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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부흥과 중세 유럽의 헤게모니를 연 새시대 출범의 상징
VS
봉건제와 전제 교황권을 연 유럽 암흑기의 상징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카톨릭 정교회의 힘은 날이 갈 수록 커져갔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황금기로 강성해진 동로마 제국 이슬람 세력의 방패 역할을 하자 유럽 정교회의 힘은 날이 갈수록 커져갔다. 결국 로마의 교황이 게르만족이 세운 나라 프랑크 왕국의 카를로스 대제에게 로마제국의 황제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할 정도로 교황청의 힘은 유럽의 왕국들의 왕권보다 더 강해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출범이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분열 되었으나 카를로스 대제로 부터 이어진 신성로마제국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들은 교황의 선언으로 성립된 국가인 만큼 교황청의 지속적인 간섭을 받아왔다. 중간에 왕조가 끊긴적은 있었으나 신성로마제국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멸망할 때 까지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시기동안 지속되었다. 오늘날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중부 유럽의 시초가 되는 나라인 신성로마제국은 교황권의 전성기와 몰록을 함께 겪을 수 밖에 없던 말그대로 신성 국가였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시시때때로 교황과 충돌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건 카노사의 굴욕에 대해 알아보자.
사건개요
WHO? 교황청 교황 (그레고리오 7세) vs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WHEN? 1077년 1월 18일
WHERE? 신성로마제국 카노사 성 (현 이탈리아 북부 지역)
WHAT? 하인리히 4세가 교황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파문을 취소해달라고 요청
HOW? 교황을 만나기 위해 허름한 옷을 입은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로 이동
WHY? 주교 서임권 문제 (성직자 임명권)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사건의 전개
로마의 정교로 천주교가 추대받게 되며, 가톨릭은 유럽을 상징하는 종교가 되었다. 로마에 있던 정교회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로마 제국은 둘로 분열되었는데, 동로마제국은 점차 과거의 명성을 찾아가고 있던 반면, 서로마제국은 민족들간의 다툼으로 세분화 되어 있었다. 고대 유럽의 국가는 지금과 같은 국가의 개념과는 조금 달랐다. 다민족, 다지역의 지방 군주간의 일종의 연합과 같은 역할이었다. 강성했던 게르만 족도 서서히 분열되며 서로마 제국이 해체된다.
그중 훗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는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에 자리 잡았다. 이들은 서로마제국에서 분열된 다른 국가들 중 가장 세력이 컸다. 당시 로마 정교회는 동로마제국에 속해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때 더욱 강성해진 동로마 제국은 거의 대부분의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로마 정교회 역시 동로마제국 영토안에 속해있었기에, 교황은 동로마제국 안에 종속되어있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렇게 안정되어 있던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간의 관계가 8세기부터 점점 틀어지게 된다. 아랍 지역에서 이슬람교리가 발전함에 따라 이슬람 국가들이 동로마의 새로운 적으로 등장한다. 이러던 와중 이탈리아 반도에서 랑고바고드 왕국이 점차 힘을 키우자, 동로마는 더이상 이탈리아 반도를 지키기 어려워지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교황청에게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어 랑고바고드왕국을 막아달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고, 교황청과 동로마제국은 서로 틀어지게 된다.
이를 멀리서 지켜본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와 교황청을 구원해주게 된다. 가뜩이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이었는데, 이를 계기로 두 국가는 완전히 척을 지게 되고 교황청은 프랑크 왕국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고 교황청에서 카롤루스 대제를 로마의 진정한 후계자로 지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출범이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앞서 동로마 제국이 그러했듯이 카롤루스 역시 자신들이 교황보다 황제의 권위가 더욱 우위에 있고, 교황청은 황제의 명령을 받는 입장임을 분명히 햇고, 교황 역시 이 점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 초창기인 8세기의 일이다.
게르만족이 분열하여 프랑크 왕국이 탄생했듯이, 프랑크 족도 시간이 지나며 분열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은 총 3개로 분열되고 각자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교황의 힘은 극도로 커져가게 되며, 점차 교황권이 황제의 권위를 앞지르는 사태가 벌어진다. 교황들은 점차 왕국의 내정에 대해 간섭을 시작하며 가톨릭이 유럽 전역을 주무르는 형태로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중세 유럽의 이미지처럼 변해갔다.
