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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독립과 통일 대한민국을 꿈꿨던 좌우 통합 지도자
VS
자신의 사상적 기반 없이 좌우 합작만을 바란 실속 없는 기회주의자
나는 사람마다 평가가 극명히 갈리는 인물을 좋아한다. 그사람이 지난 가치관에 따라 과오가 갈리고 혹평과 호평이 모두 공존하는 입체적인 인물을 특히나 좋아한다. 그 이유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현대에 오면 입체적인 인물 들은 더욱 많아진다.
이번에 소개드릴 여운형 역시 사람마다 평이 극명하게 갈리는 인물이다. 혼란의 연속이었던 대한민국 해방정국에서 가장 빛이 났던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대통령을 맡을만한 그릇은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는 그가 대통령에 올랐다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올바른 방향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대체 여운형은 누구길래 대한민국 해방정국에 김구와 더불어 가장 영향력이 있었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지 알아보자.
생애 및 업적
1886년 5월 25일, 경기도 양근군 (현 양평군 일대) 출생, 호는 몽양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
1906년, 양평에 개신교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인으로 전향
1907년, 동생 여운홍과 대한협회에서 안창호의 강의를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함
1914년, 난징 금릉대학교에 입학하여 영문학 전공
1918년, 서병호, 조동호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 조직
1919년 3월,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
1923년,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하고 임시정부 탈퇴
1929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야구경기 관람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3년형 선고
1932년 7월, 만기 4개월 앞두고 가석방
1933년, 조선중앙일보 사장직에 취임
1942년 12월, 일제의 패망을 주장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다시 옥생활 시작
1943년, 석방되나 건강 악화로 경성요양원에 입원
1944년 8월, 건국 동맹을 결성하여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연대 추진
1945년 4월, 일제의 패망을 직감하고 임시정부와 함께 국내 진공계획 수립
1945년 8월 14일, 일본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에게서 행정권, 치안유지권을 받아옴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으로부터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으로 선출 (주석 이승만)
1945년 11월 12일, 건국동맹으로 부터 조선 인민당 창당
1945년, 본격적으로 좌우 합작 운동을 실시, 몰래 북한에도 방문해 조만식 석방에 대해 논의
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로부터 이승만, 김구, 김규식, 조소앙, 안재홍 등과 함께 최고 정무의원으로 선출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에서 한지근의 권총에 의해 사망
임시의정원 활동 당시 여운형 (맨 뒤에의 오른쪽 두번째)
주요 활동
몽양 여운형은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다. 저 수많은 업적들이 증명하듯이 구한말 - 일제강점기 - 해방정국의 대 혼란기속에서도 누구보다 국가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 그는 어려서 부터 다양한 학문에 관심이 많았다. 19세기 말에 청소년기를 보냈던 여운형은 이 시기에 동학에 눈을 떳다. 이는 자신의 조부의 영향이 컸는데, 그의 조부인 여규신은 본래 양반 출신으로 소론 계열의 사대부였다. 허나 소론 계열이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면서 여규신 역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 여규신은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을 만나 동학 사상에 감화되었고, 그는 손자 여운형에게 자주 동학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전해진다.
여운형은 어릴적 이웃 집 과수원에 있던 사과 하나를 훔쳐서 먹었다고 한다. 과일을 먹고 도망쳐 나왔지만 들킨 여운형은 아버지에게 그 사실이 발각되었다. 아버지 여정현은 그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아버지는 그에게 직접 꾸짖지 않고 과수원으로 달려가 나무들을 베어버렸다고 한다. 당시 과수원은 양반보다 계급이 낮은 상민 집에 있었다. 여운형을 자신으로 인해 타인의 나무가 베어지는 것을 보고 어린나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실수로 발생한 일인데 양반의식으로 인해 아무렇지 않게 타인의 재산을 베어버려도 아무말 못하는 신분제도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고, 차별제도 철폐에 대한 필요성을 느낀다.
이후 그는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평민과 천민들을 자주 아꼈다. 집에 있던 노비들을 대거 풀어주기도 했고, 말을 타고 지방을 왕래할 때는 농부들이 휴식과 잠을 방해하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조용히 다녀갔다고 전해진다. 노비와 상민이 죽게 되었을때도 장례를 잘 치를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다.
