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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해밀턴
미국 헌법과 경제 체제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
VS
귀족 주의와 연방 주의로 신대륙 정신에 어긋난 사상가
자유 사상의 뿌리는 유럽이지만, 자유주의라는 꽃을 피운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유럽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사람들이 이동한 이래 아메리카 인들은 유럽과는 차별화된 자신들만의 사상과 정치 체제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왕이 없는 나라,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미국의 지식인들은 한데 모였다. 유럽의 고지식한 전제 군주제와 다르면서 하나의 정부에 시민과 연방의 힘을 모으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필요했다. 이 정신에 기반해 미국 헌법을 작성하고 자유방임주의를 미국에 이식해 지금의 초강대국을 만드는데 정치적 기반을 닦은 사람이 있다. 바로 미국의 초대 재무부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주요 활동
1757년 1월 12일, 영국령 리워드 제도 네비스 섬 출생 (혹은 1755년)
1772년, 뉴저지주 엘리자베스 타운 아카데미 입학
1789년 9월 11일, 조지 워싱턴 대통령으로부터 미합중국 초대 재무장관으로 지명
1795년 1월 31일, 재무장관작 사임 이후 의회 활동
1800년, 토마스 제퍼슨을 지지하며 그가 대통령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함
1804년 7월 12일, 애런 버의 총에 맞아 사망
생애와 업적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은 유럽 아니 세계 역사 흐름을 뒤집어 놓았다. 르네상스 이후 발전된 유럽 문명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순조롭게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점차 독자적인 문화가 생겨나게 된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인과 아메리카 이주민은 하나라는 공식이 끊어지게 된다. 아메리카 이주민들은 유럽 본국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간섭을 하는 행동에 왜라는 의문이 붙이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프렌치-인디언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힘겨루기가 한창이던, 1757년 1월 12일 영국 식민지였던 아메리카 대륙 리워드 제도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이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와 둘이서 생활을 이어간다. 아버지는 해밀턴이 어렸을 때 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그를 미대륙으로 유학 보내길 원했다. 그리고 1772년 뉴저지주의 엘리자베스타운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사상이 정립되기 시작한다.
그가 학교에 입학 했을 때는 영국령 아메리카 식민지와 본국과의 갈등이 극심할 시기다. 동인도 회사의 수익이 떨어지자 영국 본국은 동인도 회사에서 생산되는 차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강제로 팔게 된다.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차는 수입하지 않고 강제로 동인도 회사의 차를 수출하자 식민지 인들은 화가 났다. 결국 보스턴 항구에서 동인도 회사로 부터 들어오는 차를 바다로 다시 던지게 되고 이것이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영국과 식민지 간의 갈등이 시작됐다. 그리고 미국의 지식인들은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며 영국과의 전면전을 치르게 된다. 이 전쟁이 바로 미국 독립전쟁이다.
해밀턴은 뉴저지에서 공부를 하며 본국과의 갈등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된다. 아메리카 대륙에 깊이 내리기 시작한 독립 사상에 해밀턴 역시 눈을 뜨게 된다. 그는 독립전쟁에 가담하며 영국과의 전쟁을 지휘한다. 그 과정에서 조지 워싱턴을 만나게 된다. 워싱턴 역시 해밀턴의 해박한 지식에 대해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최 측근으로 만들게 된다. 조지 워싱턴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해밀턴은 그중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전쟁 지휘에도 능하여 요크타운 전투에도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다.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제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 세력을 내쫓은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새로운 나라를 세울 계획을 만든다. 말그대로 시민들이 모여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했다. 유럽의 어느나라와도 다른 아메리카 대륙의 사상에 깊이 배어 있으며 신대륙 사상에 입각한 완벽한 정치 체제를 만들어야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훗날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제임스 매디슨, 그리고 훗날 연방대법원장에 오르는 존 제이, 초대 미국 국무장관 토마스 제퍼슨 등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모였다. 그리고 조지 워싱턴과 많은 전투에 참여한 알렉산더 해밀턴 역시 헌법 제정에 참가한다.
