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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의 힘을 끌어들여 성공한 반쪽짜리 통일을 만든 왕


VS


외교술로 절체절명의 신라를 구하고 삼국을 정복한 명군



  이번엔 삼국시대 인물 한명을 다뤄보도록 하자. 한반도의 역사를 보면 몇번 시대적 흐름이 크게 바뀐 적이 있는데 오늘 알아볼 인물 역시 이 흐름을 바꾸는데 크게 일조한 인물 중 한명이다. 심지어 우리나라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통일 군주이다. 어찌보면 한반도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라면 국민으로 부터 영웅적인 찬사를 받고 으레 지폐 모델이 되어야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람의 평가를 보면 극과 극으로 나뉜다. 누구는 앞서 말했듯이 한번도 역사에 위대한 역사를 세운 왕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대한민역 역사에 가장 안좋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말한다. 한반도 고대 시대의 인물이 이렇게 입체적으로 평가되는 케이스는 김춘추가 거의 유일할 것이다. 왜 그가 이런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자



주요 활동


602년 (진평왕 24년),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과 천명 부인 사이에서 출생

시점 불명확, 금관 가야 왕족 출신 김춘추의 누이 문희와 혼인

642년 (선덕여왕 11년), 백제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

시점 불명확, 선덕여왕의 명에 따라 고구려의 실권자 연개소문과 동맹을 위해 고구려에 사신으로 방문

647년 (선덕여왕 16년), 왜와 화친을 위해 왜에 방문

648년 (진덕여왕 2년), 아들 문왕과 당나라로 입조해 당태종과 동맹 체결, 나당 연합 결성

650년 (진덕여왕 4년),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 연호 영휘 도입

654년 (진덕여왕 8년), 진덕여왕이 승하하고 김춘추가 신라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

655년 (무열왕 2년), 아들 법민을 태자로 지목

655년 (무열왕 2년), 당에 사신을 보내에서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로 출격, 본격적으로 삼국간 전쟁 발발

659년 (무열왕 6년), 아들 김인문을 당에 보내어 나당 연합군의 백제 침공 시작

660년 (무열왕 7년), 상대등 김유신으로 하여금 백제 정복 지시

660년 (무열왕 7년), 황산벌 전투 승리로 백제 함락, 웅진도독부 설립

661년 (무열왕 8년), 갑작스러운 죽음, 아들 법민이 새로 신라 국왕으로 등극



경주에 위치한 무열왕릉




생애 및 업적


  김춘추 출생 시점의 신라 상태는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퇴의 길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전전임 왕이자 김춘추의 증조 할아버지인 진흥왕에 최고 점을 찍은 신라는 엄청난 대 영토를 만들었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신라는 영토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신라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입을 막고 다시 남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고, 백제는 왜와 동맹을 맺어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춘추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폐위를 당하게 된다. 폐위의 이유는 명확히 알 수 가 없으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진지왕은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신하들의 만장일치로 국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서는 미실 등 반대파에 의해 모함을 받아 왕위를 내려놓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많이 떨어지는 이야기이므로 곧이 곧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어찌 되었는 진지왕은 왕에서 물러나 평민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진지왕의 장남이었던 김용춘과 천명부인 사이에서 김춘추가 태어나게 되었다. 폐위된 왕의 아들 사이에서 태어난 김춘추는 성골이 아닌 진골이었다. 즉, 그는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진골 김춘추는 왕이 될 운명이 전혀 아니었다. 그가 어렸을 때 부터 왕위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신라의 외교관으로 활동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신라의 문제를 타계하기 위해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진흥왕이 물러난 후 서서히 힘을 비축한 고구려와 백제는 다시 한번 신라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신라의 국왕은 아들이 없어 죽게된 진평왕의 뒤를 이어 그의 첫째 딸인 선덕여왕이 새로 즉위했다. 양측이 모두 성골 귀족이어야 자식도 성골이라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때문에 신라 내에서 성골의 씨는 거의 말랐기에 그의 첫재 딸이었던 덕만공주과 왕위를 잇게 된 것이다. 

