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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쟁한 고려의 신하
VS
권력의 정점에서 고려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간 겁쟁이
고려는 1270년 원종이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 시점부터 공민왕이 집권하게 되는 1351년까지 무려 80여년의 세월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몽골의 지도자 징기스 칸은 자신들의 영토를 전세계 전역으로 넓히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고려 역시 그들의 정복 대상이었다. 징기스 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 칸은 자신의 부장 살리타와 여진족과 고려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만주와 한반도로 남하하게 된다. 이것이 1231년 시작된 고려와 여몽의 끝없는 전쟁, 여몽 전쟁의 시작이었다.
고려 국왕은 고종이었지만 무신 시대를 지나고 있던 고려의 실권자는 최충헌의 아들 최우였다. 무신 시대가 장기화되면서 그들의 권력도 점차 고착화 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최우는 국가의 정점에서 고려를 쥐락펴락하며 한반도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던 와중 오고타이의 고려 침략 소식을 들은 최우는 이제 몽골과 전쟁을 할지, 그들에게 항복할지 선택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주요 활동
1166년, 고려의 신하 최충헌의 아들로 출생
1170년, 이의민, 정중부 등의 주도 하에 무신정변이 일어남
1196년, 아버지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무신 정권의 지도자가 됨
1211년, 최충헌에 의해 희종이 폐위되고 고종이 새로 고려 국왕으로 즉위
1219년, 최충헌의 사망으로 권력을 이어 받아 무신 정권의 새 지도자로 등극
1225년, 자택에 정방을 설치하여 고려의 인사권 장악
1231년, 몽골의 지속되는 금품 요구로 인해 고려와 몽골사이의 전쟁 발발
1232년, 고려의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
1243년, 전쟁이 한창인 와중 국자감을 설치하고 대장경판을 제조함
1249년, 고령의 나이로 인한 급사, 아들 최항이 새로운 무신 정권 집권자로 등장
생애 및 업적
최우는 1166년 태어났는데, 당시 아버지 최충헌은 가문 배경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음서제도를 통해 중앙관직을 하고 있던 많은 조정의 신하 중 한명이었다. 무신 정권이 일어나기 직전이라 당시만 하더라도 문신들이 권력이 더 강했다. 그가 어릴때 일어난 무신정변으로 조정 권력의 힘이 문신에서 무신으로 완전히 기울게 되고 최충헌 역시 무신 측에 발빠르게 몸을 담구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최충헌이 바로 권력이 중심으로 간건 아니었다. 당시 무신 정권의 지도부였던 이의민과 정중부의 눈에 들기 위해 지방 관직도 마다하지 않으며 떠돌이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와중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의 하인이 최충헌의 동생 최충수의 집에서 키우던 비둘기를 훔치게 된다.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하자 이지영은 오히려 최충수의 볼기를 때리며 그를 감금시켰다. 집으로 돌아온 최충수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고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과 세 아들을 죽이자고 제안을 한다. 1196년 최충헌은 별장에서 쉬고 있던 이의민을 습격해 목을 베고 궁궐에 있던 세아들 모두 죽였다. 그 외에도 이의민의 최측근이라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목숨을 잃었다.
최충헌의 권력은 1196년부터 그가 사망하게 되는 1211년까지 이어졌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만큼 그는 정적도 많았고, 지방에선 반란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최충헌의 반대파는 수시로 그의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최충헌은 집권 기간동안 반대파의 저항에 계속 맞서 싸웠다. 특히 고려의 국왕이었던 희종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희종이 신임하던 내시 왕준명이 중심이 되어 최충헌의 암살시도를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반대급부로 희종은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고 고종이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최충헌
최충헌에게는 두명의 아들이 있었다. 바로 장남 최우와 차남 최향이었다. 최충헌은 두 아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권력을 나눠가지길 바랬이나 늘 그렇듯 권력의 정점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이다. 자신의 사망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끼던 최충헌은 두 아들을 불렀지만, 최우는 아버지의 부름을 무시했다. 당시 차남이었던 최향이 장남 최우보다 더 높은 벼슬을 하고 있었기에 그는 매우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최우가 먼저 선수를 최향을 죽이게 되고 결국 권력은 최우에게 이동하게 된다.
권력에 오른 최우는 국왕을 안심시키고 반대파에게 회유책을 실시했다. 자신은 아버지와 다름을 계속 내비쳐야 자신의 권력을 오래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가 축재한 많은 재산을 국왕에게 바치고 지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많은 토지를 되돌려주기도 했으며 재야의 인재들을 대거 등용했다.