미국 독립전쟁
미 식민지는 전쟁 승리를 위해 많은 나라로 부터 빚을 졌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 했으니 이제 미 정부는 타국에 진 빚 갚아야 했다. 이 채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마스 제퍼슨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게 된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대표적인 연방주의자였다. 그는 항상 강력한 연방정부의 힘을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밀턴은 전쟁에서 진 빚을 모든 주가 균등하게 배분해서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연방의 주들은 하나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진 빚이므로 모두가 동일하게 이를 부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토마스 제퍼슨은 대표적인 공화주의자였다. 그는 연방정부의 강력한 힘 보다는 각 연방의 자치권을 주장한 것이다. 정부는 연방을 대표하는 기관일 뿐 각 주의 권리를 보장해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지금의 스위스와 같은 연방 정부처럼 외교권과 같이 공식적으로 타국과 협상을 벌어야 하는 경우에만 정부가 나서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정 반대로 부딪힌 제퍼슨과 해밀턴은 미 정부에서 연일 대립각을 세웠다. 결국 해밀턴은 중앙 정부를 워싱턴 D.C로 옮기는 것에 합의를 하며 모든 주가 균등하게 빚을 나눠 갖는 것에 합의를 한다. 이 둘의 대립은 훗날 미국 양당 체제의 시초가 된다.
알렉산더 해밀턴과 토마스 제퍼슨의 대립은 오늘날의 미국을 바라보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해밀턴의 기본 기조는 '질서'와 '빠른 성장'이었다. 국가가 오랜 기간 존속하고 발전하기 위해선 기간 시설을 비롯한 공업 분야의 성장이 필수적이다. 19세기 초반의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에 갓 탄생한 열악한 시설의 국가였다. 국가가 정상 궤도에 오르기 위해 강력한 중앙정부의 힘을 바탕으로 사회 기반 시설을 많이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생각했다.
반대로 토마스 제퍼슨의 견해는 달랐다. 제퍼슨의 최우선 가치는 연방이었다. 각 연방의 권한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고, 중앙 정부의 힘을 약화 시켜 지방 분권적인 연방 체제 구축을 원했다. 사회 기반에 필요한 시설 역시 각 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제퍼슨의 견해였다. 그는 강력한 중앙 정부는 신대륙 정신에 어긋난 방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중앙 정부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이 정 반대 였기에 둘은 정치 생활 내내 정적으로 사사건건 정부와 국회에서 부딪혔다.
토마스 제퍼슨
해밀턴은 정치 경력을 빨리 시작한 만큼 그 끝도 매우 빨랐다. 그리고 그 끝도 매우 황당한 사건으로 마무리되었다. 해밀턴은 괴팍한 성격 답게 주위 사람들과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정반대 사상을 가진 토마스 제퍼슨은 물론이고,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와도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독립전쟁의 영웅 애런 버와 사이가 가장 좋지 못했다. 애런 버가 정계에 진출할 즈음 해밀턴의 장인도 같은 선거에 나와 둘이 맞붙게 되었는데, 이 때 애런 버가 승리하게 되었다. 이후 해밀턴은 공공연하게 버를 비난 했고, 버 역시 이에 응수하면서 둘의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애런 버가 민주 공화당 대표로 대통령 선거에 나가게 되었는데, 당시 정적이었던 토마스 제퍼슨과 맞붙게 되었다. 애런 버는 제퍼슨 보다 더 연방 정부에 힘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해밀턴에게 더욱 비슷한 성향의 후보는 애런 버 였다. 하지만, 해밀턴은 버를 극도로 싫어했고, 그는 버를 떨어뜨리야 된다는 목적 하나로 정 반대 성향의 제퍼슨을 지지하며 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연방주의자의 대표 해밀턴이 제퍼슨을 지지하자 제퍼슨은 손쉽게 대통령에 당선된다. 결국 버가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해밀턴이 이를 승낙하면서 전직 재무부 장관과 현직 부통령이 목숨을 두고 결투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결국 애런 버가 승리하게 되고 해밀턴은 버의 총에 맞아 그자리에서 즉사하게 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조지 워싱턴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준 사람, 그리고 초강대국 미국의 발판을 마련한 해밀턴은 47세의 나이로 허무하게 죽고 만다.
애런 버와 해밀턴의 결투
귀족 주의와 연방 주의로 신대륙 정신에 어긋난 사상가
해밀턴은 귀족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해밀턴은 직접민주주의는 국가 발전에 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국가의 권력이 시민들에게 돌아가면 실제로 정치 권력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이 커질뿐만 아니라 변덕이 심해 국가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 상원은 국민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귀족에 대표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즉, 국가 운영에 대한 능력이 있는 일부 시민들만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원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민주주의에 매우 어긋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당시에 이와 같은 생각은 매우 진보적인 생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귀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유주의다. 지금 처럼 전 국민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는 건 20세기에 일이다. 18세기 말 까지만 하더라도 절대 왕정이 서서히 무너지며 많은 나라들이 입헌 군주제나 공화제로 정치 체제를 전환하고 있을 시기였다.