중세 유럽의 최고 계급은 성직자이다.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중세에 대한 봉건제는 왕족이나 공신 그리고 그들의 후손인 공작, 제후들과 그의 후손인 백작, 남작 등 귀족들과 평민이 존재하고, 이들의 가장 위에 성직자가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성직자들의 각 지방의 영주 역할을 하고 이들은 수많은 기사들을 거느리고 있는 구조이다. 그리고 이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은 본디 황제에게 있었다.
하지만 커지는 교황권은 이 권한을 황제에서 교황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신성로마제국에 오토왕조가 들어서게 되면서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오토 왕조부터 잘리어 왕조가 이어질동안 황제와 교황은 성직자 수임권을 놓고 서로 분쟁을 이어갔다. 황제의 힘이 커질때는 황제에게 권한이, 교황의 힘이 커질때는 교황에게 권한이 돌아갔다. 이 분쟁이 황권과 교황권 충돌의 주요 소재였다.
하인리히 4세
이 문제가 제대로 터진 시점이 바로 11세기 잘리어 왕조의 하인리히 4세때 발생했다. 당시 교황은 그레고리오 7세 였는데, 역시나 성직자 임명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고 하인리히 4세에게 통보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자 그레고리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켜 버린다. 신성로마제국이 수 많은 봉건 영주들의 반란을 받고 있는 점을 특히 하인리히 4세를 어렵게 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 하인리히 4세에게 통보한 시점은 1073년인데, 반란을 막기에 급급했던 황제는 교황의 요청을 무시했다. 그리고 2년후 하인리히 4세는 교황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이 성직자 임명권을 휘두른다.
화가난 교황은 이듬해 하인리히 4세에 대한 파문을 결정하게 된다. 사실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반대 상황은 많았지만 교황이 황제를 파문한 적은 처음이었다. 황제가 교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들의 입맛대로 교황을 바꿨다. 불과 자신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3세만 하더라도 교황을 자주 교체한 전력이 있다. 하인리히 4세는 하급기사와 평민들을 위한 정책을 많이 내며 국민들로 부터 많은 존경을 받아왔다. 오히려 이런 점이 그의 발목을 잡게 되는데, 하인리히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교황편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그를 곤경에 빠지게 만들었다. 만약 이런 행동이 없었다면 하인리히는 당장 군대를 이끌고 바티칸으로 들어가 교황을 교체했을 것이다.
하인리히는 가뜩이나 반란으로 피곤한데 교황청까지 자신을 돌아서명 정말 고립되는 상황에 빠지기에 교황을 설득하기 위해 쥐라 산맥을 넘어 바티칸으로 향한다. 그레고리오 7세는 처음에 황제가 온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오는 건 아닌지 두려워 바티칸에서 카노사 성으로 이동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다. 이런 점을 보아 아직까진 교황권이 황제의 권위를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온건책으로 돌아선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 성으로 이동해 교황 알현을 요청했다.
그레고리오 7세는 처음에 황제를 만나 주지 않았다. 사실 교황도 황제가 직접 카노사로 방문할 것이라고 전혀 판단하지 못하고 있어 적잖이 당황한 상태였다. 교황에게도 행동을 선택할 시간이 필요했고, 이 시간을 벌기 위해서 하인리히를 만나주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하인리히가 온건책으로 나오자 교황 역시 이에 응했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자신에 대한 파문을 취소해달라고 요청을 하게 되고, 이것이 중세 교황청 최대 사건인 카노사의 굴욕이다.
신성로마제국에 대항한 반란군 중 세력이 가장 컷던 것은 슈바벤 지역의 루돌프 공작이었다. 카노사의 굴욕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루돌프 공작의 군대가 하인리히 4세보다 더 강력했다. 특히 교황이 하인리히 4세에 대해 파문 했을때 특히 많은 영주들이 루돌프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카노사의 굴욕 덕분에 살아남은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 지지에 힘입어 루돌프 공작의 군대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게 된다. 그러자 교황은 다시 한번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을 지시한다. 그렇게 되자 많은 영주들은 교황의 횡포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오히려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지지를 불러 일으키고 루돌프 공작은 신성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진압된다. 결과적으로 하인리히 4세의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헛되지 않았으니 그에게 있어서는 이 행동이 크게 굴욕이 아닐 수도 있다.