여운형이 점차 성장해 출세를 해야할 시기가 왔는데, 당시 대한제국은 개혁 정책의 일활으로 과거제도를 폐지하게 되었다. 이제 더이상 사대부의 학문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여운형은 신 학문을 가르치는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이는 영국 유학을 다녀온 당숙의 영향이 컷다. 그가 조카 여운형에게 더이상 성리학이 아닌 서구 문물과 학문을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조언을 해주었다.
하지만 얼굴도 잘생기고 놀기를 좋아했던 여운형의 성격 상 배재학당의 빡빡한 학업 스케줄을 지킬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친구들과 함께 일요일 예배 수업을 땡땡이 치고 남산으로 놀러갔다고 한다. 이 때 선생님이 예배에 참여하지 않은 학생을 찾아내기 위해 손을 들라고 했는데, 자신만 솔직하게 손을 들고 1시간 동안의 추가 자습을 하는 벌을 받았다. 이 일에 열이 받은 여운형은 배재학당에서 자퇴하고 흥화 학교로 전학한다. 흥화학교에서는 1년간 다니면서 우등생으로 상까지 받는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아내가 죽고 할아버지도 돌아가 집안을 살려야될 가장이 되자 더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었고, 우무국 기술을 배우는 기술자의 길로 전향한다.
여운형이 1년간 다닌 배재 학당
하지만 여전히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던 여운형은 신학문을 배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인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기독교 신자가 된 여운형은 집안에 있던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그를 해방해주었다. 주변의 양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노비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는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가 되어 새벽 기도에도 열렬히 참가한다. 특히 1904년 자신의 고향 양평군에 개신교 교회를 세웠다. 워낙 친화력이 좋았던 여운형이기에 많은 기독교 인들이 그의 교회를 찾아왔다. 그 중에는 조선예수장로회 총회장을 지녔던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도 있었다.
이 시기에 그는 예수가 조선을 구원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조선을 기독교적인 낙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다른 서양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하는 포교 활동에 반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점차 지남에 따라 기독교회가 친일 보수 성향으로 전향하자 여운형은 크게 실망한다. 그리고 초기의 여운형은 일본이 서양 제국주의로 부터 조선을 막아줄 수호자 역할을 할것이라고 믿었다. 사실 이는 여운형 뿐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 인들 사이에 깊게 박힌 생각이었다.
러일전쟁 발발 당시만 하더라도 많은 대한제국 사람들은 일본을 지지했다. 러시아야 말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을 대표하고 이를 한중일이 뭉쳐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 제국 역시 이 프레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대한제국 사람들이 자신들을 좋게 생각하게 만들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1910년 국가의 주권을 뺏긴 모습을 본 여운형은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믿었던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박탈하고 시민들의 권리를 빼앗아가는 것을 본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여운형은 더이상 사상이나 타국에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개인과 국가 자체의 힘을 키우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914년 그는 집안 재산과 노비를 전부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독립 운동으로 뛰어든다.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선택한 것은 바로 중국 유학이었다. 그는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중국 난징에 있는 금릉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남을 돕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은 여기서도 발휘되었는데 그는 난징과 상해로 유학을 오고 싶어하는 조선인들을 돕고 조신인 대표가 되며 활동을 이어간다. 그는 영문학과에 입학했는데 평소 영어 실력이 매우 출중했기에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그는 남을 돕는데 거의 전 재산을 다 써서 거의 모든 월급을 남을 돕는데 사용 했다. 오전에는 협화 서국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담배나 양말을 발품 팔아서 판매하며 근근히 생활했다. 그 수익 마저도 남을 위해 모두 사용했으니, 그가 얼마나 중국에서 힘든 삶을 살았는지는 짐작이 간다. 그래도 이 시기에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중국 국민당의 원수이자 현 중국의 국부로 칭해지는 쑨원을 만나게 되며 그와 친해지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여운형을 독립운동으로 이끈 안창호
중국에서 큰 명성을 얻은 그는 1918년 상하이로 이동해 항일 운동을 이어간다. 상하에서 그는 신한청년단을 조직하며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세계 1차대전 종전 이후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면서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운형 역시 윌슨의 말에 크게 동의했다. 그는 윌슨의 특사였던 찰스 크레인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신한청년단 일원 중 한명이었던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수 있었다. 또다른 신한청년단원이었던 이광수는 일본 동경에 가 2.8 독립 선언을 위한 활동을 진행했다.
