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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리를 혁파하고 사회 정의를 이룩한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
VS
대중을 광기에 내몰고 참혹한 공상 사회를 만든 미치광이
아마 몇십년 전에 다뤘다면 큰일 날지도 몰랐을 한 인물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이 사람으로 말할것 같으면 좋은방향으로든 나쁜방향으로든 20세기 지구 역사에 큰 획을 차지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열강의 시대였던 19세기를 뒤로하고 많은 나라들이 현대화를 이룩하며 20세기는 자본과 냉전의 시대로 흐른다. 그리고 이 냉전 시대를 연 한 축은 바로 사회주의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했으며 영향력 있던 인물을 다뤄보고자한다. 바로 소련을 건국한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이 사람의 일생은 간단히 설명이 안된다. 레닌을 알기위해선 어떻게 레닌이라는 사람이 튀어나오게 되었는지 부터 차근차근 살펴봐야 한다. 19세기말 부터 20세기 초까지 사회주의 사상이 어떻게 러시아 사람들에게 인식이 들어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러시아 내에서의 제국주의 세력, 자유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간의 갈등. 첫 혁명의 실패와 두번째 혁명의 성공 그리고 스탈린까지 해야할 이야기가 산더미와 같다. 이렇게 방대한 이야기이지만 충분히 알 가치가 있다. 역사와 사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시대의 살고있는 우리는 레닌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할지도 말이다.
현대 경제체제는 수정자본주의에 가깝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사상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압승은 하긴 했지만 다수가 살만한 사회를 만들었는가 하면 의문이 남는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에 있던 많은 장점들을 채택하게 되면서 수정자본주의가 출범하게 된다. 우리나라 국회에서도 복지 제도 문제를 놓고 여야가 싸우는 광경을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현재 우리나라 역시 수정자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왜 어떤 부분이 공산주의에서 채택이 되어 현재 자본주의에 흡수되어 들어온 것일까? 이런 의문도 생긴다. 이제 레닌이라는 인물을 살펴보면서 그와 그의 사상을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철거되고 있는 레닌 동상 (몽골, 울란바토르)
생애 및 업적
1870년 4월 22일,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 출생
1887년, 카잔대학교 법학과 입학 했으나 집회 경력을 문제삼아 학교측으로 부터 제적
1891년 12월, 변호사 자격증을 받고 정식으로 활동 시작
1895년 12월, 차르 반대 운동에 연루되어 약 1년간 투옥
1900년 1월, 5년간의 유배 생황을 마치고 서유럽으로 이동해 망명 생활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레닌 급히 러시아로 귀국
1907년, 볼셰비키파와 쿠데타를 계획하나 실패하고 2차 망명생활 시작
1912년, 체코 프라하에서 볼셰비키 당 대회 소집
1917년 2월,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 퇴임. 러시아 제국 멸망
1917년 4월 3일, 레닌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 도착
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발생으로 러시아 내전 시작
1918년 3월, 독일 제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하며 1차대전 종결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건국
1924년 1월 21일 뇌일혈로 사망, 자신의 후계자로 레프 트로츠키 지목
주요 활동
18세기 러시아제국은 유럽의 패자로 떠오른다. 러시아 제국의 황제 표트르대제는 스웨덴 제국을 스칸디나비아비아 제도로 몰아 넣고 신성로마제국과 아시아를 몰아내며 자신만의 영토를 구축한다. 자신의 세력권을 만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를 만들며 자신들의 시대가 왔음을 알린다. 나폴레옹 조차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수십만 대군을 날리고 본국으로 처량하게 돌아갔다. 러시아의 팽창을 보다 못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들의 팽창을 막기 위해 크림반도로 진군했고 러시아는 영불 연합군에게 대패하며 세력이 점차 꺽이게 된다. 크림 전쟁 패전은 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차르였던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끼게 된다. 그리고 시행한 것이 1861년의 러시아 농노해방령이다.
