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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알 카다피



리비아의 근대화를 이룩한 유능한 지도자


VS


자국민 학살과 탄압을 자행한 냉혈한 독재자



  세계 대전 이후 유럽 열강의 시대가 끝나고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필두로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 시기에 많은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열망했다. 하지만 기존 기득권과 국민들 사이에는 각자 바라는 정치 체제가 달랐다.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제3세계에선 군사력을 기반으로한 독재 정치 체제가 들어서게 된다.


  지금 알아볼 리비아와 무아마르 카다피 역시 마찬가지였다. 리비아는 세계 전쟁 당시 북아프리카 전역의 주 무대로, 이 기간 나라가 크게 쇠퇴했다. 하지만, 석유붐과 더불어 리비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손에 꼽히는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군사 쿠데타를 통해 카다피가 리비아의 총리에 오르면서 리비아에 카다피의 시대가 오게 된다. 카다피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리비아의 근대화를 이룩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하기도 했다. 오늘은 아직도 평가가 극명하기 갈리는 카다피에 대해 알아보자.



주요 활동


  • 1942년 6월 7일, 이탈리아령 리비아 사르테 출생

  • 1963년, 리비아 대학교 졸업 이후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

  • 1969년 9월 1일, 육군 중위로 복무할 당시 장교들과 군사 쿠데타 실시

  • 1970년 리비아에 총리, 국방장관 직에 오름

  • 1980년 시리아와 합방을 추진했으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부산

  • 2009년 아프리카 연합 의장직 수행

  • 2011년 카다피 정권에 반발한 반정부 시위 발생

  • 2011년 10월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NATO와 시민군에 의해 사살



리비아 위치



생애 및 업적


  그는 1942년 세계 2차 대전이 한창일 당시 리비아에서 태어났다. 유목민인 배두인족의 일파 카다파 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카다피 역시 이 부족이름에서 따 온것이다. 부족의 전통에 따라 그는 어려서 부터 철저한 이슬람 교육아래서 자랐다. 전쟁 직후라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그였으나 출세에 대한 열망은 대단했다고 한다. 특히 그가 10살인 1952년에 이집트에서 가말 나세르가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게 된다. 이를 본 어린 소년 카다피는 많은 걸 느끼게 된다. 이집트 처럼 아랍 민족주의를 이룩하고 기독교 사회에 대항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3년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는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 그는 학교에서 자유 장교단을 조직하면서 동료 생도들과 왕정을 타도하기로 힘을 모은다. 1965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1년 간 파견근무를 위해 영국으로 가게되었는데 이 시기에 영국의 선진 문물도 배우게 된다. 그의 보직은 통신부대 장교였다고 한다.


  리비아는 1950년대 엄청 가난한 나라였다. 20세기 중반에 와서도 유목과 수렵생활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60년대에 들어서는 전세계 석유 붐이 불면서 리비아에 기회가 찾아온다. 막대한 석유 수입을 벌어들인 리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강국으로 순식간에 바뀌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부의 재분배였다. 여전히 왕정 체제를 고집하고 있던 리비아는 대부분의 석유 수입이 왕정으로 가고 시민들에게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게다가 리비아 왕정은 부정부패가 심할 뿐만 아니라 친미 성향을 보이고 있어 시민들의 불만이 많았다. 어린시절 유목민 출신이었던 카다피는 이런 국가의 경제 체제를 보고 왕정을 무너뜨리고 리비아를 공화국으로 바꿀 생각을 하게된다.

  1969년 육군 대위로 복무중이었던 카다피는 동료 장교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리비아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했다. 당시 국왕이었던 이드리스 1세는 터키에 체류중이었다. 부정부패와 민심을 잃은 왕정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카다피는 단한차례의 전투도 없이 트리폴리에 무혈 입성한다. 이드리스 1세는 터키에서 퇴위당하고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그는 이집트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고 1971년 11월 리비아 인민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는다. 27세에 무혈 쿠데타를 성공시킨 카다피는 리비아 공화국의 출범을 선포했고, 최고 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의를 설립하고 의장에 오른다. 청년 카다피 대위는 순식간에 리비아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


