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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 프랑스 양국을 오간 이중 스파이 VS 세계 대전 속 힘의 논리에 의한 희생양
대부분의 역사적 인물 혹은 사건은 이중성을 띄고 있다. 선과 악의 논리는 역사에선 다소 맞지 않는다. 항상 역사에선 승자가 선으로 기록되고 패자는 악으로 기록된다. 한 사건과 인물을 보고 어느 쪽이 더 맞을지 각자 판단해보며 역사 인물을 살펴보자.
마타하리를 누군가는 그녀가 양국을 오가며 서로의 정보를 전달하다 들통이나 처형당한 이중 스파이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그의 스파이 행적이 불분명하다며, 독일과 프랑스의 갈등 속에서 희생 당한 희생양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쪽 의견이 더 맞을까?
마타 하리
주요 활동
본명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
1876년 8월 7일, 네덜란드 프리슬란트 주 출생
어린나이에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로 이동, 1902년 귀국 후 파리에서 매춘 활동 시작
세계 1차 대전 발발 후, 독일군으로부터 스파이 명령 받아 프랑스 고위 인사들에게 전략적으로 접근
프랑스 군으로부터 스파이라는 사실이 들통났으나, 프랑스의 스파이가 되어 독일 군 정보를 빼내오기로 계약
이중 스파이 활동으로 하다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1917년 10월 15일 파리 교외에서 총살
생애 및 활약
네덜란드 출생의 무용수 마타하리는 어린시절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당시 식민지에 나가있던 많은 군인들은 백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 신문에 결혼 구인 광고를 종종 냈는데, 마타하리 역시 해당 광고를 보고 남편을 만나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이동하게 된다. 먼 타국에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결국 7년간의 짧은 결혼 생활을 끝으로 1901년 마타하리는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오게 된다.
그녀는 파리로 이동하여 무용수와 매춘활동을 본격적으로 이어간다. 독일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영어 4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노출이 많은 무대 의상과 이국적인 외모로 금세 유럽 사교계에서 입소문을 타게 된다. 이 당시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이름도 젤러에서 마타하리로 바꾸게 된다. 마타하리란 인도네시아어로 '여명의 눈동자'이다. 자신이 인도네시아 공주 출신이라던거 혹은 인도의 여사제였다는 거짓말도 서슴치 않으며 많은 유럽 남자들의 혼을 빼놓게 된다. 유럽 대도시를 순회하며 댄서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나면서 그녀의 인생에 어둠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전쟁 발발 직후 중립국이자 모국인 네덜란드로 이동하게 되지만 독일 군은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독일은 2만프랑을 조건으로 프랑스 국방장관과 외교 고관들에게 접근해 독일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빼내올 것을 요청한다. 그녀는 수락하고 다시 프랑스 파리로 이동한다. 전문적인 스파이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에 그녀의 스파이 활동은 매우 미숙했다고 한다. 프랑스 측은 그녀의 스파이 활동을 쉽게 눈치 채고 역으로 독일군의 정보를 빼내올 것으로 지시한다.
프랑스 정보 국장 라두아에게 백만 프랑을 요구한 마타하리가 황당했지만, 그녀에 대한 의심을 굳힌 라두아는 일단 그녀의 제의를 수락한다. 스파이로서는 매우 무능력 했던 마타하리였기에, 그녀는 프랑스 정보국이 원하는 정보를 제대로 가져다 주지 못했고, 이를 빌미로 프랑스는 마타하리를 체포했다. 1917년 7월 24일부터 이틀간의 재판으로 그녀에게 사형이 선고 되었고, 집행은 10월 15일 파리 교외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녀는 총살할때 진행하는 눈가리개도 하지 않고 용감하게 죽었다고 전해진다.
뮤지컬 마타하리
독일, 프랑스 양측을 오간 이중 스파이
그가 우선 당시 많은 유럽 고위직 남성들에게 입소문이 났고, 많은 인기가 있었던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녀는 충분히 마음만 있었다면 양국의 군사 및 외교 결정권자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던 위치였다. 독일군 수뇌부 역시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녀는 파리에 있던 당시 최고의 댄서 디아길레프와 만나고 싶어했다. 독일 정보국인 이런점을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프랑스의 정보를 빼내오게 하기 위해 그녀에서 접근 한것으로 기록된다.
제퍼슨 애덤스의 저서 Historical Dictionary of German Intelligence엔 세계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정보 활동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해당 부분에 마타하리가 독일군으로 부터 2만 프랑의 보수로 독일군의 첩보 활동을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독일 군은 그녀에게 스파이 교육을 하기 위해 1915년 쾰른에 머무를 당시 첩보 훈련을 시켰다고 전해진다.
다만 그의 뛰어난 미모와 무용실력과는 다르게 그의 스파이로서의 재능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녀는 독일군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거의 보내지 못했다. 그녀가 독일군에 보내온 정보는 프랑스 군 간부들의 사생활이었지, 군사 작전이나 외교 기밀은 거의 없었다고 전혀진다. 그녀는 그리고 정보를 전달할 때 주로 음표 암호를 사용 했다고 한다. 음표 안하는 알파벳과 음표를 대응해 보내고 싶은 메시지를 악보로 만들어 전달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프랑스에서의 행적도 프랑스 정보국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프랑스 정보국에 접근해 독일군 정보를 빼내오는 조건으로 무려 백만 프랑을 요구 했다. 아무리 이중 스파이로 활동한다지만 프랑스 정보국장 입장에선 능력도 미심쩍은 스파이에게 그정도의 거액을 쥐어주기 부담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이전에도 프랑스에게 정보를 준다는 조건으로 스페인으로 갔다가 독일군 수뇌부와 어울리고 이렇다할 정보를 주지 못했기에 프랑스 입장에선 더더욱 화가 난 상태였다.
이런 점들로 볼 때 시작은 타의적 스파이였지만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전문적이진 않았지만, 남들을 속여가며 이중 스파이 생활을 이어갔다.
세계대전 속 힘의 논리에 의한 희생양
그녀가 설령 스파이 제의를 독일과 프랑스 양국으로 부터 요청 받았을지 몰라도, 그녀는 분명 어릴적부터 정보국의 훈련을 받아 길러진 전문 스파이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던 그녀였기에 돈을 벌러 멀리 인도네시아 자바섬으로 이동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남편과 살며 자기 혼자 살아 남기 위한 힘을 길러야 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를 바탕으로 매춘과 무용으로 살아 남기 위해 4개국어를 배웠다. 그녀가 스파이 활동을 위해 언어 능력을 기른건 분명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먼저 접근한 것은 독일군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스파이가 되고자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의 매춘 경력과 뛰어난 무용 실력이 독일군 입장에서 필요 했던 것 뿐이었다. 마타하리는 당시 돈을 빌린 곳이 많아 이를 갚기 위해 돈이 자주 필요 했고, 독일 군의 거액 제시는 충분히 그녀를 혹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그녀가 체포된 이후 프랑스 수뇌부 남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을 열어 스캔들 리스트를 작성하게 된다면 그녀와 만났던 많은 고위층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업무를 이어나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프랑스에서의 재판은 무려 이틀 많에 초고속으로 진행되었고, 형이 결정된지 3달도 안되서 총살을 당하게 된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안전이 우선이었지, 제3국 출신의 매춘부이자 스파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을 변호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약 독일과 프랑스의 긴장상태가 크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신의 애인과 말년에 편하게 살아 갔을지도 모른다. 양국의 갈등이 그녀의 삶을 빼앗아 갔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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