  선덕여왕 대의 신라는 상황이 매우 좋지 못했다. 백제의 의자왕은 군대를 모아 장군 윤충으로 하여금 신라의 서부지역 요새 였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의자왕은 백제의 중흥을 이끈 명군이었다. 윤충은 이에 그치지 않고 낙동강을 넘어 서라벌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대장군 김유신을 동원해 간신히 백제의 침공을 맺으며 가까스로 버텼다. 고구려 역시 힘을 키웠다. 고구려는 실권자 연개소문의 등장하여 국가를 전시에 대비하도록 힘을 길렀다. 당태종 이세민이 호시탐탐 고구려를 넘보고 있었다. 안시성에서 간신히 당의 침공을 막았지만, 그들이 언제 다시 군대를 이끌고 올지 몰랐다. 

  신라의 위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선덕여왕은 외교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었다. 그녀는 자신의 조카이자 진골 귀족 중 가장 말솜씨가 좋고 매력과 인품이 뛰어난 김춘추를 고구려로 가는 것을 허락 했다. 김춘추는 자신이 직접 선덕여왕에게 자신이 고구려로 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말한 가장 큰 이유는 함락당한 대야성의 도독이 자신이 사위였던 김품석이었다. 대야성 함락으로 자신의 사위와 딸 모두 잃었고, 낙동강 코앞까지 백제군에 당도하게 되면서 자칫하면 서라벌 까지 백제군이 당도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김춘추는 자신의 체면을 살리고 딸에 대한 복수를 꿈꿨다. 하지만 신라군은 백제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연개소문의 힘을 빌리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김춘추는 자신의 아들 법민(훗날 문무왕)과 함께 고구려의 연개소문을 만나러 갔다.



대야성 위치




  고구려에서 연개소문과 김춘추가 만나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에게 동맹을 요청하면서 백제의 땅을 나눠 갖자고 제안했다. 연개소문을 이를 대가로 진흥황이 수복했던 죽령 이북의 땅을 고구려에 반환 할 것을 요구했다. 죽령 이북 지역은 신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 땅을 고구려에게 내준다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힘에 밀려 약소국 신세로 전락할 것이 번했다. 이는 신라 입장에서 너무 무리한 요구였고 김춘추는 거절한다. 결국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구금했다. 연개소문이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한 것은 신라를 딱히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평상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고구려와 백제는 연합 관계였다. 고구려는 당과의 일전을 위해 후방의 백제와 화친을 맺어야 했다. 그렇기에 고구려는 신라가 들어줄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애초에 한 셈이었다.

  고구려의 감옥에 갇힌 김춘추는 대신 선도해에게 뇌물을 보내 보장왕에게 잘 말하여 자신을 풀어줄 것을 부탁한다. 연개소문에겐 말했다간 씨알도 안먹힐 것이니 보장왕을 공략했다. 김춘추는 다행히도 보장왕을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신라로 돌아가 국왕을 설득해 고구려의 옛 영토를 돌려주겠다는 거짓말을 통해 다시 신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죽이려고 했으나, 그는 신라에 무시하 도착했고 고구려와의 외교는 불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사이 선덕여왕의 건강에도 문제가 생기면서 서서히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덕여왕 말년 상대등이자 왕위 계승 1순위였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다. 진골 귀족이었으나 선덕여왕과 가장 가깝고 왕위 계승에에 가장 앞서가던 비담이 갑자기 난을 일으킨 원은은 여러가지로 분석된다. 우선 신라 왕실은 당시 크게 2개의 파벌로 갈렸다. 상대등 비담과 김유신-김춘추의 파벌 2개로 나뉘었다. 고구려와의 화친 실패 이후 신라는 왜나 당나라와 연합해 전쟁을 일으키자는 의견과 자체적으로 힘을 기르자는 2가지 파벌로 나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혹자는 성골의 씨가 말라감에 따라 진골 중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이 왕위에 오를 것으로 생각되었고, 가장 유력한 진골이었던 비담과 김춘추간의 대결이 본격과 된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되었든 선덕여왕 말던 비담이 난을 일으키고 이것을 김유신이 제압하며 김춘추가 신라 제2의 권력자로 떠오르게 된다.

