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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킹 주니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 한 남자가 워싱턴 기념탑을 바라보며 연설한다. 그 남자는 자신의 꿈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얘기를 한다. 이 남자의 이름은 마틴 루터 킹. 미국의 평범한 흑인 목사였다.


 그는 도체대 어떤 꿈을 갖고 있길래 링컨 기념관에서 자신의 꿈에 대해 얘기를 할까.


“나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넷 아이가 피부색이 아닌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아이가 인격에 따라 평가 받는 지극히 당연하고 소박한 꿈을 그 많은 사람들을 향해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이 결코 작지 않고 매우 위대했다. 바로 그 앞에 있는 저 말 하나 때문에. 바로 피부색.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20세기 중반 미국


 마틴 루터 킹은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자연스럽게 개신교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비록 흑인이었지만, 목사 출신의 아버지 덕분에 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모어하우스 대학교와 크로저 신학 대학교를 거쳐 보스턴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가 된다.


 그가 대학교에 재학하던 1940~50년대는 미국 내에서 인종 차별이 가장 극심했을 시기였다. 학교에서 스쿨버스를 흑인과 백인이 나누어 탈 뿐만 아니라 일단 식당에서도 흑인은 받아주지 않았던 시기다. 어린 시절 부터 아버지에게 부당한 것은 꼭 말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킹은 대학 시절은 거쳐 흑인 인권 운동을 위한 삶은 살 것은 결심한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연출 사진)



 인종 차별의 울분을 듣게 되다


 그러던 1995년 12월 1일. 로자 파크스라는 여성이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당시엔 버스 내에서도 차별이 존재했는데, 흑인석과 백인석이 구분지어 있었다. 그녀는 흑인석에 앉아 집에 가고 있었는데, 한 백인의 자리가 없자 버스기사가 로자에게 자리를 비켜줄 것은 요구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거부 했고, 버스기사가 경찰에 신고해 그녀가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이 사건은 마틴 루터 킹도 듣게 되고 그는 본격적으로 사람을 모았다. 그는 교회에서 사람들과 함께 피부색에 상관없이 버스 좌석을 앉을 것과 흑인 버스 기사를 고용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펼치도록 힘을 모았다. 그는 이 요구사항이 들어지기 전까지 버스를 타지 말자고 했다. 이 사건이 바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매우 성공 적이었다. 흑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자동차를 이용해 사람들과 카풀을 실시 했다. 심지어 인종 차별이 부당하다고 느끼고 있던 일부 백인들도 흑인들의 인권 우동을 도왔다. 1년간의 오랜 보이콧을 통해 연방 대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게 된다.





에드가 후버말콤 엑스


 인권 운동의 위기


 위대한 발걸음일수록 그 한걸음 한걸음은 매우 무겁게 느껴졌을 이유였을까? 그의 인권 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워싱턴 연설이 있던 1963년 앨라배마주 항의 데모로 인해 1주일간 구치소에서 투옥도 했다. 그리고 그는 FBI에게 집요한 조사를 받게 된다. 당시 FBI 국장은 악명높기로 유명한 에드가 후버의 재임 시절이었다. 실제로 후버는 킹의 사생활 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다른 흑인 인권 운동가와의 마찰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말콤 엑스 였다. 말콤은 항상 킹의 흑인 인권 운동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비판했다. 개신교 출신인 킹과 이슬람교 출신의 말콤의 사상은 극명하게 갈렸다. 킹은 백인들과 타협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꿈꿨다.


 드디어 노벨 평화상을 받다.


 1963년 존.F.케네디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을 선언하게 된다. 킹은 미국의 젊은 청년이 베트남으로 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베트남의 군대 투입을 중단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반전 운동은 미국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 인들이 킹을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는 베트남 전쟁의 폭력성을 주장하며, 무의미한 전쟁을 그만 둘 것을 주장했다.


 같은해 그는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에 뽑히고, 이듬해인 1964녀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마틴 루터 킹의 미국내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다. FBI는 그에 대한 조사를 더욱 집요하게 몰아 갔고, 인종 차별주의 단체 KKK로 부터 암살 위험까지 수시로 받았다고 한다.






 꿈을 못 다 이루고 39살의 나이로 잠들다.


 그는 1968년에는 흑인 청소 노동자 투쟁에도 참여한다. 그는 흑인들 사이에서는 신과 같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때, 암살 위협을 받는 킹을 같노동자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걱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을 인물이었다. 그에게 피신을 권고했지만, 그는 끝까지 흑인 인권 투쟁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1968년 4월 4일 백인 우월 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가 킹이 자고 있던 모텔 방에 잠입해 그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그는 영국으로 도주했으나 6월 검거되어 99년형을 선고 받게 되었다.


 킹 목사가 남긴 것


 킹 목사는 인종 차별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다.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내에서 이렇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위해 오랫동안 싸운 인물은 킹 목사가 유일할 것이다. 그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 인종차별 타파와 유색 인종 인권 향상에 영향을 끼친 인물은 분명하다.


 사실 후버는 킹 목사가 여성들과 난교를 벌인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후버는 이를 빌미로 수시로 그를 협박했지만, 킹 목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인권 운동을 이어갔다. 후버가 이 사실을 언론사에 뿌렸는데, 오히려 언론사에서 후버가 치졸하게 상대방 약점을 가지고 공격한다고 생각해 이를 보도하기를 거부했다. 그만큼 킹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린 아직도 인종차별이 잔존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킹 목사 덕분에 우린 인종차별이 나쁘고 잘못된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적어도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과거엔 인종 차별이 당연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킹 목사는 우리에게 인종 차별은 잘못 되었다는걸 전 세계에 알려 21세기가 된 지금 드디어 그의 꿈이 결실을 맺으려고 한다.


 마틴 루터 킹, 그야말로 가장 위대한 미국인이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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