고려에 새 시대가 올 것임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최우가 집권을 하자마자 바로 몽골은 조선에게 바로 금품을 요구했다. 고려는 왕조 500여년의 왕조 기간 내내 이민족과의 싸움이었다. 10세기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 족과 투를 벌였고, 11세기에는 여진족과 싸우더니, 12세기에는 몽골의 침입을 겪는다. 몽골의 금품을 요구한 빌미는 당시 몽골과 고려는 힘을합쳐 거란족을 몰아냈다. 우선 눈앞의 공동에 적을 처리했어야 하므로 여기까진 큰 문제가 없었는데 몽골은 이에 대한 대가로 막대한 양의 금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1225년 고려와 교섭을 하기 위해서 보낸 사신 저고여가 고려 국왕을 만나고 귀국하던 도중에 자객에게 피살당한다. 당시 저고여는 1년전 고려가 몽골에게 보낸 공품을 고려 국왕이 보는 앞에서 내팽겨치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당시 받은 공품이 맘에 들지 않는 다는 표현이었다. 이런식으로 몽골 사신들은 고려에 와서 아주 무례한 행동을 보여줬다. 그런 행동을 하고 돌아가는 길에 사신 저고여가 피살당하자 몽골 사람들은 분노한다. 고려 측에서는 금나라의 수행이라고 주장했지만 몽골 사람들이 이를 믿어줄리 없다. 양국간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면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수많은 몽골의 대군이 한반도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잘막았으나 세계를 정복한 몽골의 기마병을 고려가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고려의 실질적 지도자 최우는 이제 선택에 놓이게된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개경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돌아가서 몽골과 끝까지 싸울 것인지, 혹은 자신의 권력을 내려 놓고 몽골과 화친을 맺어야 했다. 최우의 선택은 당연히 권력 유지였다. 그는 조정 신하와 국왕을 모두 모아 놓고 강화도 천도를 주장했다.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자 몇몇의 신하들을 참수시키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했고 결국 1232년 개경에서 몽골의 기마병이 활약할 수 없는 강화도로 천도하게 된다.
저고여 살인사건 (출처 : KBS-역사채널)
조정이 백성을 버리고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강화도로 도피하자 백성들도 크게 분노하게 된다. 몽골의 침입만으로도 버거운데 한반도 곳곳에서 반란이 이어지게 된다. 몽골과 전쟁을 준비한답시고 세금은 다 빼앗아 갔으면서 정작 몽골군이랑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화도로 조정이 도망치자 백성의 국가에 대한 지지도는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우와 고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강화도에 고종이 살 궁궐을 짓는데 노력한다. 그리고 전시에 놓인 고려의 인사권을 장악하고자 자신의 사택에 정방이라는 기구를 설립해 고려의 인사권 전부를 장악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전국의 장정들을 징발해 강화도의 방어를 위한 노동력으로 사용하고, 자신의 사병집단인 도방을 결성하게 된다.
강화도로 조정을 옮긴 것에 분노한 몽골은 지속적으로 고려를 공략했다. 기존의 적장이었던 살리타는 김윤후에 의해 사살되었고 새로 탕우타이가 이끄는 군대가 고려에 내려온다. 지금의 강화도를 보면 알겠지만 강화도는 수비하기에 정말 좋은 지대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과 지척인데다가 위로는 예성강, 아래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아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일 뿐만 아니라 물살이 매우 쎄기에 선박의 접근이 어렵다. 게다가 섬의 크기가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식량을 조달하기에도 나쁜 조건이 아니다.
몽골 군 역시 이점을 잘 알았고, 그들은 강화도를 공략하기 보단 자신들의 기마병을 이끌고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앞장섰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은 더 커졌다. 유일하게 삼별초만이 몽골군을 막기위해 힘쓰고 있었다. 민심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백성들은 더이상 고려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최우와 고려 측은 왕자 영녕공 왕준을 인질로 몽골에 보내어 화친을 시도 했다.
강화도 고려 궁지
최우와 고려 조정은 몽골의 침입이 없던 1243년 강화도에서 국자감을 만들고 쌀 300곡을 창고에 넣어두었다. 정말 강화도에서 나갈 생각이 없다는 걸 온 국민에게 보여주었다. 최우는 이 떄 벌어들은 수익으로 몽골군을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고종과 함께 매일 같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국고를 탈탈털어 군량을 확보하고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할 생각은 안하고, 기생들고 재주꾼들에게 금을 나눠주었다.