황권을 완전히 회복한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에게 멋지게 복수한다. 신성로마제국 내의 친교황파 인사를 모두 제거하고 이번인 진짜 군대를 이끌고 바티칸으로 쳐들어가 그레고리오 7세를 교황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새로운 교황을 추대한다. 그리고 하인리히는 평민과 하급기사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내놓으면서 신망을 더욱 높인다. 훗날 종교개혁을 이끈 많은 사람들과 독일 제국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역시 훗날 하인리히 4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할 만큼 많은 독일인으로 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로 등극한다.
카노사 성 위치 (출처: 구글지도)
하인리히 4세가 이런 굴욕을 겪은 데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권이 매우 약한데 기인했다. 그는 불과 6세에 왕위에 올라 태생적으로 낮은 정통성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수많은 반란군의 세력과 전투를 하게 된다. 게다가 친 평민 정책들은 지도층들의 반발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기에, 더욱 주위 사람들의 공격에 쉽게 노출되었다. 이런 불리한 배경을 딛고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는 굴욕을 당하면서 다시 황권을 정상궤도로 올려 놓는 점을 보면 하인리히 4세가 왜 수많은 독일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지 쉽게 알 수 있다.
사실 카노사의 굴욕 이전과 이후에도 교황과 황제 사이에는 수많은 힘겨루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유독 이 사건이 크게 주목 받은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카노사 사건 이후 교황권이 완전히 황제권을 압도한다. 카노사 사건 이후 십자군 전쟁 발생까지는 약 100여년이 시간이 흐르는데, 하인리히 4세의 교황 폐위를 제외하면 교황이 황제에게 당한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교황의 힘이 커진다. 두번째는 상징성이다. 교황과 황제가 다툰 적은 있어도 이렇게 황제가 직접 교황을 알현에 무릎을 꿇은 적은 유일하다. (물론, 무릎을 꿇지 않았다는 사서도 존재한다.) 세번째로, 하인리히 4세의 복수도 한 몫 했다. 정말 중세판 와신상담으로 현대의 이야기였으면 충분히 영화와 되어 제작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극적인 스토리텔링이 존재했다는 점 역시, 이 사건이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도록 만들었다.
교황으로 부터 로마 황제의 칭호를 받는 카롤루스 대제
가톨릭 부흥과 중세 유럽의 헤게모니를 연 새시대 출범의 상징
인물이 아니라 사건이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란 거의 불가능 하다. 하지만 이 사건이 우리 역사에 있어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 했는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카노사의 굴욕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교황권이 황제권을 역전한 것이다. 중세 유럽은 가톨릭과 봉건제로 설명할 수 있는데, 카노사의 굴욕은 왜 중세 유럽이 가톨릭인가를 제대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물론 무려 1000년간 지속된 중세 유럽을 저 두단어로만 설명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교황과 중세 유럽을 때놓고 설명하긴 불가능하다. 중세와 근세의 차이가 종교개혁, 신대륙 발견, 동로마 제국의 멸망과 오스만 제국의 출범 과 같은 것들로 분리할 수 있다. 그 중 종교개혁이 들어가 있는 점만 보더라도 얼마나 중세 유럽에 있어 가톨릭이 큰 역할을 했는 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세 유럽은 절대 암흑기가 아니다. 종교개혁, 프랑스혁명과 산업 혁명 등 유럽은 계속된 발전을 거치는 데 이에 대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 바로 가톨릭이다. 가톨릭이 없었다면 지금의 유럽도 없었다. 훗날 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정복하는 유럽인들의 물리적 무기가 화약과 대포라면 사상적 무기는 가톨릭이었다. 아직까지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가톨릭 신자들이 많이 분포되있는 점만 보더라도 얼마나 가톨릭이 안정된 교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유럽이 이 들을 무너뜨리는 데 근대화된 물리적 무기만 있었다고 하는 건 지나친 유럽인 비하다.
카노사의 굴욕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가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약 100여년 뒤에 벌어지는 십자군 전쟁은 절대 교황권의 상징이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럽 국왕들에게 자신의 힘을 알린 교황은 100년 뒤 유럽 군주들에게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 탈환을 위해 대군을 파병하라는 요청을 보낸다. 중세 교황청의 힘을 알 수 있는 대목이고, 실제로 이 시기가 역사적으로 교황권이 가장 강세를 보였던 시기이다.
