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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초기 적폐로 떠오른 문벌귀족


  고려 초기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은 문벌귀족이었다. 왕권은 지방 호족들과 더불어 고려를 세웠는데, 국가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자 고려 초기의 국왕들은 지방 분권적인 국가 구조를 중잉 집권적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그래서 지방 호족의 자제들을 대거 중앙 관료로 발탁하게 되는데, 이들이 모여 문벌 귀족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 문벌귀족은 음서와 공음전이라는 무기로 권력을 유지했다. 음서는 5품 이상의 관료가 별도의 추천만 있으면 자신의 친인척을 관료로 추천할 수 있는 제도이다. 요즘 시대로 치자면 5급 공무원의 자제는 별도의 시험 절차 없이 아무 능력이 없어도 곧바로 공무원으로 임용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공음전은 5품이상의 관료들에게 일정 지역의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수조권을 세습할 수 있는 제도 였다. 문벌귀족은 음서를 통해 정치적 권한을, 공음전을 통해 경제권을 세습시켜 기득권의 지위를 대대로 물려 줬다.


  거대해진 문벌 귀족의 상징은 바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권신 이자겸이었다. 이자겸은 오랜기간 동안 왕과 사돈 관계를 맺고 왕의 권위를 넘어서 권력을 휘둘렀다. 고려 인종이 즉위하던 시점 역시 이자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당시였다. 인종은 그를 쫓아내기 위해 척춘경과 김부식의 도움을 요청했고, 결국 조정에서 이자겸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인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승려, 묘청


  인종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에 주력한다. 당시 문벌귀족들은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개경파와 정지상을 대표로하는 서경파의 대립 구도로 정권이 이어지고 있었다. 인종은 이 거대해진 문벌귀족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더군다나 인종은 도참과 풍수지리에 평소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점을 간파한 정지상은 승려 한명을 왕에게 추천하니, 그가 바로 묘청이다.


  묘청은 왕의 총애를 받아 왕실 고문 자리에 까지 오르게된다. 인종은 자주적인 고려를 꿈꿨고, 묘청이 이 부분을 제대로 자극했다. 당시 중국의 송나라는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고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가 중국의 패권을 잡게 된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새로 주권을 잡은 중국 국가들이 늘 그렇듯 한반도에 권신관계를 요구해왔다. 인종은 이 점에 불만이 많았다.



정지상의 대표작, 송인



  서경 천도 운동


 유교적 지식이 풍부한 김부식과 개경파는 사대 외교를 주장하며 금나라의 요구에 수용하자고 주장했다. 허나 금나라에 굴복하기 싫었던 인종은 자주 외교를 주장한 묘청에 끌린다. 게다가 묘청은 금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현재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더 북쪽에 위치한 서경(지금의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했다.


  묘청은 왕이 서경으로 천도할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대동강에 기름을 넣은 떡을 준비해 왕이 도착하면 기름을 띄워 강물이 반짝이도록 만들었다. 왕이 강물을 보고 반짝이자 묘청은 '대동강에 잠든 용의 침 때문에 물 빛이 반짝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묘청은 주도면밀하지는 못했는지 잠수부가 발견되 떡을 바다에 띄워 물 빛을 빛나게 했다는 걸 들키기도 했다.


  묘청은 1129년 서경에 대화궁을 짓게 해 서경으로 천도하게 될 때 인종이 거처할 궁궐을 만들었다. 인종도 이 궁궐이 맘에 들었는지 자주 서경으로 행차했다. 인종은 묘청의 이상론에 꽃혔다. 당시 고려의 국력은 생각지도 않은 채 무리하게 서경으로 천도할 것만 주장하는 묘청의 이상에 사로잡힌 것이다. 묘청의 이상은 그럴싸하다. 서경 천도는 분명 금나라 견제의 발판이 된다. 또한, 문벌귀족이 득세하고 있는 개경세력을 견재하고 신진 세력을 많이 등용해 개혁을 실시 할 수도 있었다.




  현실과 괴리감이 컸던 묘청의 이상


  문제는 이런 이상은 좋으나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의 문제가 있었다. 개경파 수장 김부식의 입김은 조정내에서 왕보다 절대 약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설득이나 견제 없이 천도는 불가능 했다. 또한, 서경으로 이전한다고 해도 금나라에 대항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금나라는 이미 송나라를 강남지역으로 몰아내고 중국 대륙의 패권을 장악했다. 이 와중 서경 천도는 오히려 금나라의 심기만 건드려 전쟁을 일으키고 고려에 피해를 입힐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저 시대의 무신들은 문벌 귀족으로 엄청난 핍박을 받고 있어서 사기도 떨어진 상태고 국가를 위해 싸워줄 지도 의문이다.


  더군다나 묘청은 허술한 면모도 많이 보였다. 꼼꼼하게 왕의 행차를 준비해도 모자랄 판에 매번 벼락이 치는 날마다 서경 행차를 잡는다. 개경파로 부터 서경 행차에 자꾸 불길한 재양이 덮친다는 말을 듣게 되자 변명이라고 하는 말이 “왕께서 서경으로 오셔서 이정도로 끝났지, 아니었으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종은 자꾸 서경 행차를 할때 마다 안좋은 일이 겹치자 서경 천도에 대한 의문에 빠졌다. 처음에 총명하고 말잘하던 이미지에서 허술하고 우둔한 묘청의 모습을 자꾸 보게 되자 서경 천도를 전면적으로 중단했다. 묘청은 여기서 또 한번 실책을 한다. 묘청은 개경 조정에 있는 서경파 사람들에게 아무런 언질 없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서경파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서경에서 마음대로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당연히 정지상을 비롯한 서경파는 몰살 당하게 된다. 자신을 조정으로 이끌어준 스승같은 정지상을 허무하게 죽게 만들었다.



묘청의 난 세력도


  묘청의 난과 최후 


  서경에 자리잡은 묘청은 국호를 대위국(大爲國)이라고 칭하고 병력과 거짓 전령을 이용해 서북지방을 장악했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은 쉽게 서경 코앞까지 진격했다. 결국 그의 부하인 조광에게 묘청은 살해 당하고, 김부식에게 투항하려고 했다. 하지만 정부와 협상을 하기 위해 묘청의 목을 가져간 윤첨이 하옥당하자, 조광은 서경에서 항전을 했다.


  서경은 고려 제2의 도시였던 만큼 수비하기 용이했다. 조광의 농성전으로 돌아서자 토벌군은 쉽사리 서경을 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2년 가까지 버텼으나 결국 정부의 기습 공격 감행에 서경은 무너지고 묘청의 난도 끝이 나게 된다.


  묘청은 초기 왕에 총애를 사기도 했고 명분도 존재했다. 문벌귀족, 그 중에서도 개경파 중심의 정국을 깰 방법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했다. 인종도 처음에는 천도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묘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하지만, 묘청은 학문적 지식이 뛰어나지도 못했고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타입도 아니었다. 말만 앞세워 서경 천도를 밀어붙이다 문벌귀족과 왕의 미움을 샀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반란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서경천도의 필요성에는 오늘날 까지도 찬반의 의견이 갈리지만 그가 무능하고 즉흥적이었다는 점은 모두가 공감을 하고 있다.


  묘청에 대해 표현하자면 능력도 없는 사람이 능력에 비해 너무 큰 자리를 맡아 너무 큰 이상을 꿈꾸다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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