방에선 사림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구축해 부를 축적했는데, 훈구파가 점차 지방으로 내려오며 자신들의 기반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른다. 지방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반이 약해지는 것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사림 세력은 이전부터 세조와 훈구파가 좋게 보일리 없었다. 이들은 훈구파가 백성들의 곡물을 빨아먹는 부패 세력이라고 비난함과 동시에, 훈구의 거대 세력을 깨뜨리려는 목적으로 사림을 조정으로 불러들여 이 두세력의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된다.


  사림은 주로 삼사에 등용 되었다. 삼사는 조선시대에 관리의 감찰과 간언을 담당하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이르는 말이다. 이러한 삼사의 관리들은 최우선 조건은 청렴함이었으므로, 청요직이라고 불렸다. 삼사 출신들은 고위직은 아니었지만, 국왕 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조직이었기에 요직이었음은 분명했다. 벼슬의 품계는 높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오른 신하들은 과거 성적이 훌륭하고 덕망이 높은 사람들만 오를 수 있었다. 훈구파를 비난하기 위해 조정에 등장한 사림들은 삼사의 요직을 차지하자 마치 물만난 고기처럼 성종과 훈구를 비난했다. 이들은 국가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한 비판을 하지 않고, 맹목적인 이유로 훈구파 세력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그래도 성종은 양 세력간의 줄다리기가 한쪽으로 기울면 약한쪽의 편을 드는 방식으로 이 난관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정유재란 공신, 신숙주




  문제는 그의 아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시작된다. 연산군은 성종의 적장자였다. 조선의 역사를 보면 알겠지만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적이 그리 많지 않다. 연산군 이전의 9명의 왕중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것은 문종과 단종에 불과하다. 단종 조차 너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라 실제로 아무런 힘이 없었다. 정상적인 코스로 적장자가 왕위 된것은 연산군 이전엔 문종이 유일하다. 그러던 와중 적장자 연산군의 등장은 왕권과 신권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연산군은 태어날 때 부터 자신이 곧 왕이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연산군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힘이 클 수 밖에 없는 배경을 타고난 셈이다.

  문제는 사림파들이 눈치 없이 비난의 수위를 높여갔다는데 있다. 가뜩이나 왕세자 시절부터 아버지가 시달리는거 고깝게 보고 있던 연산군이었는데, 사림은 성종과 같이 자기들 의견 잘 들어줄 줄 알고, 혹은 새로운 왕이 오니까 자신들이 유리한 위치 잡을려고 발악을 쓰며 왕의 행보에 비난을 해댄다. 심지어 연산군 초기의 사림파들은 다리가 셋 달린 닭이 태어난 이유가 왕이 덕이 모자라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간언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냥 뭐만 하면 왕 잘못이라고 비난하는 수준이었다. 사림이 연산군 초기에 이런 상소를 올린거 보면 연산군이 몇년 뒤 왜 그렇게 미쳤는지 조금은 이해되는 수준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연산군과 너무나도 다르게 초기의 연산군은 이런 사림의 어리광을 잘 받아줬다. 물론, 성종에 비해선 강경하게 나갔지만, 아직까진 대거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를 시작하지는 않은 시기였다.


  그러던 와중 본격적으로 사림과 연산군의 사이가 틀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새로운 왕이 등극하게 되면 선왕에 대한 실록을 작성하는 것이 당연했다. 연산군 역시 좌의정 이극돈 등과 같은 관리들에게 성종 실록을 편찬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극돈은 사관들과 함께 성종실력을 편찬하는데 사관 중에 사림파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 역시 포함된다. 하지만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들은 너무 조잡하고 터무니 없는 내용이 많아 성종실록에 채택되지 못하고 묻히게 된다. 사초란 역사 편찬을 위한 자료가 되는 기록으로 객관성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김일손의 사초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부정확한 내용들이 많아 자연스레 실록에서 삭제된다.