그리고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여운형은 임정 활동도 이어간다. 여운형은 초기에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아직 독립 운동 세력의 크기가 크지 않기 때문에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임정은 수립되었고 그는 동생 여운홍과 함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설출된다. 여운형은 임정에서 외무부차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임정에서 황족 우대 문제가 불거지자 이승만과 함께 이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이제 구시대의 문화는 버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는 새로운 국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운형은 임시정부의 외무부 차장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3.1 운동 진압과정에서 일제가 조선인들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한것이 드러나면서 세계 언론으로 부터 질타를 받고 있었다. 여운형은 이를 좋은 기회로 삼았다. 일본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여운형을 도쿄로 초대하여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고 그를 앞세워 언론 플레이를 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정부는 정식으로 여운형을 초대하고 그에게 국빈 대접을 해주었다. 처음에 임정 사람들은 일본에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반대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이를 받아들이고 도쿄에 가 일본 척식국 장관이었던 코가를 만나러 갔다. 여운형은 코가에게 대한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며 그를 설득 시켰다. 적국의 주요 인사 앞에서도 전혀 꿇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자 코가 장관 마저 그의 기개와 인품에 감탄했다. 도쿄 호텔에서 연사로 초대되었을 때는 일본에 우호적인 발언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의 기대와 달리 조선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다. 이를 계기로 여운형을 초대하자는 계획을 세운 하타 타카시 총리는 바로 실각하게 되고 일본에 새로운 내각 체제가 들어오게 된다. 이 사건이 여운형 초대로 시작되어서 새로 들어선 내각을 일본에서 여운형 내각으로 부르게 된다.
1920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이동휘화 함께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다.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이동휘는 코민테른이 제국주의 아래에서 고통받는 약소국을 지원해준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한 독립 운동 세력을 조직하려고 했는데, 자금이 부족했다. 국가의 독립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모든 도우려는 여운형이 또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고, 오랜 시간 독립운동을 같이 한 김규식 그리고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 박헌형과 함께 고려공산당을 창당한다. 그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코민테를 전당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상해에서 모스크바로 이동했어야 했는데, 기차를 타고 가면 밀정에게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 그들은 자동차와 마차 썰매를 이용해 몽골의 고비사막과 시베리아의 추위를 이겨내며 간신히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전당대회에서 블라디미르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나 대한 독립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수확도 있었다. 레닌 역시 여운형의 목소리에 감명받아 그를 대회 의장단 중 한명으로 선출한다.
여운형의 첫번째 정적, 이승만
1920년대 역시 여운형은 무장투쟁과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1925년 5월 30일 중국에서 영국 경찰들이 불평등 조약에 반대하던 중국인 20여명을 살해하는 5.30 사건이 일어난다. 이를 계기로 중국 혁명이 발생하게 되는데 여운형은 중국 혁명에 참가해 제국주의 반대를 주장했다. 1926년에는 의열단 단장이었던 김원봉을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1927년에는 동남아시아에 방문해 영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했다. 또한 소련 신문사 타스에 취직하여 대한민국 독립에 대한 글도 틈틈히 쓰는 등 바쁜 일생을 보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의 활동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되는데, 영국 제국주의 반대를 주장했던 일을 계기로 영국으로부터 추적을 받게 된다. 1929년 7월 상하이에서 야구경기를 관람하던 도중 영국 경찰의 협력을 받은 일본 경찰이 그를 찾아내 조선으로 끌려오게 된다. 조선에 있는 시민들은 그의 체포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립운동을 위해 평소 모습을 자주 나타내지 않았기에 그의 체포루머는 자주 조선에 퍼졌는데, 그래서 처음에 그의 체포소식을 듣고는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상태로 서울에 오자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했다. 본래 서울역에 내릴 예정이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용산역에 미리 내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으로부터 3년 징역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수감생활을 하며 그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체중은 무려 20키로이상 빠졌고, 신경통과 치질로 고통스러워 했다고 전해진다.