이런 점들로 카노사의 굴욕을 중세 유럽의 헤게모니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황제와 교황과의 주종관계를 확실히 했다. 현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인 가톨릭과 기독교의 기반이 사실 이 시기부터 제대로 고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교황이 십자군 전쟁을 거치고 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 제국을 살리기 위해 했던 여러가지 일련의 활동들이 2위 종교인 이슬람의 팽창으로 부터 막을 수 있도록 한 중요 기반이라고 보는 것 역시 전혀 이상하지 않다.
중세 유럽의 또다른 상징, 기사
봉건제와 전제 교황권을 연 유럽 암흑기의 상징
가톨릭이 유럽 역사에 있어 선영향만 끼쳤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지난번에도 소개를 한 인물인 잔 다르크가 왜 죽었는지 생각해보자. 중세 말기부터 근세 초기까지 마녀사냥이라는 명분으로 수많은 유럽의 부녀자가 억울한 이유로 죽었다. 십자군 전쟁도 어땠는가? 성지 회복이라는 종교적 명분을 통해 유럽 각국의 청년들이 십자군으로 편성되어 투르크, 이슬람 족에게 죽어갔다. 성지 회복을 근거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교황이 빼앗아도 되는 지 의문스럽다.
그리고 유럽이 근대에 세계의 패자로 떠오르게 된것은 전제 왕권의 역할이 크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위해선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후원이 컸으며, 엘리자베스 여왕의 해군력 강화 정책들이 대영제국의 기반이 되었다. 교황권이 강했을때 교황은 자신의 권력을 통해 종교적 발전만을 궁리했다면 절대 왕권 시대의 황제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많은 국가의 과학자, 기술자 들을 후원했다. 황제의 힘이 이전부터 강했다면 유럽의 발전을 조금 더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중세 교황시대의 결과와 근세 절대 왕정 시대의 결과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도 중요한 대목이다. 교황시대의 결말을 보자. 십자군 원정 실패, 흑사병,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오스만 제국에 의한 동로마제국의 멸망이다. 반면 절대 왕정 시대의 결말을 보자. 서구 유럽 열강의 등장, 산업 혁명, 프랑스 혁명.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인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한 혁명적 사건이다. 이렇게 결말만 놓고보면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황제의 무릎을 꿇리면서 얻은 결과물이 고작 저것이다. 멀리 갈필요도 없이 하인리히 4세가 펼쳤던 친평민 정책만 보더라도 그가 인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레고리오 7세가 고집을 피워 하인리히 4세를 파문 시켰다면 그의 뛰어난 정책은 애초에 인류에 등장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윌리엄 포웰 프리스 - 마녀재판
총평
카노사의 굴욕은 인류 역사에 반전을 준 사건이라기 보단 중세 유럽에 있어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된 것이다. 교황에게 권력의 힘이 이동하는 와중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이라 작게 보면 엄청 작은 사건이지만, 크게 보면 시대의 흐름을 관통할 수 있는 대사건이기도 하다. 사건 자체를 놓고 보았을 때는 보잘 것 없지만 이사건의 가져다 주는 의미는 아주 방대하다.
중세 유럽을 암흑기라고 표현 하기도 하는 데 사실 이는 너무 편협한 사고라고 생각한다. 물론 중세 유럽의 끝은 좋지 않았다. 7세기 등장한 이슬람 교는 점차 세력을 넓히더니 십자군 전쟁을 기점으로 가톨릭보다 힘에 우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암흑기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근대화된 무기로만 사람들을 정복 할 순 없다. 빈약한 사상적 기반의 문명은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가 중국의 지속적은 침략에도 살아 남은 것도 모두 사상적 기반이 탄탄했기 떄문이다. 비록 중세 유럽 시기에 과학 기술은 아라비아에 비해 뒤쳐진 것이 사실이나, 이 시기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믿는 종교인 기독교를 만들어 내는데 큰 역할을 한 시기이다.
중세 유럽 중에서 교황 시대에 대한 고찰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신성로마제국은 교황권과 갈등하게 되고 프리드리히 1세 때 교황의 명에 따라 십자군 원정에 필요한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이 사건과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것이 200년뒤 발생되는 ‘아비뇽 유수’이다. 카노사의 굴욕과 정 반대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을 아비뇽에 감금 시킨 사건이다. 중세가 교황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정말 교황이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 시기는 약 200년 정도이고, 이 사이에 십자군 원정이 일어난 것이다.
카노사의 굴욕으로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살펴보는 것 역시 중세 유럽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용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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