  그러다 실록이 마무리 단계가 되던 1498년, 성종실록 편찬의 총 책임자 이극돈에게 김일손의 사초가 전달된다. 이극돈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그 내용은 대부분 성종과 과거 세조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이 담긴 내용이었다. 조선의 기준으로 보았을때 왕권에 대해 부정하는 내용들이 대거 담겼다. 김일손은 왕실을 부정하고, 국가에 계유정난 공신들은 비난 했으며, 단종을 지킨 사람 사람들을 추종하는 글을 쓴것이다. 개인의 생각이야 그렇다 쳐도 객관성이 중요한 사초로서 절대 어울리지 않은 글들이었다. 세조를 부정하고 왕실을 격하시키는 논조를 사초에 담았다. 심지어 사가에 떠도는 헛소문들까지 사초로 작성했다.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그의 시체를 들짐승이 먹게 했다던가, 성종의 아버지의 후궁을 세조가 찝적댔다는 사실관게가 불분명하고 저급한 글을 사초에 담았다.

  이극돈은 이를 곧바로 연산군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 내용이 너무 불경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까지 피해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평소 친한 대신이었던 유자광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유자광은 만약 이 내용을 숨기면 그 피해가 본인(이극돈)에게 올 것이라고 조언하며 곧장 연산군에게 알리라고 조언했다. 결국 이극돈은 자신이 살려는 목적으로 이를 연산군에게 알리게되었다. 연산군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대노하며 지방에 있던 그를 조정에 불렀다. 연산군은 그를 국문하며 그가 사초로 작성한 거짓 소문의 근원지와 문제 사초의 근거를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일손은 하나 둘 씩 실토하며 사초 관련자와 소문의 근거를 연산군에게 대답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와중 국가의 정통성을 뒤흔들 엄청난 사료 하나가 나온다.



김종직




  '조의제문'은 본래 의제를 조문한다는 의미다. 여기서 의제는 초한지에서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왕 의제를 의미한다. 즉, 이 말은 항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의제를 기르는 내용으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은유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 글은 김일손의 스승이자 성종시대에 조정의 관리였던 김종직이 작성한 글이다. 당시 김종직은 이 글을 공식적으로 편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몰래 기록한 글이었다. 그러던 와중 그의 제자 김일손을 국문하게 되자 수면위로 등장한 것이다. 이극돈은 이 글을 보자마자 통곡했다고 한다. 해당 내용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을 때 그 충격이 상당함과 동시에 훈구와 세종에 대해 완전히 부정하는 내용이었기에 자칫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이극돈 주변에는 사림의 맹목적인 비난에 질린 훈구파들이 많았다. 훈구파들의 끊임없는 설득 끝에 결국 이극돈은 조의제문은 연산군에게 올리게된다. 문제는 연산군 역시 이 조의제문의 존재를 소문으로 미리 알게 되었고, 이극돈이 늦게 자신에게 보여준 것이 화가 단단히 난 상태였다. 이 사건만 없었더라도 이극돈은 자연스럽게 차기 영의정 자리에 올랐을 것이 당대의 평가다. 이 글은 김종직이 화를 피하기 위해서 매우 은유적으로 작성했기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하고 다소 어려웠다. 하지만,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친히 해석해 연산군에게 보여주었다. 연산군은 이 글을 보고 극 대노를 했고, 결국 조정에 피바람이 불게 된다. 


  연산군은 김일손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곤장 및 유배형을 보냈다. 또한 조의제문과 관련된 사초들이 계속 공개되면서 비슷한 논조를 지녔던 사림 사관들은 모두 화를 입었다. 이 와중에는 정말 객관적인 시선으로 사초를 쓴 사람들 마저 화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글을 작성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했다. 