하지만 위로부터의 혁명은 늘 그렇듯 시민 한명한명까지 이루어지기 쉽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대책없고 허울 뿐이었던 농노해병량은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러시아 사회는 더욱더 혼란해졌고,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개혁에 실패한 무능한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제국의 몰락을 꿈꾸는 암살자들에 의해 살해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하면서 러시아 사회는 더 큰 혼돈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는 아버지가 했던 모든 개혁 정책들을 중단하고 과거 전제 정권의 러시아로 회귀하는 시대 역행적인 정책들을 마구 실행한다. 그리고 자신을 반대했던 세력을 전부 숙청하게 된다. 이 대숙청 과정에서 한 사람이 희생되는 데 그의 이름이 알렉산드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바로 레닌의 형이다.
평소에도 건강이 매우 안좋던 알렉산드르 2세가 급사하게 되고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3세가 20대 중반의 나이로 즉위하게 된다. 원래 알렉산드르 2세는 니콜라이 3세가 30세가 될 때 부터 황제 후계 수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알렉산드르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니콜라이 2세는 황제가 될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채 차르에 오르게 된다. 국가를 다스릴 준비가 전혀 안된 20대 황제가 즉위한 시기가 바로 1894년이다. 조선은 당시 명성황후가 일본 군인에게 죽임을 당하기 바로 1년전의 시기이다.
로마노프 왕조, 알렉산드르 3세
1870년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출생한다. 아버지는 비록 농노 출신이었지만 수준높은 교육을 받아 교육 공무원을 지냈고, 능력을 인정받아 하급 귀족의 신분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신분 상승이 바탕이 되어 레닌과 그의 형제자매들을 유복한 환경에서 매우 수준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레닌은 4명의 형제 중 둘째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일찍 죽고 그의 형이었던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는 혁명사상에 빠져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을 짜게 된다. 이 계획이 들통나 22살의 나이로 처형당한다. 이로 인해 레닌은 대학에서 쫓겨나게 되고, 겨우 17세의 나이에 집안의 가장이 된다. 대학에 재입학 신청을 했으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곧바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변호사 사무실을 연다. 이 시기에 주로 맡았던 일들이 토지 분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레닌은 자연스럽게 농노들의 현실에 대해 느낄 수 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레닌은 하층민들을 위해서 무료 변론도 해주며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형과 마찬가지로 블라디미르 레닌 역시 혁명사상에 깊이 빠지게된다. 러시아 내에 있는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 그리고 1895년 서유럽에 있는 다른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들과 접족하기 위해 프랑스, 독일, 스위스 등지를 여행핬다. 6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그는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된다. 그해 12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온건파 멘셰비키의 리더 율리우스 L. 마르토프를 만나 차르 반대 운동을 계획한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해 혁명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 레닌을 비롯해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와 마르토프 역시 이 혁명에 가담하게된다.
그러던 와중 결국 러시아 비밀경찰들에게 계획이 발각 되고 1년간의 투옥 생활과 5년간의 유배 생활을 한다. 레닌은 시베리아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약혼자 나데즈나 크룹스카야도 같이 시베리아로 이동한다. 유배 생활 중 레닌은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유배 시기에 그의 저서 중 하나인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달’ 을 집필한다. 1900년 서른살이 된 레닌은 독일로 떠나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첫번째 혁명 시도가 실패한 레닌은 사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과 같이 마르크스주의를 실현 시킬 사람들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마르토프와 ‘불꽃’이라는 잡지를 창간해 많은 지식인들을 포섭할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1902년 자신의 혁명 사상을 집대성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을 집필한다. 이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레닌은 자신의 저서에서 혁명의 전제는 무산 계급에 의한 정권 탈취와 체제 변혁이 되어야 된다고 말했다. 이는 훗날 레닌 주의의 기초 사상이 된다.
이는 같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레닌과 마르토프는 격렬한 대립은 하게 된다. 레닌의 경우 러시아 비밀경찰들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소수 혁명가들의 당을 만들 것을 요구했고, 마르토프의 경우 서유럽의 공산주의 정당처럼 다수의 개방적인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당은 레닌은 지지하는 세력과 마르토프를 지지하는 두 세력으로 분리되었고, 레닌을 지지하는 세력을 다수파라는 이름의 ‘볼셰비키’, 마르토프를 지지하는 세력을 소수파라는 이름을 가진 ‘멘셰비키’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대립은 러시아 혁명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도 좁혀지지 않게된다.
