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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능력으로 새시대를 연 만능형 군주 VS 비열한 방식으로 한족의 위기를 연 한 왕실의 역적


  중국 고대국가중 가장 융성했던 한나라가 멸망하고, 수나라가 대륙의 새로운 주인이 될때까지의 370여년간의 혼란기를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중국 역사상 한족 국가의 힘이 가장 약했던 시기이기도 했던 이 때를 누군가는 중국 역사 최고의 암흑기라고도 평한다. 그리고 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시발점을 만든 사람이 있다. 그는 무너지고 있었던 한나라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했다. 하지만 이 왕조의 역사는 너무나도 짧았으며 중국 대륙은 다시 한번 전란속으로 들어간다. 중국 최대의 혼란기를 가져온 이 사람의 이름은 삼국지의 주인공이자 대중적으로도 아주 유명한 바로 조조라는 인물이다.



주요 활동


  • 155년, 한나라 환관 조숭의 양자 조등의 아들로 출생

  • 가문의 힘을 통해 20세에 중앙 관직에 천거되어 관직 생활 시작

  • 184년, 황건적이 난을 일으키자 토벌 군을 편성해 황건적 진압

  • 189년, 십상시의 난으로 실권이 동탁에게 넘어가자 중앙 관직을 버리고 원소와 반동탁동맹군 결성

  • 196년, 헌제를 옹립하여 다시 중앙 정계에 복귀, 자신의 세력권인 허창으로 천도

  • 208년, 하북의 원소를 제패하고, 한나라 최고 직위 승상의 자리에 오름 

  • 이듬해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오나라의 손권을 공격하나 적벽에서 크게 패함

  • 216년, 위왕의 자리에 오름, 중국 대륙의 실권 장악

  • 219년, 다시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촉한의 유비와 한중에서 대결하나 패배

  • 같은해 동오의 손권과 동맹을 맺고 형주공방전에서 관우를 상대로 승리

  • 220년 천하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망, 차남 조비가 뒤를 이음




위촉오 세력 지도 (출처 : 위키백과)



생애와 업적


  조조는 한나라 말기 가장 유명한 환관 조숭의 양자인 조등의 아들로 태어난다. 한나라 말기는 특히 환관의 힘이 강했기에, 학창시절부터 놀기 좋아했던 그는 가문 덕분에 손쉽게 중앙 관직에 천거된다. 그가 중앙 관직에 있을 때 십상시 중 한명인 건석의 숙부가 통금시간을 어기고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어 그를 곤장으로 때려 죽였다. 건석은 노발대발하며 조조를 처형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조숭의 손자였기에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어 벌금형으로 넘어갔다. 그만큼 조조는 한나라 최고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가 30세가 되던 해 그를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 준 사건이 두차례 연속으로 터지게 되는 데, 황건적의 난과 십상시의 난이다. 후한 말기의 환제와 영제 시기는 환관들의 부패로 매관매직이 비일비재했고, 메뚜기떼들이 농지를 자주 습격해 혼란의 시대였다. 이와중에 태평도를 창시한 우길의 영향을 받은 교주 장각에 우두머리가 되어 농민들을 규합해 대대적인 난을 일으키는 데 이것이 황건적의 난이다. 당시 대장군이었던 하진은 유력 가문 출신의 젊은 인재였던 원소와 조조를 매우 신뢰했다. 이 둘은 하진의 명으로 황건적을 진압하게 되며 이 둘이 혼란의 한나라를 일으켜세울 인재로 평가 받게 된다.

  이윽고 하진은 환관을 몰아낼 계획을 하고, 지방세력 중 한명이었던 동탁과 결합하여 십상시 토벌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환관들이 먼저 계획을 눈치채 하진을 죽이자, 이를 본 원소와 조조가 화가 나 십상시를 몰살시킨다.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도착할 때는 이미 황제는 도주하고, 환관과 대장군 모두 사라진 텅빈 조정이었다. 동탁은 황제를 찾아내 섭정을 시작하며, 그의 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동탁은 곧바로 한나라 최고 직위인 상국의 자리에 오른다. 조조는 더이상 중앙 관직이 의미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출생지인 패국으로 가 군대를 모으고 반동탁 동맹군을 결성한다.