  이제 왕위는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그녀는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신라에 남은 유일한 성골이었다. 비담의 난을 진압하자마자 왕위에 오르기엔 반대가 심했기에 김유신과 김춘추가 앞세운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신라의 실권은 이 둘이 잡고 있었다. 김춘추는 실권을 잡자마자 바로 왜로 향했다. 하지만 왜나라 역시 백제와 오랜 기간 친교를 유지하고 있었다. 왜나라는 백제를 배신하기가 껄끄럽다는 이유를 들어 김유신의 청을 거절했고, 이번에도 별 소득 없이 다시 신라로 돌아온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김유신의 풍채와 매력에 반해 왜나라 사람들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고 전해진다. 백제 공략에는 참가하지는 않지만 김유신의 노력으로 양국의 우호도는 개선되었다.

  그리고 김춘추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당나라로 이동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처음에 신라가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김춘추는 다시한번 외교술을 발휘하면서 이세민을 설득했다. 특히나 당나라는 이전에 연개소문에게 당한 안시성에서의 대패를 갚아주고 싶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후방에서 신라가 흔들어 준다면 충분히 고구려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결국 당나라와 신라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양국은 동맹에 성공한다. 양국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할 연합군을 결상할 것이며 양국이 무너진 후에 평양을 기점으로 이북지역은 당나라가 이남지역은 신라가 차지하는 것으로 약속하게 된다. 신라로 돌아온 김춘추는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를 폐지하고 당의 연호를 따라 갔으며 관복도 당나라와 동일하게 바꿨다.



연개소문




  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고 자연스럽게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 상대등 알천과의 약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김춘추의 능력을 알고 있던 알천은 왕에 대한 욕심을 보이지 않았고 자연스레 김춘추가 새로운 신라의 국왕으로 등극한다. 신라 무열왕의 탄생이었다. 무열왕이 즉위하는 시점까지도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은 계속 신라를 압박해왔다. 연개소문과 계백이라는 양국 최고의 명장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신라의 영토를 집어 삼키면서 서라벌로 향했다. 정말 하마터면 신라가 멸망 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양국은 신라가 곧 망할 나라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무열왕 2년 고구려 백제 연합군은 신라의 성을 무려 33개나 뺏어내면서 정말 서라벌의 코앞까지 다가왓다.

  신라는 당연히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이를 완전 무시했다. 김춘추가 죽을 각오로 당나라에가 동맹을 맺었지만 그들은 신라에 비협조 적이었다. 김춘추는 하마터면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을 올리게 될지도 몰랐다. 무열왕은 재위 5년간 백제의 의자왕에게 연전 연패를 했다.


  국가 멸망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그제서야 당나라는 움직였다. 소정방으로 하여금 13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로 향했다. 김유신과 소정방의 나당 연합군은 백제에 반격에 나섰다. 당나라 군대는 우리가 아는 소문과 달리 매우 강했다. 이전에 빼앗겼던 대야성을 물론이고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 코앞의 황산벌까지 순식간에 당도했다. 백제로써는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김유신의 5만 대군과 계백의 5천 군대가 황산벌에서 맡붙었다. 국운을 짊어진 계백의 결사 항전으로 나당 연합군은 약간의 부침이 있었지만, 10배의 군대를 가지고 승리를 못따낼 김유신이 아니었다. 그는 신라 화랑들을 앞세우며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켰고, 황산벌을 돌파하며 사비와 웅진까지 속전속결로 무너뜨린다. 불과 1년만에 완전히 전세를 뒤집고 백제를 멸망시켰으나 당나라 군대의 강력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렇게 660년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의 무열왕에게 술잔을 따르며 항복했고, 백제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의자왕은 곧장 당나라로 송환되었고, 망국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며칠만에 먼 타국 땅에서 생을 마감한다. 백제의 중흥을 이끈데다가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던 왕의 비참한 몰락이었다. 더군다나 훗날 승자의 역사에 사치와 향략만을 즐기다가 간 망국의 군주로 현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으니 그의 능력에 비해 정말 슬픈 결말이었다.