  1970년 카다피는 리비아의 총리와 국방장관을 동시에 겸한다. 카다피의 취임 초기는 이슬람 사회주의와 반미주의 2가지로 요약된다. 1972년부터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카다피는 국가를 엄격한 이슬람 규율에 의해 통치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국민들에게 음주를 금지시켰다. 리비아가 세계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트리폴리라는 도시를 두고도 관광 산업이 발달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있다. 그리고 이슬람 국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 서구 세력과 대항하려 했다. 1972년 이집트, 시리아와 함께 아랍 공화국 연방을 구성하기로 합의 했다. 하지만, 중동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아랍 연방은 해체된다.

  또한, 반미주의 역시 그의 상징 중 하나다. 카다피는 리비아에 있던 미군 기지들을 철수시키고 식민지 시절부터 눌러 앉은 이탈리아 인들도 전부 축출한다. 막대한 석유 수입에도 부의 재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미군 기지나 서구 세력이 여전히 리비아 내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랍 지역의 주요 산유국들과 협의하여 석유값을 인상하는데 동의한다. 제 1차 오일쇼크가 발생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카다피다. 이 일을 계기로 미국 정부와 카다피는 크게 틀어지게된다. 서구의 간섭을 받고 있던 제3세계의 운동에도 적극지지 했다. 짐바브웨, 우간다, 말리, 앙골라등 아프라카의 많은 약소국을 지원하면서 리비아가 이집트와 더불어 아프리카의 패자가 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미국,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를 적극 지원하면서 미국과의 악연이 시작된다. 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카다피는 리비아가 부를 축적하는데 큰 공을 세우며 성공적으로 집권 초기를 마친다.


  1980년부터 리비아는 미국과의 엄청난 갈등을 빚는다. 카다피는 지속적으로 제3세계의 대미 테러를 적극 지원했다. 참다 못한 미국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은 카다피에게 최후 통첩을 날린다. 1986년 레이건은 리비아에 항공모함을 보내 리비아 공습을 기획한다. 1986년 4월 영국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리비아의 주요 시설을 공략하면서 리비아에 대한 폭격이 진행된다. 이 일이 미국과의 악연이 끝이 아니었다. 1988년 영국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팬 아메리카 항공 103편이 리비아 테러집단에 의해 폭파되었다. 레이건은 카다피에게 당장 테러 용의자를 미국으로 인도하라고 말했지만, 카다피는 레이건의 요구를 무시했다. 레이건은 카다피를 '테러리스트', '아프리카의 미친 개'라고 비난했다.

  그는 미국에 도움되고 아랍 사회에 피해가 가는 일이 있으면 압장서서 말렸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란-이라크 전쟁을 막기 위해 힘썻다. 그는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과 이란의 루훌라 호메이니에게 사람을 보내 서방의 이간질로 인해 발생된 전쟁이므로 당장 싸움을 중단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은 터졌고, 그는 어느쪽의 편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과의 분쟁을 통해 리비아는 많은 피해를 입고 테러 행위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공습을 기획할 만큼 리비아는 미국에게 매우 귀찮고 껄끄러운 상대였던건 확실하다.

  

UN총회에서 연설중인 카다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혈기왕성했던 카다피도 유순해 진것인지 서방 세력과 화해를 시작한다. 미국에서 자신을 언제 암살할지 몰랐고, 미국의 대항하기 위해 소련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소련이 붕괴 되면서 미국에 대항할 동력을 잃은 것도 한 몫을 했다. 미국의 리비아 경제 제재 활동에 대항하기 위해선 소련의 힘이 컸다. 9.11 테러 이후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 아프리카에서 슬슬 일어나고 있는 민주 혁명의 바람으로 카다피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카다피는 이라크와 국교를 단절하고 서방 세계에 대한 반대 정책을 일절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듬해 리비아와 미국관의 외교 관게가 복원되고 미국 역시 이에 맞춰 리비아를 테러지원국에서 삭제한다. 2008년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역시 트리폴리를 방문하여 양국의 화해를 진전시켰다. 이탈리아와의 관계 개선도 이루어졌다. 카다피가 과거 이탈리아인들을 추방한 것을 사과했으며, 이탈리아 역시 과거 리비아를 식민 통치 한것에 대한 사과를 했다.