  연산군은 형을 집행하는 과정을 모든 신하들에게 공개했다. 사림파에게 시달리던 연산군에게 이보다 좋은 본보기를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특히 유자광은 연산군 옆에서 사림파를 완전히 뿌리 뽑을 것을 간언했다. 그나마 같은 훈구파였던 노사신 등이 사림이 관련 인물들을 충분히 처벌했으니 이제 그만하자며 유자광을 말렸다. 노사신은 이 사건이 너무 커져 김일손과 관련이 없는 자들까지 처벌을 받을 뿐더러, 조정에 일할 사람이 없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무오사화를 끝낼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이 너무 커져 사림파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심지어 김일손 사건을 조사하는 역할을 맡은 어세겸, 이극돈 등 역시 수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파직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사건의 중심인 김일손은 곧바로 사형을 당했고, 주변 사림파였던 이종준, 최부, 김굉필등 은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이유로 귀양을 떠났다.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은 이 사건으로 연산군의 최측근이 된다.


  무오사화로 인해 많은 사림파가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 6년 뒤인 1504년 (연산군 10년)에 또 한번의 사화가 일어나지만 갑자사화의 경우 사림파 뿐만 아니라 훈구파 역시 피해를 입는다. 무오사화는 연산군대에 일어난 두 사화 중 하나로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연산군의 철혈정치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연산군은 신하들의 의견도 잘 듣고 경연도 자주 펼치는 정상적인 왕이었다. 하지만 무오사화를 기점으로 힘을 얻은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폭군으로 변모해 조선을 병들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성종실록



사림 견제를 위한 연산군과 훈구 세력의 지나친 학살


  일단 김일손의 경우 분명히 죄를 지었다. 현대적 기준으로 보면 언론에서 지도자를 우습게 그린것 뿐인데 그게 뭔 큰 죄냐 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건에 오늘날에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분명 잘못된 생각이다. 유교 국가에서 녹봉을 먹는 신하가 왕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비난을 하고 그것을 국가에서 편찬하는 역사서에 편찬하려는 시도는 반역행위임은 틀림었다. 문제는 이 사안이 이렇게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길 만큼의 사화로 기록이 될 정도의 중범죄인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오사화의 경우 연산군과 훈구의 보복성 학살이다. 왕을 모욕한 사초를 쓴 김일손만 잡아서 처형하면 끝날 일을 무분별하게 키워 사림에 대한 보복으로 사건을 변모했다. 연산군이 사림들을 숙청하도록 옆에서 꼬득인 인물은 유자광이다. 그리고 이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모욕을 당한바가 있었다. 김종직은 과거에 유자광이 쓴 현판을 보고 그가 서얼출신이라는 것을 들먹이며 상놈이라고 비판했다. 이 떄부터 유자광은 자신을 모욕한 김종직과 그 제자들에게 복수의 시간을 꿈꿔왔다. 그리고 유자광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자 연산군에게 관련 인물들 전부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사림에 대한 원한관계가 있던 유자광이 의도적으로 사건을 키운 측면도 존재한다.


  그리고 연산군 역시 평소에 사림과 김종직을 좋게 보지 않았다. 김종직은 특이하게 사림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세조대에 관직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림 세력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는 스탠스를 취해 재야에 머무른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보를 보인셈이다. 김종직은 세조에 대해 맹비난을 함과 동시에 성종은 성군으로 찬양했다. 김종직은 세조가 성리학에만 몰두하지 말고 잡학도 익히라는 말에 선비는 본래 잡학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다가 미움을 사 유배를 가게되었다. 그러나 이후 성종이 다시 그에게 손을 내밀어 관직을 했다.

  그런데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평소에 김종직에 끌려다니는 행동은 고깝게 보고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종직은 다른 사림들과 비슷하게 삼사에 눌러앉아 왕에게 도를 넘는 비판을 했다. 이런 모습을 본 연산군은 애초에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을 좋게 보지 않고 있었다. 그사이 김종직은 조정을 떠나고 자신은 왕위에 올랐다. 근데 그의 제자들이 여전히 왕에 대한 비난을 이어갔고, 명분을 찾던 차에 조의제문이 걸리게 되고 곧바로 사림들에 대한 대 숙청을 실시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조의제문이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쓴 글이다. 김일손의 사초는 본인 한명의 처벌로 끝날 문제다. 하지만, 조의제문이 터지는 순간 사림의 영수 역할을 하던 김종직의 죄목이 성립되는 것이고, 그의 문하에 있던 많은 사림까지 한묶음으로 처벌할 좋은 증거를 찾게 된 셈이다. 연산군이 무오사화 과정에서 조의제문을 앞세워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킨것만 보아도 이 사건이 굉장히 사림에 대한 의도적인 학살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이극돈 묘