  백제라는 나라는 한순간에 무너졌지만 백제의 백성들까지 전부 쓰러진것은 아니었다. 백제 귀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김춘추는 직접 백제의 옛 영토로 향해 이들에 대한 정복을 진두지휘했다. 그만큼 백제 부흥 운동의 싹을 자르려는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가 되었는지 김춘추는 백제 부흥 운동을 진두지휘 하던 와중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구 백제 세력에 의한 암살설도 실제로 존재한다. 

  김춘추가 죽고 왕자 법민이 문무왕에 오르면서 자신의 못다한 임무를 아들에게 물려준다. 문무왕에게 놓인 과제도 상당했다. 김춘추가 멸망 직전의 나라를 간신히 정상 궤도로 만들고 백제를 멸망 시켰고, 이제 백제 잔여세력 토벌과 고구려 멸망 그리고 당나라와의 사후 문제까지 모두 문무왕이 떠맡게 된것이다. 그 이후의 역사는 모두 다 아시다 시피 신라 세력이 고구려 토벌에 성공하고 나당 전쟁을 일으켜 양국간 영토를 조정함으로써, 김춘추의 꿈인 삼국 통일을 그의 아들이 이룩하게 된다. 김춘추는 외교술을 활용해 위기의 신라를 구하고 나당 연합군을 결성해 백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한반도의 통일 군주로는 이름을 올리진 못했지만, 사실상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만든 군주와 다름 없는 행보를 보였다.



의자왕




외세의 힘을 끌어들여 성공한 반쪽짜리 통일을 만든 왕


  김춘추의 통일은 다른 통일 군주들의 업적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명 그의 삼국 통일은 완전한 통일이 아니었다. 실질적인 전임자 선덕여왕이 망쳐놓은 신라를 맡았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고구려, 백제, 당나라는 물론 바다 건너 왜국까지도 신라는 곧 망할 나라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김춘추는 멸망 직전의 신라를 받아 불과 20년 만에 삼국을 통일하는 업적을 이루긴 했지만, 이는 자신의 힘으로 얻어낸 승리는 분명 아니었다.

  백제의 명군 의자왕과 신라의 암군 선덕여왕은 비슷한 시기에 각각 백제와 신라의 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결과는 위에서 말했다 싶이 윤충을 앞세운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하고 낙동강까지 신라를 몰아붙였다. 그 사이 김춘추는 당나라로 넘어가 간신히 이세민과 동맹을 맺는다. 그리고 소정방이 군대를 이끌고 오게되는 659년까지 별다른 상황 진척 없이 신라는 백제에 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소정방의 대군은 순식간에 백제를 함락시켰다. 신라가 20년동안 못했던 일을 당나라가 단 1년만에 해낸것이다.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는데 외교술을 뺀다면 정말 한게 단 하나도 없다. 진덕여왕 시기 포함하여 김춘추가 신라를 이끈 12년동안 신라의 군대 스스로 백제의 성을 뺏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오히려 의자왕이 대야성에서 공격을 멈춘게 놀라울 정도다.

  (여담이지만, 의자왕은 백제 내부 귀족과의 불화로 신라에 대한 신경을 쓰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아니면 후세의 기록대로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었거나.)


  물론 한반도의 역사를 볼때 중국의 협조 없이 통일 국가를 세우기란 여간 힘든것이 아니다. 고조선 역시 위만이라는 인물이 중국 출신이고, 이성계도 조선을 세우기 위해 명나라에 협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김춘추처럼 직접적으로 병력을 대규모로 빌려서 자신들의 힘보다 당의 힘을 앞세워 백제를 수복한 군주는 역사상 유일하다. 그리고 아들 문무왕 역시 당나라 병력을 활용해 고구려를 공략했다. 사실 백제가 무너진 시점에서 고구려는 이미 양면전쟁에 돌입한 꼴이 된다. 말갈과 협조하며 막아낼려고 노력했지만, 이 고구려 쇠퇴기부터 힘을 키운 거란이 등장하면서 자신들도 남을 도와줄 상황은 아니었다. 수와 당의 대군을 한세기에 걸쳐 막아냈지만, 양면전쟁에 돌입하자 고구려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정리하자면, 김춘추의 공은 뛰어난 외교술이다. 이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바로 당나라였다. 즉,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리기 위해 당나라의 힘을 끌어 들인 것이 그가 유일한 업적이다. 선덕여왕이 무너뜨린 신라를 간신히 살리긴 했으나 말그대로 몇년 더 버틴 것 뿐이었다. 무열왕 시기에도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에게 당해 수많은 성을 빼앗겼다. 그리고 당나라에 다녀온 이후 정치 제도를 개선한다는 명분하에 신라가 지켜온 고유의 관제와 연호를 파기하고 당나라의 것을 가져왔다. 신라가 600년 이상 지속해온 위대한 문화를 일순간에 버린 군주다.