과거 사회주의를 채택했던 국가들 (출처: 위키백과)
폭력혁명론은 레닌의 사상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상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힘을 합쳐 구 세력을 전복 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산주의 개념과 거의 유사하다. 사실 우리가 아는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와 프리드히리 엥겔스이다. 이 둘은 노동자들의 우선시 되고, 모든 국가적 산업이 국유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산업 발전을 이룩해야하는 선제적인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자본주의 사회가 극도로 발달하다가 사회적 모순이 발생해 결국 붕괴가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주도적으로 혁명을 이끌어 그들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 주의의 핵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이다.
하지만 레닌은 생각이 달랐다. 물론 레닌의 사상 역시 최종적으로 노동자들에 의해 완성되는 이상적 국가를 세우는 동일한 목표가 있었다. 다만 그는 자본주의 사회로의 부르주아 혁명 과정이 생략되고 노동자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차지하는 방식의 혁명을 주장했다. 이러한 폭력적 사상으로 인해 레닌은 같은 사회주의 지도자들과도 틀어지게 된 것이다. 멘셰비키들은 이러한 폭력적인 방식에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불러 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러시아 제정은 더욱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1904년 한반도 영향력을 두고 일본 제국과 전쟁을 치뤘지만 러시아는 대패하고 물러났다. 게다가 국가 내부에서는 주요 관료들에 대한 암살과 테러가 계속 일어나며 니콜라이 2세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민중들은 여전히 차르가 문제를 해결해줄것이라고 기대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편지를 쓰며 자신들의 궁핍한 삶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1905년 1월 22일 일요일, 게오르기 가폰 신부가 이끼는 대 행렬은 니콜라이 2세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황궁으로 가 차르를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탄원서를 제출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무려 30만명이 황궁에 도착하게 된다. 시민들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차르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산산히 무너지고 만다. 마침 황제는 휴가를 떠난 상태였고, 황제의 군대는 시민들을 상대로 일제 사격을 가한다. 무려 천명의 시민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이 바로 1905년 러시아 제국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일반 대중들은 황제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박살난다. 그리고 평화적인 입헌군주정을 꿈꿨던 사회주의, 자유주의 계열의 사상가들은 더이상 황제의 황포를 두고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해 10월 니콜라이 2세는 입헌 군주제로의 변화를 포함한 10월 선언을 발표했다. 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두마를 개설하고 헌법 제정의 권한을 이들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실질적으로 바꿘건 여전이 없는 허울 뿐은 입헌군주정이었다.
러시아 제국 피의 일요일
혁명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레닌은 망명 생활을 끝내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다. 맨셰비키와의 갈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지만, 혁명 성공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그는 다시 혁명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세력들이 러시아에서의 쿠데타를 진행했고,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 제국은 지식인과 정치인에대한 대대적인 검열에 들어가게 되고. 레닌은 다시 망명길에 오른다. 스위스와 체코 등지로 떠나 다시 망명 생활은 시작한 레닌은 무려 10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다.
레닌은 망명 생활을 하면서 여전히 혁명에 대한 기반을 닦았다. 1908년 부르주아 사상을 비판하는 ‘유물론과 경험론’을 출간 했다. 그리고 1912년에는 볼셰비키만의 전당대회를 체코 프라하에서 열며, 멘셰비키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며 유럽의 다른 공산주의 정당들과 함께 전쟁에 비판하는 목소리도 냈다. 특히 제국주의의 전쟁은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으며 결국 사회주의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한다.
레닌이 망명을 떠나있는 동안 러시아는 지옥이 열리고 있었다.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요승 그레고리 라스푸틴에게 휘둘리며 실질적인 정치를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총 파업을 일으켰다. 그나마 제국 내에서 사태 수습에 앞장섰던 국무총리 표트르 스톨리핀 역시 좌익 혁명가들에 의해 암살당하게 된다. 그리고 발발한 세계 1차대전으로 인해 러시아는 완전히 피폐해진다. 러시아는 전쟁 준비를 위해 막대한 군비를 조달해야 했는데 가뜩이나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던 러시아는 천청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노동자들은 없는 살림에 전쟁을 위한 세금이 늘어나고, 징병 대상으로 지목되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혁명의 바람이 다시 한번 거세게 불기 시작한 것이다.