다만 해밀턴의 귀족주의가 신대륙 정신에 맞는 지는 다소 의문이 든다. 미합중국은 여러 연방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다. 독립전쟁에 참여한 식민지 13개 주는 자신들이 같은 나라라는 인식을 안하고 있었을 시기다. 실제로 영국령 식민지였던 동부 지방은 독립을 이뤘지만 중부 지방의 프랑스 식민지는 여전히 프랑스의 간섭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각 주는 자치권을 보장받고 연방의 자율을 존중하는 것이 오히려 신대륙 정신에 더 근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최대 단점은 독단적 사고다. 비롯 그의 사상이 아무리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그는 주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만약 조지 워싱턴이 아니었다면 해밀턴은 미국 정치계에 등장하지도 못하는 괴짜 재야 학자로 전락했을 것이 분명하다. 뛰어난 정치가라면 자신의 사상을 국민들에게 잘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점에서 그의 행동은 미 대륙 발전에 정말로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본인 스스로만 똑똑한줄로만 아는 전형적인 독불장군이다.
실제로 그의 사상적 기반이 된 연방당은 몰락하고, 제퍼슨의 정당인 민주공화당은 살아남아 현 미국의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의 기반이 된다. 해밀턴이 아무리 미 정부의 사상적 기반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이 후대까지 전달되지 못한것은 주의에 사람이 많지 않아 자신의 사상을 타인에게 전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 준비 제도
미국 헌법과 경제 체제를 만든 건국의 아버지 중 한명
미국을 대표하는 지도자는 많지만, 미국의 제도적 기반을 만든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너나 할 것 없이 알렉산더 해밀턴을 꼽는다. 해밀턴은 미국이 지금의 헌법과 정치, 경제 체제를 이룩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조지 워싱턴이 영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며 미국인들을 하나로 모으고 있을 때, 해밀턴은 뒤에서 미국이라는 국가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설계도를 만든 사람이다. 그가 연방주의를 싫어하고 국민 개개인의 자유까지는 보장하지 못했지만, 그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하나의 미국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에이브러험 링컨과 더불어 하나의 미국을 만든 일등공신이다.
그리고 그가 강조했던 산업 확충이 훗날 미국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신대륙에서 유럽에 대항하기 위해선 유럽보다 뛰어난 공업 기술이 필수적이었다. 내수 산업이 발전해야 국가가 성장하는 것은 경제 체제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리고 해밀턴의 강력한 중앙정부는 미국이 경제호황을 누리는 데 사상적인 기반을 만들었다. 연방정부의 힘이 없었다면 미국은 20세기 까지도 연방 마다 노예제 찬반으로 나뉘어 언쟁을 펼치고 농업에만 집중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또 20세기 세계 대전 발발 할 때 무역 수익으로 큰 이득을 봤는데 중앙정부의 힘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해밀턴의 가장 큰 업적 중 한가지가 미국연방은행을 만는 것이다. 미국은 초기 유럽으로부터 산업을 보호해야했고, 이를 위해선 중앙은행의 역할이 중요했다. 만일 중앙 은행에서 보호무역을 실시 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질 좋고 값싼 제품들이 지속적으로 미국 경제를 잠식해 갔을 것이고, 미국의 내수 시장은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해밀턴은 중앙 은행을 설립하고 관세 보호 무역을 시작해 미국 시장을 보호했고 이는 내수 시장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된다.
미국 10달러 지폐의 알렉산더 해밀턴
총평
미국 건국 이전 유럽의 많은 사상가들이 자유주의에 대한 이론을 펼쳤다. 하지만 이 것이 실제로 정치 체제에 적용된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절대 왕정의 군주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놓고 공화정으로 전환할리가 없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이유도 앙시앙 레짐에 분노한 브르주아 계층의 폭발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사상적 기반으로부터 혁명이 일어나기 까지 수백년의 시간이 흘렀다.
반대로 미국은 비교적 자유주의가 뿌리내리기 쉬운 환경이었다. 미국엔 국왕이 없었다. 이전 정치체제가 없었기에 아예 백지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기존 유럽의 구 체제를 따라갈 수도 있었고, 아예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할 수도 있었다. 미국인들은 후자를 채택했고, 여기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해밀턴이다. 해밀턴은 도전했다. 아무도 가본적 없는 어려운 길이지만 그는 유럽의 다른 국가와 다른 새로운 길로 미국을 이끌어 갔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기꺼이 가는 도전 정신, 이것이 미국의 신대륙 정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미국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해밀턴이야 말로 신대륙 정신에 가장 입각한 정치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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