  만약 김춘추가 신라를 살리지 않고 고구려, 백제 연합군의 힘에 무릎을 꿇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영토는 더 넓어졌을 텐데 말이다.



당 태종




외교술로 절체절명의 신라를 구하고 삼국을 정복한 명군


   우리는 한민족이다. 근데 이 한민족이라는 말은 언제 생겨났을까? 이 단어가 처음으로 공식 문서에 들어간 시점은 1950년 국무원 고시 제 7호에 '한민족' 혹은 '한인'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민족 주의라는 개념은 언제 등장했는가? 20세기 초 많은 서부 열강들이 팽창함에 반면에 절대 왕정이 무너지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등장하면서 많은 국가들이 식민지 정책에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식민지 보유국은 자신들의 세금을 거둬 자국이 아닌 식민지 시설을 유지하는데 쓰이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 식민지 국가들은 자주적인 정치, 경제 체제를 이룩하고 싶은 열망이 맞아 떨어지며 많은 국가들의 독립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바로 이때 등장한 개념이 민족주의이다. 국가의 성립을 민족에 기반하여 성립한다는 것이 민족주의의 주요 골자이다. 그렇기에 피식민지 국가는 열강이 아닌 자기 민족만의 국가를 성립 하기를 원했고, 식민지 보유 국가는 우리 민족이 아닌 타 민족에 세금을 소모하는 행위를 더이상 하지 않기를 원했다. 양측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 떨어지며 20세기 민족주의는 엄청나게 열풍을 불며 전세계로 확산 된것이다. 

  

  즉,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라는 개념이 성립된것은 20세기 이후다. 우리가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난 할 때 주로 하는 얘기들이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현대의 영토가 달라 졌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또 만약 놀이 좋아하는게 인간의 본성이다. 고구려가 통일 했으면 이후 역사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았을때 만주에 대한 지배권이 고스란히 대한민국으로 왔을 수도 있다. 완전 허황된 가정만은 아니다.

  근데 김춘추가 1500년 뒤에 현대 인들을 위해 자신의 국가를 고스란이 고구려와 백제에 물려줘야할 이유는 전혀없다. 김춘추가 당시 했어야 하는 일은 신라의 수십만명의 백성들의 안전과 신라의 망국 군주로 자신의 이름이 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가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도 전혀 없다. 당시 신라인들에게 이들은 그냥 적국이다. 고구려든 백제든 왜국이든 당나라든 그냥 모두 같은 적국이다. 뭐 물론 백제의 경우야 존재 자체가 모호한 한반도 남부의 진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뿌리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올라가면 과거 사로국 시절부터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개의 왕국이 서로 정복 하고, 정복 당한 시기를 생각하면 양국간의 동질감은 전혀 없을 것이다. 김춘추는 당장 당항성(현재 경기도 화성시 부근)도 수비하기 힘겨운 신라의 영토를 대동강 유역까지 올려 놓았으니 이보다 큰 성공이 없는 셈이다. 


  게다가 전임자들의 실책을 수습을 하면서까지 국가를 구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진흥왕이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끌면서 신라를 삼국 중 가장 강력한 나라로 올려 놨는데, 이후 3명의 왕은 정말 한게 아무것도 없다. 진지왕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모호안 이유로 폐위당하고, 진평왕은 재임기간만 길었지 신라 발전을 위해서 한게 별로 없다. 선덕여왕은 심지어 서라벌 서부 길목의 주요 거점인 대야성을 의자왕에게 내줬다. 12년 사이에 수십년간의 실책을 수습해 나라를 삼국통일 직전에 궤도로 올려 놓은 무열왕이 정말 대단할 뿐이다. 그나마 간신히 당항성이라도 지켜서 신라가 당나라와 소통할 창구를 지켜줬다는 것 하나가 유일한 업적이다. 

