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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과 계몽을 위해 싸운 숭고한 독립운동가 VS 독자적 노선과 임정 활동에 반대한 아나키스트


  역사의 이중성은 독립운동가들도 벗어나기 힘들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지은 장지연과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 의혹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힘을 합쳐도 모자랄 시기에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진영으로 나뉜 두 독립운동 계열은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끼리 싸우기도했다. 오늘 해볼 이야기도 이 시대에서 자신의 노선대로 독립운동을 한 인물을 살펴보자.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다.



주요 활동

  • 1867년 4월 21일, 조선 한성부 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이유승의 4째 아들로 출생

  • 1906년 아버지 이유승의 사망 이후 집안의 노비를 모두 해방

  • 1906년 이상설, 장유순 등과 함께 만주에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기지 설치 

  • 1907년 을사조약 체결에 분노하여 안창호, 양기탁, 동생 이시영 등과 함께 신민회 조직

  • 1907년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종황제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 파견을 건의

  •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 2년 후 신흥 무관학교 조직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반대 하였으나, 수립 되자 임시정부 의원으로 참가

  • 1924년 임시정부에서 내분이 발생으로 탈퇴 후 본격적으로 아나키즘 활동 시작,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설립

  • 1931년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본 제국의 주요 인물 암살 및 기관 파괴를 계획

  • 1932년 조카 이규서의 밀고로 인해 다롄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 11월 17일 노령의 나이에 심각한 고문으로 옥사


신민회

생애 및 활약


  우당 이회영은 조선 말기 이조판서를 지낸 아버지 밑에서 명예와 부를 누리며 성장했다. 흔히 말하는 조선의 재벌2세였던 그는 막나갈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예의바르고 개방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집에 있는 많은 노비들을 자유인으로 풀어주었다고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집 노비들에게 높임말을 쓸정도로 당시 시대 기준으로 보면 아주 파격적인 언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조선 사대부 집안 출신이었기에 어린 시절 유학 공부에 주력 했는데, 그가 태어날 무렵 쯤에 이미 조선은 개화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외국의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고 관심을 보였다. 훗날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부인과 교회에서 결혼한다. 성인이 되어 대한제국의 일원으로 일하고 외부에서 계몽운동도 이어갔다. 특히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 조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국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가 일어났다. 이회영은 이 시기에 6명의 형제와 함께 조선에서의 직위를 포기하고 만주로 망명을 했다. 그는 이조판서의 자제였던 만큼 일제의 침략에 묵인했다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온 한반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급처하고 돈을 모아 만주에서 항일 운동을 이어간다. 그가 재산을 팔아서 마련한 돈이 약 600억원이었는데, 현재 물가로 환산하면 대략 2조원 정도라고 하니 대한 제국 최대의 기업이 만주로 이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그의 독립 운동은 조선에겐 큰 힘이 되었다.


  경술국치 이후 그는 만주에 신흥 무관학교를 세워 훗날 일본 제국을 무력으로 상대할 수 있도록 힘을 길렀다. 1918년 세계 1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 윌슨은 민족 자결주의를 전 세계에 공표한다. 이에 자극 받은 이회영은 당시 덕수궁에서 일본의 감시하에 칩거상태로 살아가고 있던 고종을 만주로 망명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고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이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



  이후 3.1 운동이 일어나고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회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 자체가 아나키스트 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직책이 존재하게 되면 훗날 이 직책을 놓고 독립운동가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조국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수립되었고 이회영은 설립자체엔 반대하였으나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신채호와 함께 임시정부에서 조정 역할을 맡았다.


  이후 그의 처음 걱정대로 임시정부 내부에서 파벌이 나뉘게 되자 이회영은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중국 후난성으로 이동했다. 1924년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만들어 아나키스트 활동을 이어간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아니키스트인 유자명, 백정기들과 함께 베이징과 상하이를 오가며 조국 독립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던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에 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본격적으로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된다. 이회영은 백정기, 정화암, 김성수등과 함께 흑색 공포단을 조직했는데, 많은 중국인들이 이 활동에 같이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텐진 부두에 있던 일본 기선을 폭파하고, 일본 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이윽고 상해에서도 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관동군 사령관 암살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1932년 11월 일부 조선인과 일본 밀정의 첩보 활동 그리고 조카 이규서의 밀고로 그는 다롄 항구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미 60대를 넘은 그는 고령에 나이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고문을 받았다. 일본 경찰들의 잔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그는 향년 65세로 생일 마감하게 된다. 조선인들에게 명망이 높았던 그였기에, 일본 경찰들은 조선인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그가 자결했다고 공표했다. 하지만 그의 시신을 빠르게 화장한점, 그의 유해에서 고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는 제보를 받은 동아일보가 해당 내용을 보도 했고,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게 된다. 그렇게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자유인 이회영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목숨을 잃게 된다. 