1932년 7월 26일, 만기 4개월을 앞두고 가석방되었다. 평소 인간관계를 잘 유지해온 관계로 그는 이듬해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여운형은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자본을 모으며 중앙일보를 키우는데 힘썻다. 많은 사람에게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게다가 일제 강점기 하의 서울에서 이순신 장군 묘소를 정돈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 덕택에 조선 중앙일보는 조선, 동아일보와 겨루는 3대 일간지로 위상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1935년에는 조선체육회 회장도 역임했다. 평소에 운동에 관심도 많았고, 스포츠로 하여금 청년들의 활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손기정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게 되자 누구보다 먼저 이 소식을 조선인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손기정이 금메달을 받게 되고 동아일보에서 손기정이 메달을 받는 장면에서 일장기를 없앤 일장기 말소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제국은 조선 언론사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결국 조선 총독부는 중앙일보를 폐간시키며 다시 여운형은 야인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시기에 여운형의 인기는 엄청났다. 각종 학교 졸업식은 물론 유명 인사들의 결혼식 주례에도 참여했다. 평소 얼마나 넓은 인맥을 보유하고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산 안창호의 말년에도 조만식과 함께 그의 곁을 끝까지 지켰다.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조선에서 항일 운동이 큰 제약을 받게 된다. 4월 초 아들이 호세이 대학에 입학하게 됨에 따라 같이 일본으로 이동하게 된다. 여운형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유학생을 만나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일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자금 지원도 이어갔다. 일본 고위급 간부들과도 만나며 중일전쟁의 중단을 주장했다. 1940년대로 넘어가면서 태평양 전쟁도 일어나고 점차 일본에 불리한 전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본은 이제서야 중화민국 주요 인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여운형을 불렀다. 일본 제국은 그에게 중국 인사들을 설득해 휴전 협상을 도와달라고 말했지만, 여운형은 당연히 거절했다. 일본 제국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다섯번이나 그를 불렀는데, 여운형을 일본의 청을 받아주는 척하면서 그들과 대화해 많은 정보들을 빼냈다. 그리고 여운형은 이 대화를 통해 조선 독립의 시기가 왔을음 확신하게 된다.
여운형은 송진우, 김성수들과 같이 일본의 패망이 다가왔음을 조선인들에게 알리며 그들을 꺠우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일본은 여운형을 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해 1942년 12월 21일 시모노세키에서 그를 다시 체포한다. 일본 경찰은 그에게 사상전향서를 작성하고 신사참배를 한다면 석방 시켜주겠다고 꼬셨지만, 여운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결국 1943년 7월 신경쇠약으로 가석방되었다. 그는 다음날 절친 안재홍의 자택으로 갔는데, 그의 몰골이 너무 처참하여 놀랐다고 전해진다. 결국 곧바로 경성요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 판사가 그에게 전향을 권유 하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형을 다시 집행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여운형은 계속 거절했지만, 그의 건강을 걱정하던 가족들이 대신 전향문에 도장을 찍게 된다. 이 일은 훗날 여운형이 정적들로부터 비판을 받게되는 치명적인 실수로 남게된다. 그 이후에도 일본 총독부는 그를 자택에서 계속 감시했고, 건강은 더욱 더 나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총독부의 핍박과 건강 쇠약에 굴할 여운형이 아니었다 1944년 8월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해방 이후의 한반도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1944년 10월에는 농민 동맹을 결성했다. 1945년 3월 건국동맹의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했고, 채병덕 등과 함께 무기를 조달하고 병력을 키워나갔다. 5월에는 임시정부와 접촉하며 8월 29일 진공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해방 직전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여하며 소련이 한반도 까지 점령하게 될 것이라는 위기감이 고조된다. 이 시기에 일본은 이미 한반도를 포기한 상태인데, 조선이 소련에 들어게가 되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된다. 결국 광복 하루 전인 8월 14일에 총독부의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여운형을 불렀다. 엔도는 여운형에게 조선 내 체류중인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여운형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총독부로부터 행정권과 치안유지권을 받아오게 된다.
해방 이후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이하 건준위)를 조직했다. 기존에 설립 했던 건국동맹이 모체가 되었고 안재홍, 조만식등도 참여했다. 건준위는 총독부에서 받아온 치안유지권을 바탕으로 광복 직후에 발생할 혼란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중국과 동남아에서 실제로 광복 직후에 보복성 살인이 마구잡이로 일어나 도시 곳곳에서 살인 등 범죄가 일어났는데, 건준위는 사회가 흔들리지 않게 상당한 역할을 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총독부와 협상을 진행했다는 점이 다른 정적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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