  그리고 그가 신라를 위해 했던 노력을 살펴보자. 선덕여왕 시기에 자신의 사위가 지키고 있던 대야성을 백제에 내줬다. 자신의 명예와 국가의 안전을 위해 그는 백방으로 노력했다. 서라벌 코앞까지 당도한 백제군을 막기위해 박방으로 노력했다. 괴한이 지금 우리집 앞에 칼을 들고 서있는 와중에, 괴한을 힘으로 이겨야겠다고 홈트레이닝을 하면서 근육을 키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 경찰이나 가족한테 빨리 전화해 이 상황을 타계해야한다.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대야성을 내준 와중에 자국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신식 무기를 도입했다간 진짜로 곧바로 나라 멸망 테크를 걷는 것이다. 빨리 외부의 힘을 빌려 눈앞의 적을 제거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를 위해서 김춘추는 처음에는 고구려, 그 다음에는 왜국 마지막에는 당나라로 이동하며 신라를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이 중에서도 고구려 방문은 정말 목숨을 걸고 간 것이다. 연개소문은 실제로 김춘추를 구금했고, 그를 이용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다행히도 김춘추가 기지를 발휘해 빠져 나오긴 했지만, 그의 고구려 행은 정말로 목숨을 담보로 이동한 것이 분명했다. 


  김춘추가 가진 최고의 능력은 외교술이 맞다. 하지만, 외교술 하나만으로 그를 설명하기엔 부족함이 따른다. 그가 군주로서 보여준 상황 판단력은 아주 훌륭했다. 그리고 순전히 당나라의 힘만으로 백제를 멸망 시켰다는건 너무 큰 비약이다. 그 유명한 황산벌 전투가 바로 신라의 힘으로 이끌어낸 승리다. 애초에 계백이 황산벌에서 김유신과 싸웠던 이유도 신라의 주공을 맡은 김유신의 대군과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서로 합류하지 못하게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그를 막은 것이다. 그 이후 다들 아시다시피 계백은 황산벌에서 김유신에게 대패하고 나당 연합군은 순식간에 사비성과 웅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킨다.

  무열왕 김춘추는 외교술 뿐만 아니라 사람은 이끄는 매력이 대단했다. 그는 가야 왕족 출신으로 중앙 정계에서 아웃사이더였던 김유신과 손을 잡았다. 그의 군사적 재능을 일찍이 알아봤다. 삼국시대 최고의 명장 김유신을 자신의 사람으로 두며 김춘추는 비담, 알천과의 진골 왕위 계승싸움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지독하게 폐쇄적인 신라 사회에서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기 위해서 가야 왕족에게 손을 내민 김춘추의 뛰어난 인품 역시 그가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만든 큰 업적 중 하나이다.



황산벌 전투




총평


  김춘추에 대한 비난은 지극히 현대적인 개념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그의 업적을 단순히 요약해도 위기의 국가를 구하고 통일까지는 못시켰지만, 다음 국왕이 무난하게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인물이다. 대한민국의 전국시대를 통일 시킨 군주인데, 이런 박한 평가를 받는 것이 새삼 아쉽다. 인간적인 능력은 고대 인물 중에서는 거의 최고다. 외교술, 매력, 인품, 정치력 거기다가 유사시엔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갈 수 있는 통솔력까지 같은 훌륭한 군주였다.

  신라는 김춘추 이후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다. 아들 문무왕은 물론 혜공왕 즉위 까지 통일 신라의 위상은 대단했다. 실제로 통일 신라는 아랍 교역 상인들 마저 신라에 방문할 정도로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의 위상에 올랐다. 이 시기 만큼은 왜국이나 거란족도 쉽사리 신라를 공략하지 못했다. 통일 신라의 전성기의 시발점은 김춤추의 외교술과 통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임자가 선덕여왕이라는 점만 봐도 답이 나온다. 


  무열왕 김춘추는 한반도 역사상 위대한 군주로 기록되어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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