왕과 국가를 부정한 사림들에 대한 정당한 처벌


  세계 어디에도 왕과 국가를 부정한 신하를 가만히 두는 사람은 없다. 이를 용서하는 왕이 있다면 마음씨가 넓은게 아니라 호구다. 아무리 훗날 연산군이 미치광이 폭군으로 기록된 왕일지라도 김일손의 사초 문제는 연산군 입장에선 지극히 정당한 처벌이다.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성종 실록에 편찬하려고 했던 시도는 명백히 국가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글을 작성한 김종직 그리고 그의 제자들을 반드시 조정에서 내쫓아야 하는 것은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지당한 행위다.

  세조가 단종을 찬탈한 행위는 비난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비난의 글을 국가에서 편찬하는 역사서에 담을려고 했다는 게 문제다. 공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역사서에 확인되지 않은 야사를 담을려고 하고, 국가를 부정하는 글을 작성하는 것은 현대의 기준으로 봐도 징역 20년 이상의 중형이고, 조선의 기준으로 보면 당연히 사형이다. 현대 관점으로 보자면 중학생이 배우는 교과서에 확인되지 않은 야사를 사실인냥 넣는 행위와 동일한 관점을 생각하면 된다. 더군다나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성리학 국가에서 이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게다가 사람은 본래 연산군과 훈구에 대한 도를 넘는 비판을 해왔다. 그 정도가 국정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지경이 이를 정도였다. 사림세력은 훈구 세력들이 능력 없이 왕의 최측근이며 계유정난 공신이라는 이유로 조정의 신하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사림세력이야 말로 성종의 훈구 견제를 위한 의도적인 밀어주기로 능력 없이 삼사 요직에 앉은 낙하산들이었다. 사림을 실제로 국가를 위해서는 단 하나의 생산적인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국가 운영이 필수적인 잡학을 배우는 훈구파를 비난한 셈이다.

  이런 사실을 꿰뚤어보고 있던 연산군은 사림파를 조정에서 크게 내쫓을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국가 운영 경험이 전무하고 무능한 사림들 때문에 국가 운영이 이뤄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만약 어정쩡한 근거를 들어 사림을 내쫓게 되면 삼사의 신하들이 또 난리를 치면서 국왕을 비난할 것이 뻔했다. 연산군은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때 마침 나온 것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인 셈이다. 이떄까지만 하더라도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하고 있던 연산군 입장에서는 대의적인 목표를 위해 불가피한 희생을 치룬것이다.



총평


  김일손에 대한 처벌은 지당하다. 이는 훈구-사림간의 세력 다툼 문제가 아니라 국왕으로서 당연한 일은 한것이다. 결국 무오사화의 포인트는 훈구 세력이 도가 지나친 사림 학살이냐, 반대로 연산군의 국정운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냐 이 두가지 문제로 나뉜다. 사실 무오사화와 비슷한 형태의 사건은 현대 정부와 국회에서도 자주 나온다. 우리나라로 예를 들자면 정부와 여당이 야당을 찍어 누를 때 이와 같은 수법을 사용한다. 여기에 야당 측에서 북한과 관련된 사항이라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면 더할나위 없다. 그런점으로 볼때 무오사화와 같은 조선 붕당 정치를 볼때 마다 현대와 참 다르지 않다는 걸 자주 느낀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전략적인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념과 정의만 앞세워서는 절대 안된다. 그래서 과거부터 지금까지 정치판에서 권모술수가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정치판이 그렇기에 참 더럽고, 또 더러우니까 정치판이다. 무오사화는 정치판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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