말년의 이회영



조국 독립과 계몽을 위해 싸운 숭고한 독립운동가


  대한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재벌이었던 이회영은 국권을 뺏기자 자신이 가졌던 모든 명예와 직위를 내려놓고 조국 독립을 위해 만주로 이동했다. 당시 많은 재력가들은 일본의 조선 침략에 묵인하는 조건으로 한반도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살았다. 대부분 자신의 명예와 부를 위해 국가 찬탈에 동조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회영 그는 달랐다.


  경술국치 이전에도 시민들의 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아직도 봉건적인 체제에 익숙했던 대한제국 시기였기에, 그의 계몽적 행보는 국가에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이회영은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집안에 있는 노비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대한제국은 당시 급변하고 있던 세계 정세에서 한참 뒤쳐지고 있었는데, 그는 조국을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맞게 흐름을 따라갈 수 있게 노력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였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단순히 이념만을 강조한 독립운동을 하진 않았다. 그의 대표적 활동 중에 신민회에서 공동 대표로 활약한 것이 있는데, 신민회의 목표는 독립 공화정 수립이었다. 공화정 수립은 그의 이념과 반대였으나,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국권 찬탈 시도를 저지하기 위해서 서로 다른 이념의 단체에서도 활약하는 면모를 보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시정부에서의 활동도 그러했다. 초기엔 임시정부 수립 자체에 반대했으나, 수립 후 조국 독립에 기여하기 위해 임시정부에 의원으로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그가 임시정부를 비판했던 이유는 임시정부의 직책을 둘러싼 이념 및 세력 다툼을 걱정했다. 소름끼치게도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1년이 지나자 바로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이 일어나면서 임시정부 내의 세력 다툼이 현실화 되었다.

 

  그는 엄청난 특권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특권을 부정하는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아나키스트 답게 직책과 관료 주의를 부정하고 조국 독립을 위한 효율성을 강조했다. 그의 행보는 실천과 실효성으로 압축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KBS 드라마, 자유인 이회영



독자적 노선과 임정 활동에 반대한 아나키스트


  우리나라에선 아나키즘 사상이 많이 뿌리내리지 못했는데, 이회영은 사상적으로 보았을때 정말 자신의 생각이 확고했던 사람이다. 유명 인사 중에서 안창호와 더불어 유이한 대한민국 아나키스트 였다. 그런 그의 활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다양성을 주기도 했을지 몰라도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지 못하는 독자적 노선으로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내분이 조국 독립에 있어 절대악인지도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직책을 놓고 싸우는 내분은 정말 악일지 몰라도, 임시정부 내에서의 사상적 경쟁은 오히려 조국 독립을 위한 생산적인 토론이다. 준비되지 않은 독립은 오히려 국민들에게 엄청난 피해로 다가온다. 실제로 1945년부터 53년까지 한반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면 준비안된 독립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지 답이 나온다.


  이회영은 이런 사람들과의 협력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임시정부에서 내분에 신물이 나서 나온 측면도 있지만 조국이 일본에게 빼앗긴 형국에 우파와 좌파 모두 협력을 했어야 했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임시정부를 나와 독자적 노선을 유지했다. 아나키스트 사상가 답게 그는 우파와 좌파 어느쪽에서도 버림 받게 되었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백정기



총평


  비판적인 요소를 쓰긴 했지만, 어떻게 우당 이회영 선생님을 비판 할 수 있는가. 그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대한민국에선 일본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아나키스트는 관료 주의를 부정하고 개인의 행복을 극대화 하자는 자유주의 사상의 한 계열 중 하나다. 그는 대한제국과 식민지 한반도에 살아가고 있는 시민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꿔온것이다. 


  그의 행보가 이를 증명한다. 대한제국 시기 계몽 단체를 만들기도 하고, 노비를 해방시켜 자유라는 가치를 숭고한 가치를 사람들에게 느끼게 해줬다. 그가 꿈꿔온 독립된 조선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새 대한민국에 보면 가짜 자유주의자들이 참 많다.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입막으로 내뱉는 말들이 자유 대한민국이다. 한국형 자유주의의 정석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다. 누구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실천적인 모습을 보였던 그였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이념적 논쟁을 하면서 입으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보다 훨씬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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