  이렇게 훈훈하게 카다피의 말년이 끝났으면 다행이었겠지만, 2011년 튀니지에서 발생한 재스민 혁명과 42년간의 기나긴 독재는 카다피에게 서서히 종말의 그림지가 드리우게 되었다. 벵가지 주변에서의 시위를 시작으로 반 카다피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졌다. 튀니지는 물론 이집트 등 전 아랍권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게 되며 리비아 역시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의 도가니 속으로 빠지게 된다. 이런 와중 2월 22일 국영 TV를 통해 자신은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이며 국가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인터뷰를 했다. 이 발언은 시민들의 화에 기름을 붓는 발언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카다피는 시민군에 대항해 내전을 선포하며 제1차 리비아 내전이 발생한다.

  카다피는 반정부 시민군을 대상으로 전투기를 동원하며 대대적으로 폭격을 가했다. 국가 지도자가 대놓고 국민들을 사살하니 평화적으로 시위가 진행될리 없었다. 정부군과 반정부군은 리비아를 놓고 치열한 혈전을 벌인다. 하지만 범 아랍권의 민주화 열풍을 막기란 쉽지 않았다. 시민군은 리비아 동부지역을 장악하고 수도인 트리폴리로 돌격했다. 카다피는 또 다시 공군 병력을 가동해 시민국에 폭격을 지시했다. 결국 시민군은 연전 연패를 하며 정부군의 승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카다피는 정전을 선언했지만 다음날 다시 시민군을 폭격하며 국민을 대상으로 뒷통수를 제대로 때리며 전쟁을 끝내려 했다.

  민간인 학살이 우려되자 국제 사회가 나서게된다. UN 안보리에서 리비아에 무력 개입을 승인하게 된다. 이전부터 리비아를 좋게 보지 않았던 프랑스와 미국의 동맹국인 영국도 참전을 약속했다. 특히 북대서양 조약기구 NATO가 리비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들은 항공모함을 파견하며 리비아 사태에 개입했다. 이 것이 바로 '오디세이 새벽 작전'이었다. 전선이 잠시 교착상태에 빠지기도 했지만 전쟁을 오래가지 못했다. 8월에 이르러서 트리폴리가 시민군에 의해 함락되고, 카다피는 자신의 고향인 시르테로 도망간다.



리비아 내전




  시르테에 있는 카다피는 최후를 예견했다. 그의 측근들이 타국으로 망명을 가자고 제안했으나 카다피는 이를 거부했다. 시르테는 시민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나토 역시 지속적으로 시르테를 공습하여 카다피를 추적했다. 나토의 추적으로 카다피는 인터넷과 전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르테의 정부군을 독려하기 위해 시리아 방송을 통해 위성전화로 메세지를 보냈는데, 이 전화로 나토의 정보망에 카다피의 위치가 발각된다. 결국 숨어있던 집에 포탄이 떨어지며 카다피는 탈출은 시도한다. 카다피는 원래 어두운 새벽 3시에 몰라 빠져나갈려고 했으나 친위대의 집합이 늦어져 아침 8시가 되서야 탈출을 시도한다.

  결국 10월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도주중 나토군에 의해 붙잡히게 된다. 이미 이들은 전투기를 통해 카다피의 위치를 짐작한 상황이었다. 카다피는 배수관을 통해 끝까지 도주하려고 했지만, 배수관에도 시민군이 숨어있었다. 결국 걸을 수 없는 상태로 붙잡힌 카다피는 시민군에게 생포되어 병원으로 후송되고 있었다. 하지만 분노한 시민군 한명이 그의 머리에 총을 쐇고 카다피는 병원으로 가기 전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된다. 42년이라는 엄청난 세월을 통치했던 카다피는 결국 한명의 시민군에 의해 사살 그의 사살 장면은 방송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에게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와 청년 카다피