  조조는 자신이 동탁의 대군을 이길 수 없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필요 했던건 명분이다. 지방 호족들 입장에선 중앙에서 황제를 주무르고 있는 동탁이 곱게 보일리 없다. 하지만 동탁에게는 최고의 장수 여포와 서량의 강군이 있었기에 쉽게 공략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를 볼 뿐이었다. 이 때 조조는 앞장서 반동탁 동맹군을 결성하고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직접 그를 공격했다는 점에서 다른 지방 세력들에게 강하게 어필 되었다.



중원 지방을 놓고 싸운 여포 (출처 : 위키백과)



  조조에게 평탄한 길만 있지는 않았다. 연주에 기반을 두고 있던 조조는 바로 근처의 서주의 도겸과 자주 대립했다. 그 와중에 서주에서 자신의 아버지 조숭이 도적때에 의해 죽게 되자 이를 빌미로 서주로 10만대군을 이끌고 공격했다. 서주는 쑥대밭이 되었고, 복수심에 불탄 조조는 서주에 있는 군대, 시민, 가축 할 것없이 모두 몰살시켰다. 그 와중 자신의 측근이었던 진궁과 여포가 결탁하여 연주 지방을 차지해버리니 그는 일순간에 자신의 기반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조조는 위기가 올때마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며 벗어나게 된다. 자신의 오랜 친구였던 원소에게 군사를 빌려 위기를 벗어났다. 다시 연주에 기반을 쌓은 조조는 황제를 옹립하며 위기의 한나라의 구원자를 자처한다. 여포와 원술을 차례대로 꺽은 조조는 중원 지방에서 자신의 기반을 확고히 만든다. 그에게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천하를 놓고 겨룰 최대의 라이벌 원소와의 필연적인 대결이 남아있었다.

  하북의 원소는 조조보다 군대의 수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나 우세했다. 하지만, 조조는 황제를 옹립한 명분이 있었다. 그리고 순욱, 곽가 등 유능한 참모진들의 활약으로 관도에서 원소군을 대파하며, 천하 통일에 대한 희망을 키워갔다. 이윽고 원소의 아들들이 후계자 문제로 다툼이 발생하자 이를 이용해 손쉽게 하북을 정벌하고, 한나라에서 가장 힘에 쎈 세력이 된다. 이 때가 208년이었고, 한나라 승상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제 천하통일을 위해 남은 세력은 자신의 세력보다 약하다고 평가받는 동오의 손권과 형주의 유비밖에 남지 않았다.


하북을 놓고 싸운 원소 (출처 : 위키백과)



  208년 조조가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자 군소 지방세력들은 위기를 느낀다. 이들 중 최대의 세력이 바로 동오의 손권이었는데, 그는 다른 지방세력들과 결합하여 조조의 군대를 막아낼 계획을 세운다. 손권은 유비와 발빠르게 동맹을 체결하고 동오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적벽에서 그를 막아낼 계획을 세운다. 이것이 삼국지연의에서도 중심소재로 나오고 영화로도 제작된 '적벽대전'이다. 천하통일의 문턱앞에서 조조는 적벽에서 대패를 하고 무릎꿇게된다.

  다시 군대를 재정비한 조조는 서량의 마초를 비롯한 기타 이민족 세력들을 꺽은 뒤 다시 한번 천하통일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 사이 그는 위나라를 건국한다. 천하통일을 아직 이루지 못한 시점이었기에 그가 왕위에 오른건 역적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만큼 당시 한나라의 힘이 약했던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그가 왕위를 오르기 직전 조조 암살 모의가 발각된다. 한황제 헌제의 아내인 복황후가 아버지 복완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조조를 암살 할 것을 계획한다. 이것이 조조에게 발각되었고, 화가난 조조는 헌제를 핍박하고, 황후를 머리채를 잡아 끓어내 처형시키는 역적 행위를 하게 된다. 복황후 처형과 위왕 즉위는 한나라 황실에 충성심이 컷던 다른 신하들에게 분노를 샀고, 조조는 이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형주 지방을 놓고 싸운 관우 (출처 : 위키백과)