1947년, 다시 몽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몽골은 이번에 고려에게 완전히 항복을 받아낼 생각으로 강화도 공략에 대한 계획을 짜놓았다. 하지만 하늘이 고려를 도왔는지 아니면 반대로 저버렸는지 오고타이 칸에 뒤를 이어 왕이 된 귀위크 칸이 갑작스럽게 병사하게 되었고, 이번에도 몽골은 강화도 공략을 성공하지 못한채 돌아가게 된다. 이때를 비롯해 몇십년 뒤에 벌어질 사건을 보아 몽골은 섬과 많은 악연을 갖게된다.
어찌되었든 또 한번 최우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사치와 향략생활을 계속 이어간다. 그러던 중 1249년 11월 최우가 갑작스럽게 병사하게 되면서 무려 50여년간의 최우 시대가 끝나게 된다. 고려 왕조의 역사가 500여년인것을 감안하면 최우가 고려를 지배했던 시기가 무려 10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엄청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중 30여년은 몽골과의 전쟁을 수행한 셈이니, 어쩌면 일제강점기를 제외한 한국사 최대의 혼란기가 이때였을지도 모른다.
징키스 칸의 셋째아들, 오고타이 칸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쟁한 고려의 신하
조선은 사대부가 오랜 기간동안 권력의 중심층으로 활동한 반면 고려는 항상 지배 계층이 바뀌었다. 고려 초기엔 지방 호족들과 그들이 중앙으로 오면서 생긴 문벌귀족들이 중심 권력층으로 나타났지만, 거란과 여진의 장기간의 침공과 이자겸, 묘청의 난이라는 굵직한 사건을 겪으면서 문벌귀족들이 쇠퇴하고 무신 정변을 통해 무관 신하들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만큼 무신 정권의 지배자들은 빈약한 정통성이라는 약점을 늘 안고 시작했다. 지난 시간에도 그랬듯이 권력 유지에 있어 명분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빈약한 명분은 항상 권력의 아킬레스건이 되기 마련이다.
최우는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비교적 이런 아킬레스건에서 자유로웠다. 아버치 최충헌과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최우가 오랜기간 권력을 잡을 수 있는데에는 최충헌의 대숙청이 큰 역할을 한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후 최우의 행보 역시 백성들과 조정 신하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집권 초기에 최우는 회유책을 사용했다. 최우 본인 역시 글을 잘 썻다고 전해지며 이로 인해 문신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집권하자마자 문신들을 대거 등용했다. 아버지의 재산을 국고로 사용하면서 조정 신하들에게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공포 분위기만을 조성했던 이전에 무신 정권 집권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방식을 사용한 점은 긍정적인 요소이다.
최우의 강화도 천도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도 크지만 이로 인해 고려의 왕조는 지켜낼 수 있었다. 만약 천도하지 않고 개경에 남았더라면 순식간에 몽골군에 의해 고려 왕조가 끊겼을 지도 모른다. 왕이 잡힌다는 것은 전쟁의 패배를 의미한다. 게다가 당시 몽골군은 유라시아 대륙의 70퍼센트를 집어삼킨 대제국이다. 시대적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 초강대국인 미국보다도 더 공포의 존재였을 것이다. 몽골과 한반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최우가 미리 강화도로 천도를 안했으면 고려는 그 순간 국운을 다할 것이고, 원나라에 속하는 참단함 결과를 나아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재여부도 장담할 수 없을 상황에 놓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강화도에서 했던 정방 설치 역시 정상적인 국가 운영을 위한 행동이었다. 이미 몽골에 의해 정치, 사회 체제는 완전히 무너졌는데 강화도에 있는 정부라도 인사 체계를 정립하면서 국가를 운영했어야 몽골에 대항할 힘이 생긴다. 아무리 삼별초가 한반도 곳곳에서 게릴라 전을 펼친다 하더라도 비조직적인 저항은 한계가 존재한다. 조정에서라도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몽골에 대항할 힘을 서서히 쌓았어야 하기에 최우의 강화도 정부에서의 일련의 행동을 권력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만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
삼별초의 항쟁
권력의 정점에서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간 겁쟁이
선조는 왜군이 침입하자 궁궐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갔다. 이승만은 공산당이 침입하자 서울을 버리고 낙동강 이남으로 도망갔다. 최우도 몽골이 침입하자 강화도로 도망갔다. 적이 올때마다 이런식으로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리더를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세명의 리더한텐 책임감을 눈씻고 찾아 볼 수 가 없다. 다행히 백성들이 똘똘 뭉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 간신히 나라를 지켜내서 다행이지, 만약 위 세 전쟁에서 국가를 빼았기는 참사가 일어났다면 가장 먼저 책임 소재를 물어야 할 것 저 세명이다. 도대체 그 권력이라는 게 무엇이라고 자신의 권력을 놓치기 실어 국가를 버리고 도망을 간단 말인가. 그러면서 항상 백성들과 병사들에게 충성심만을 강요하니 한반도 역사 내내 군대에 대한 대우는 개판을 치고 천여년동안 군역의 폐해와 방산비리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거 일지 모른다.