리비아의 근대화를 이룩한 유능한 지도자


  독재의 정당성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그의 정치력만 놓고 본다면 카다피는 분명 꽤나 유능한 지도자에 속하게 된다. 실제로 그는 영국에서 선진 문물을 경험한 유학파 엘리트였다. 왕정 리비아 시대에는 더더욱 해외 유학이 힘들었을 시기였는데, 영국 파견 경험은 그에게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의 문화를 경험하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이후, 석유 판매로 큰 재미를 봤다. 리비아는 석유로 벌어들은 돈을 기반으로 곳곳에 학교를 건설해 시민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고, 병원을 짓고 최저 임금을 향상 시켜 시민들의 생활고를 해결했다. 왕정 시절 90퍼에 달했던 문맹 비율을 10퍼센트 대로 낮춘 것은 그의 최대 공로이다. 

  또한 공업 및 사회기반 시설 발전에도 큰 관심이 있었다. 국가 시설 확충을 위해서는 엄청난 건설 인력이 필요하다. 카다피는 7~80년대에 우리나라의 기업들에게도 많은 일감을 주었다. 특히 LG가 리비아 건설을 통해 큰 재미를 봤다. 이런 점으로 카다피가 우리나라에서 반미 주의를 주장한 독재자 이면서도 이미지가 나쁘지 않은 이유다. 서방세계에서는 비난을 받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엔 정말 큰 도움이 된 인물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미국의 우방 국가라고 대놓고 적대심을 표출한 다른 반미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들에게 필요하면 언제든지 손을 내밀며 외교적 고립을 피했다. 이런 점들이 미국의 경제 제재에도 꽤나 오랜 시간 버틴 원동력이 된다.


  이슬람 사회주의를 주장했지만, 이슬람 극단주의자는 아니었다. 본래 이슬람이 타 종교에 대해 굉장히 배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이 점을 감안한다면 그는 꽤나 개방적인 지도자다. 이슬람에서 여성은 굉장히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 카다피는 여성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굉장히 진보적인 정책을 자주 실시했다. 다만 이슬람 율법에 따라 술에 대해서는 엄청난 반대를 했는데, 세게에서 손가락안에 드는 관광지 트리폴리를 두고도 리비아의 관광 사업이 발달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여담이지만 필자 역시 리비아 내전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화 된다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가 트리폴리다. 

  굉장히 의외인 사실이지만, 2004년 한창 북한이 핵문제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을 때 카다피는 북한에 특사를 파견하여 북한의 핵 포기를 설득하기도 했다. 2006년에는 한명숙 총리와 만나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직접 발벗고 나서기도 했다. 80년대 한국의 많은 건설업체들이 리비아에 큰 도움을 준 인연이 꽤나 오래 이어지게 된 것이다. 2010년 국정원 요원이 리비아에서 첩보 활동을 벌이다가 발각되었다. 이 사건으로 우리나라와 리비아 사이의 국교가 단절될 뻔 했으나, 다행히도 양국의 특사가 트리폴리에서 만난 이후 카다피는 해당 사건을 종료시키기 양국간의 외교를 원상복귀 시켰다.


  카디피는 확실히 다른 이슬람 지도자들처럼 꽉 막힌 스타일은 분명 아니었다. 기본 이념은 이슬람 사회주의와 반서구 정책을 펼치면서 기본 정책 기조는 다른 지도자들과 다를바가 없었으나 세부적으로 들어가자면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행위는 안했다. 필요하다면 한국과 같은 우방 세력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조지 부시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자 한발 빼며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리비아를 아프리카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그의 지도력 하나는 분명 인정할만하다.

  말그대로 좋은 지도자는 아니지만 카다피는 유능했다. 이슬람 통합에 힘썻으나 여기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통합된 아랍을 말해도 자국이 우선이었다. 말년에 행보가 문제지 집권 초기와 중기에 그가 리비아를 성장 시키고 국민들의 지적 수준을 높였으며, 국가 산업도 대거 확충했다. 그는 말그래도 전형적인 유능한 독재자 스타일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카다피