   형주와 서촉에 기반을 둔 한나라 황실의 후예를 자처한 유비가 세력을 모아 한중에서 조조군을 격파한다. 곧바로 그는 한중왕에 오르고 다시 한번 조조를 자극받게 된다. 조조의 입장에선 역적인 유비를 잡기위해 근 20년간 노력했지만 결국 잡지 못하고, 자신의 세력이 아직 뻗지 못한 서촉에서 군대를 모아 장안을 곧바로 공략할 수 있는 한중을 차지해 왕위에 오르니 조조는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유비가 가장 아끼는 장수이자 형주의 주인 관우가 위나라를 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조조는 자신의 원대한 계획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실제로 조조는 이시기에 관우를 두려워해 도읍을 허창에서 낙양으로 옮길 계획까지 세운다.

  하지만 부하들의 독려로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은 조조는 한가지 호재를 듣게 된다. 바로 관우와 손권이 형주를 놓게 서로 분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조는 순권에게 바로 동맹을 제의하며 관우를 잡고 형주를 양분하자는 계획을 세운다. 동오 입장에서도 커질대로 커진 관우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승낙하며 관우를 잡기위한 위나라와 오나라의 동맹이 성사된다.

  관우는 당시 한나라 사람들에게 종교나 다름없었다. 조조 못지않게 한나라 최고의 인재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관우다. 유비에 대한 지극한 충성심, 출중한 외모, 뛰어난 무력, 강직한 품성을 갖춘 관우는 조조 못지않은 후한 최고의 슈퍼스타였다. 형주에서의 관우와 일전은 천하통일에 대한 방점을 찍을 수 있는 최대의 일전이었다. 관우의 기세는 실로 대단해서 강릉성과 양양성을 차례로 뺏기고, 조인이 있던 번성까지 포위를 당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번성을 뺏기게된다면 다음은 완성이고, 그 다음은 곧바로 수도인 허창을 지척에 둘 수 있게된다. 그만큼 형주 공방전은 천하통일 판도를 결정 짓는 중요한 전투 였다.

  번성이 포위당할 무렵 손권의 구원의 손길이 왔다. 오나라 도독 여몽이 군사를 이끌고 관우의 뒤를 치기 시작하자 관우는 더 버티지 못했고, 양면 공격을 받게된 관우는 여몽의 손에 죽게된다. 조조는 다시 양양과 강릉을 회복하고 형주 지방을 손권과 양분하게 된다.

  최대의 적인 관우와 천하의 중심 형주를 차지한 조조는 천하 통일에 매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지만, 그는 이듬해 냑양에서 66세의 나이로 죽게된다. 이미 고령의 나이었음에도 군대를 진두지휘하며 혹사하던 그였기에 그의 죽음은 크게 대수롭지 않았다. 이를 물려받은 차남 조비가 위나라 황제에 오르면서 한나라의 역사는 끝나게 된다. 그는 비록 천하통일을 이룩하진 못했지만 한나라에서 위나라로 바뀌는 새 시대를 연 장본인이었다. 후한 말기는 유독 영웅적 인물들이 많이 나타난 시기였다. 한나라의 부정부패와 시대적 혼란이 큰 역할은 했겠지만, 한나라에 한번 나타날까 말까한 역대급 영웅인 조조와 유비가 동시대에 태어나 서로 자웅을 겨룬 것은 천하통일 직전까지 이룩한 조조에겐 있어서 너무 크나큰 불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생을 놓고 싸운 유비 (출처 : 위키백과)



비열한 방식으로 한족의 위기를 연 한 왕실의 역적


  한나라 말기 전국 곳곳에서 지방 유력세력들이 토지와 군사력을 기반으로 중앙정부에 대항에 반란을 일으킨다. 이 세력중 가장 강성했던 것이 조조였다. 하지만 그가 비난 받는 이유는 다른 유력 세력들을 이기게 된 과정이 너무 비열하고 치졸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행동력이 다른 지방 군주들보다 뛰어났던것은 인정하나 그가 한나라 마지막 황제인 헌제의 황후를 죽인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역적행위다.