그리고 최우 주도하에 결성된 삼별초가 여몽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허나 삼별초 결성은 최우의 궁여 지책이다. 최우는 애초에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강화도로 이전하지 않았다. 일단 몽골 부대가 당장 쳐들어 온다니 도망은 가야겠고, 가장 가깝고 몽골의 수군에 약점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강화도로 가긴 갔는데, 몽골을 막아낼 도리는 전혀 없었다. 가뜩이나 한반도 전역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뭐라도 안하면 안되었기에 자신의 사병과 기존의 야별초를 합한 삼별초를 결성해 한반도에서의 게릴라 전을 지시했다. 그리고, 게릴라 전은 늘 그렇듯 한계가 있다. 게릴라전은 전술적으로 매우 훌륭한 작전이다. 적의 진군을 지연 시키는데 최적화된 전술인데, 몽골군의 침입을 지연시키면 뭐하나. 이들을 근본적으로 몰아낼 방도가 전혀 없는데.
삼별초로 몽골의 침입을 지연시켰으면 강화도에서 몽골에 대한 반격을 준비해야 하는데 최우는 허구헌날 고종과 연회를 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살아갈 날이 얼마 안남아서 였는지, 아니면 통일신라의 경애왕처럼 어짜피 망한나라 욜로족처럼 놀자는 건지, 최우는 한반도에서 거두어 들인 세금으로 연회를 여는데 온 힘을 쏟았다. 본토에서는 백성들이 몽골군에 의해 죽어가는데, 강화도에서는 매일같이 술판이 벌어졌다. 여몽전쟁으로 고려 백성 20만여명이 죽어가는데, 고종과 최우는 술마시고 기생들과 놀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 와중에 법력을 키워서 몽골군을 막겠다고 대장경을 만들고 있었다. 물론 팔만대장경 처럼 거란을 법력으로 막겠다고 집필해 우리나라에 엄청난 문화적 유산을 남긴 케이스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는 민간에서 주도를 해야 할 일이지 국가 최고 권력자가 법력을 쓴다고 대장경을 만들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하다. 대장경 하나를 편찬하는 것보다 고려 병사들을 위한 군량을 확보하고 무기를 만들어야할 시점에 돈을 허튼데 썼다. 국고의 낭비와 황페화된 국토로 고려는 더이상 몽골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하게 되고 80여년간의 몽골 강점기가 시작된다. 일제강점기가 현시점과 아직 가깝고 강점기를 겪은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그렇지, 사실 한반도 최고의 흑역사는 이 시기였다.
드라마 '무신'에서의 최우 (출처 : MBC 무신)
총평
능력 없는 사람이 아버지 덕에 최고 권력자에 올라서, 아무런 계획 없이 강화도로 천도하더니, 생각 없이 놀자판만 벌이다가 죽었다. 한반도 지도자중 무능력 순위를 매긴다면 최우 역시 상위권에 들어가는 데 손색이 없다. 고려 역사 자체도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고 이 중에서도 역사시간에 잘 안배우는 원간섭기라서 최우의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렇지 최우 역시 꽤나 무능하고 능력없는 사람 중 한명이었다.
거기다가 시대도 잘 못 타고났고 쓸데없이 장수했다는 것도 고려를 망치는 데 한몫 했다. 사실 평화로운 시기의 무신 집권기였으면 최우의 평이 이정도로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몽골의 칩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을 때는 많은 사람들을 등용했다. 심지어 사대부까지 등용했는데, 하필 여몽전쟁이 발발하며 최우의 평은 바닥을 치게 된다. 능력없는 사람이 90살 가까이 살았으니 고려에게 이렇게 큰 손해가 또 있을까.
최우에 대한 한줄 평은 전형적인 간신배이다. 정말 자신의 권력, 그리고 하루하루 어떻게 하면 더 재밌는 연회를 열지에 대한 고민을 하며 지낸 사람이다. 리더의 깜냥이 전혀 아니었다. 문제는 이렇게 인지도가 없는 고려 최장수이자 최고 권력자 최우가 거의 유일하게 주인공이었던 드라마 무신에서 상당히 미화되었다는 점이다. 고려 멸망이 큰 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해당 드라마로 인해 미화되어 사람들에게 소개되었다는 점이 참 아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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