자국민 학살과 탄압을 자행한 냉혈한 지도자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그는 분명한 독재자다. 독재는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있다. 아무리 국가를 위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무력으로 권력을 빼앗고, 자신이 설계한 방법으로 독재를 이어나간 냉혈한 지도자였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카다피라는 인물은 중세, 근세의 왕정 사회의 지도자가 아닌 20세기 후반의 민주 사회의 지도자의 잣대로 봐야한다. 현대의 지도자에게 있어 민주주의 수호는 매우 중요한 평가기준이다. 단지 그가 능력이 있었다고 그의 민주주의 가치 훼손이 정당화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민주주의 가치 훼손은 결국 자국민 탄압과 학살로 이어지게 된다. 그가 가장 비난을 받는 행보가 바로 말년에 시민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일이다. 심지어 무기가 열악한 자국민을 상대로 공군을 동원해 제압한 것은 정말 아무런 변명거리가 없는 최악의 실책이었다. 심지어 트리폴리가 함락이 된 와중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생존을 위해 자신의 고향으로 도주했다. 다른 군부 독재자들이 대부분 시민을 탄압하더라도 최후에 와서는 민주화를 선언하고 타국으로 망명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끝까지 싸웠다. 다른 독재자들 보다 권력욕이 더하면 더했지 절대 약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과 화해를 하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리비아는 항상 테러지원국 명단에 있었다. 로날드 레이건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에게 인격적인 비난을 공개적으로 했을까. 반미 동맹이라는 명분하에 다른 제3세계의 테러 국가들을 지원하면서 자국민이 아닌 타국민까지도 죽음으로 몰아간 악날한 지도자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국에서 핵실험을 진행했다. 2003년 카다피가 핵실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기 이전까지 그는 수차례 핵실험을 자국에서 자행한 전쟁광이다. 전세계가 핵 줄이기에 몰두하고 더이상의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많은 나라들이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 그는 시대를 역행하는 흐름을 지속적으로 보여왔다.

  게다가 그는 다른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매우 세속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여성편력도 굉장히 심했고, 물질적인 욕구도 상당했다. 항상 처녀 보디가드를 자신의 주위에 두었다고 한다. 게다가 내전 당시 국왕군에게 시민군 여성들을 강간하라고 지시하는 걸 보면 이 지도자가 제정신이 있었는지 조차 의문이다.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공개된 카다피 최후의 모습



총평


  분명히 국가를 이끌 만한 능력이 있던 지도자는 맞다. 세계의 흐름을 생각하지 말고 자국민의 이득만을 생각한다면 그는 매우 놀라운 성과를 보여줬다. 특히 국제정세를 읽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석유 산유국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주변국가와 담합하여 자국의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기독교 서구 세력과 대항하기 위해 아랍과 아프리카 국가들과 긴밀한 공조 관계를 주고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의 힘을 적절히 이용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의 힘이 더욱 거대해지자 미국의 편을 적절히 들고, 원래부터 사이가 안좋았던 빈 라덴 축출에도 미국에 도움을 주면서 외교적 고립을 벗어났다. 그가 42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의 독재가 가능했던 건 모두 이런 외교적 센스가 빛을 본 것이다.

  

  그만큼 명과 암이 분명했다. 테러 지원과 민주주의 훼손은 그가 절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테러와 자국민 탄압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쌓아온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숭고한 가치를 스스로 걷어차는 것이다. 아무리 의도가 좋다 한들 그 어떤  독재 체제든지 인정하는 순간 자유는 무너지는 것이다. 절대 그의 행보는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를 인정하면 우리가 비난하는 북한의 세습 정책을 비난한 명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간신히 얻어낸 민주주의 아닌가. 


  그가 7~80년대 국가를 발전시키고 스스로 물러났으면은 리비아 최고 지도자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남아서 리비아를 통치하는 모습을 추함을 넘어 정말 악날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약소국 리비아는 카다피라는 지도자를 필요로 했고, 개발도상국 리비아는 더이상 카다피라는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는 리비아 시민들의 행동으로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역대 대통령들에게 강도 높은 비난을 하고 있는 것도 우리나라의 수준이 그만큼 높아졌으면 해서 나오는 행동이다. 지도자가 국가를 만든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나라를 만드는 건 국민들이다. 카다피같은 지도자를 인정하면 그나라의 수준이 그정도 인것이다.


  지도자는 그 나라의 수준과 품격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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