  물론 천하통일이라는 것 자체가 역성 혁명이기에 이 과정에서 역적 행위가 필수불가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여타 다른 천하통일 군주인 진시황, 유방, 이세민, 주원장 등 여러 인물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특히 비열한 방식을 사용했다. 그가 중앙 관직을 포기하고 동탁을 잡기 위해 군대를 모은 것 까진 명분과 실리 모두 잡은 행동이었지만, 헌제를 옹립한 이후부터 특히 비열한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 그가 괜히 영웅이라는 칭호보다 간웅이라는 칭호가 더 익숙한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는 과거 동탁과 이각이 썻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황제를 겁박해 지방 호족들을 역적으로 몰아가고, 이들을 공격하고 해당 지방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다. 이것이 조조의 기본적 전략이다. 도겸의 경우는 황제를 옹립하지 않은 상태였으나, 서주인에 대한 학살은 그대로 자행했다. 하북지역과 서량지역에서도 그대로 시민 학살을 이어갔다. 그나마 처세술의 달인이었던 가후 덕분에 입성 후 일체 약탈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보장 받았고, 남양지역 사람들만은 학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비열한 방법을 쓰고도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조의 기본 전략은 명분보다 실리를 취한다는 전략인데 오히려 실리주의가 그의 발목을 잡게된다. 명분없이 실리만 취한 작전을 쓴 조조가 향후 서촉에서 한중왕을 자처한 유비에게 명분을 심어주게 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나오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유비의 최측근 관우의 세력이 거세지면서 형주공방전을 패배했다면 위나라의 국운이 끝날 뻔하기도 했다.

  적어도 자신의 세력하에서는 명분이 있어 내부 사람들에겐 지지를 받아야한다. 전국시대 종결이라는 하나의 목표로 싸운 진나라의 진시황제가 그랬고, 역적 항우를 잡겠다는 일념하에 움직은 유방이 그랬듯이 조조 역시 새시대를 열겠다는 하나의 목표를 내부에서 명확히 공유가 되어야 하는데, 조조에게 약했던 점이 이 부분이다. 한나라의 정복을 꿈꾸면서 한나라 황제를 옹립하고 주무르니 주변인들이 좋게 볼리가 없었다. 이런점들은 동승과 부완의 조조 암살 모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조조의 최측근인 순욱과 한나라에 충성심이 높은 인사들은 최염, 공융 등 부하 장수들과의 대립도 이어지면서 조조는 유독 내부 문제에 많이 시달려야했다.



조조의 최대 패전 적벽 (출처 : 위키백과)



탁월한 능력으로 새시대를 연 만능형 군주


  위진남북조가 암흑기였다는 평가도 너무 가혹한데다가 심지어 그로 인해 위진남북조 시대가 열어진것도 아니다. 위나라 초대황제는 조조가 아닌 그의 차남 조비인데다가 더불어 조조-조비가 통치하던 위나라의 기세는 매우 강했다. 한족이 약해진 것은 한나라가 망해서가 아니라 조비 이후 통치자들의 잘못이다. 2대 황제 열조의 사치와 3대 황제 부터 힘없는 어린 황제들이 줄지어서 등장하고, 이런 혼란을 사마씨 정권이 들어서며 진왕조로 교체되자 혼란이 더욱 지속된 것이다. 분명 조조는 부패하고 힘없는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힘있는 새로운 왕조인 위나라를 건국했을 뿐이다.

  그가 실리주의를 표방한 이유도 그는 스스로 실력이 있었고, 마침표까지 찍지 못했을 뿐 충분히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다. 진짜 최대의 난적이었던 유비의 출생을 탓해야 할 정도로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그의 위나라 재위 기간동안 그가 세운 다양한 업적들은 향후 오랜기간 동안이나 중국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군사 전략이자 훗날 우리나라에 까지 영향을 끼친 둔전제 시행이 있다. 조조의 참모진 중 한명인 모개의 제안으로 시작된 둔전제는 병사들이 전시에는 훈련을 하고 평시에는 농사를 지으며 군사력과 생산력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것을 의미한다. 둔전제의 시행으로 전시에 떨어질 수 있는 생산력을 보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수 있게 된다. 또한 호조법과 구현령을 시행하면서 향후 위진 남북조와 수당시대까지 영향을 끼친 많은 제도를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인재가 넘쳐났다. 조조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부하 장수들을 휘어잡았다. 어린 시절부터 같이 활동했던 조인, 조홍, 하후돈, 하후연, 악진 등 무장이 있었을 뿐더러 정복 전쟁을 벌이면서 새로 장료, 장합, 허저, 방덕과 같은 유능한 장수들은 죽이지 않고 자신의 휘하에 두었다. 그는 능력이 있었으면 항상 열린 마음으로 부하들을 받아들이는 데 누구보다 유능했다.