1917년 2월 23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비보로크의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장의 횡포에 못이겨 총 파업을 실시하게 된다. 이들은 경찰에 의해 저지된 다리를 건너는 것을 포기하고 얼어붙은 네바강을 건너 시내로 진입하며 자신들에게 빵을 달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게 된다. 무려 13만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한 이 운동은 다음날 21만여명으로 확대된다. 제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이를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제국의 군대 역시 러시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신들이 발포해야 하는 대상이 자신들의 가족이었다. 한 하사관은 시민들을 상대로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장교를 살해한 뒤 반란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제국의 군대들도 스스로 해산하거나 시민군의 일부로 참여하게 된다.
2월 27일 혁명 세력은 평의회, 대표자 회의를 의미하는 소비에트를 결성하여 혁명을 주도적으로 이어갔다. 멘셰비키가 절대 다수였던 이 소비에트는 드디어 성공적인 혁명을 이룩하게 된다. 2월 혁명은 전국으로 퍼져갔다. 소비에트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부르주아 계층과 손을 잡았다. 이들을 중심으로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니콜라이 2세는 결국 폐위당한다. 자유부르주아 세력들과 멘셰비키는 사회주의 성향의 지식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를 총리로 세우는 새로운 내각을 구성한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러시아의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차르 정권이 붕괴되었다. 레닌도 망명을 마치고 급히 귀국했다. 독일 제국의 지원을 받아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혁명가 32명이 봉인 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다.
니콜라이 2세 기간의 러시아 두마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임시정부에게 있어서 불청객이었다. 부르주아와 멘셰비키는 이들의 사상을 그닥 반기지 않았다. 레닌은 4월 테졔를 발표했는데 아래와 같은 내용이 포합되어 있었다.
우리는 혁명의 첫 단계에 도달했을 뿐입니다. 2월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국은 진정한 공화국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국가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린 자유주의, 민주주의, 부르주아를 일체 거부할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국제 혁명의 시작입니다.
농민에게 토지를,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 즉각적인 전쟁 종결
당연히 소비에트의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은 레닌의 이런 이야기를 헛소리로 치부했다. 소비에트의 중심이었던 멘셰비키는 임시정부와 부르주아와 협력하며 자유가 보장된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기로 결정하며 볼셰비키가 주장한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부정한다. 볼셰비키들의 활동은 결국 임시정부에 의해 진압되었고, 케렌스키 총리는 레닌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린다. 레닌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7월 다시 핀란드로 도망가 세번째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러시아 2월 혁명
반면 임시정부의 케렌스키 내각이 새로 들어섰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전쟁은 지속되었고, 내각 구성은 지지부진 했다. 심지어 제국의 장군 중 한명이었던 라브로 코로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케렌스키 내각을 위협했다. 케렌스키는 전혀 러시아의 상황을 나아지게 만들지 못하게 되자 미치광이 취급 받던 볼셰비키가 다시 한번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프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내부에서 다시한번 세력을 결집시켰다. 이들은 붉은 근위대를 조직해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결국 임시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에 의해 소수파였던 볼셰피키가 다수파가 되며 소비에트를 장악한다.
소비에트를 장악한 트로츠키는 서들러 레닌을 다시 불렀다. 레닌은 드디어 무장봉기를 시작할 적기가 찾아 왔다고 판단했다. 1917년 10월 25일 레닌은 다시 한번 대중 앞에 섰다. 트로츠키는 독일군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군사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주요 시설에 군대를 투입했다. 이들을 성공적으로 국가 주요 시설들을 장악했다. 붉은 근위대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리고 레닌은 대중들에게 다시한번 노동자들의 결집을 호소했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조직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울 것이다. 만약 정부가 등 뒤에서 칼을 꽂으려 한다면 우린 반격할 것이다.
볼셰비키가 항상 말해온 노동자 혁명이 실현되었습니다. 10월 혁명으로 공산주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타격에는 타격으로, 철에는 강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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