  그리고 그의 정복전쟁엔 유능한 참모진이 있었고 그는 이 참모진을 이용해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것이 정적인 원소와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다. 자존심이 강했던 원소는 자신 역시 유능한 참모진을 수하로 두고 있었지만 유우부단함과 독단적 행동으로 전혀 그들을 활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조조는 순욱, 정욱, 곽가, 가후, 사마의 등 유능한 참모진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오히려 자존심을 세우고 독단적으로 공략한 서주학살, 곽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참모진의 공백이 생긴 적벽 전투 등 참모진의 말을 듣지 못했을 때 자신의 패배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조조였다.


영화 '적벽대전'의 조조



총평


  조조는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정말 인기가 높은 인물이다. 한중일 3국의 사람들 중 삼국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연의 삼국지는 이들에게 고전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삼국지의 대표 안티히어로 조조를 모르는 사람 역시 거의 없을 정도다. 그가 어떤 업적과 정책을 실시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조조하면 누구나 유능하지만 비정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 평가는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 꽤나 정확하다.

  그의 역적 행위도 명백하고, 그의 유능함도 명백하다. 연의삼국지의 영향이 더 크겠지만 그의 인물 평은 명확하게 갈리고 호불호도 갈린다. 명분 중요론자들은 조조에 대해 야박하고 평가하고, 실리주의자들은 조조에 대해 후하게 평가한다. 그래서 중국에서의 평가도 시대에 따라 수없이 바뀌어간다. 카리스마로 중국을 통일한 이세민은 조조와 자신을 자주 비견했다. 조조를 뛰어난 인물로 평하면서 조조는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을 자신은 이뤘으니 자신이 조조보다 뛰어나다는 논리를 들어 자신을 띄웠다고 한다.

  현대에서의 평가도 극과 극을 달린다. 우선 현대 기준에서 그의 행위는 전형적인 학살자이다. 현대에 청야전술과 유사한 방식의 전술을 즐겨 사용했다. 서주와 서량의 대학살은 특히나 그에 대한 인기를 가장 크게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다. 더불어 한황실을 전복시킬 목적으로 부하 장수를 시켜 황후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 처형시켰다는 점은 윤리적으로 최악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군주 중에서 개인적인 능력으로는 최고점을 달린다. 중국을 통치했던 왕이나 지도자 중에서도 인격적인 부분을 제외한다면 그를 최고 반열에 놓기에 손색이 없다. 능력적인 부분에서는 진시황, 주원장, 쑨원 등 중국의 새시대를 열었던 지도자들과 동급의 능력을 보여준다. 오히려 한나라 건국 군주인 유방보단 개인적 능력 면에선 비교가 안될 정도의 통솔 능력을 보여줬다.

  조조가 특히 비난을 받는 이유는 사실 그가 통일에 성공하지 못한점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천하통일에 성공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통일된 위나라를 만들어 황제에 올랐다면 그는 앞서 언급한 세명의 인물과 동급으로 추앙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반쪽짜리 나라에 그쳤기에 앞서 자행한 학살 및 역적 행위들이 더욱 부각 받게 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이런 행위들이 후세에 전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최대한 연의삼국지의 모습을 제외하고 정사적인 이미지로 볼려곤 했으나, 삼국지의 영향력이 너무 크기에 어느정도 삼국지 조조의 모습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다 해도 그의 양면성은 충분히 보여진다. 그가 위진남북조 시대의 시발점 역할이 했던 것은 분명하고, 불완전한 통일에 기인한 불완전한 시대를 연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결국 그의 불완전성이 그에 대한 후한 평가에 발목을 잡는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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