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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은 원균


  1597년 여름 일본은 조선에 대한 2차 침공을 가한다. 당시 일본은 부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명나라와 평화 협정을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양국의 협상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두번째 공격을 명령한다.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이다. 


  조선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1592년 일본 군대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던 조선은 다시 한번 일본에 의해 국토가 유린당하는 슬픔을 겪지 않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가했다. 조선은 의도적으로 해안 도시에서 육지로 올라가는 도로를 무너뜨리면서, 일본군이 쉽게 보급을 하지 못하도록 손을 쓰고 있었다.


  특히 이순신을 중심으로 조선은 정예 수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이순신은 다시 있을 전쟁을 대비해 다량의 판옥선과 병력을 훈련시켰다. 병력은 17000여명이 넘었고, 판옥선은 백여척을 훨씬 넘는 수치였다. 이순신은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도 징병과 둔전을 활용하며 군량도 넉넉히 준비했다.


  반면 일본 수군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애초에 정유재란을 시작한 이유 조차 단순히 명나라와의 협상 결렬이었다. 1592년 처럼 조선 침략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황은 아니었다. 또한, 일본의 지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건강 악화 역시 무리한 전쟁 시작에 큰 몫을 했다. 히데요시는 생전에 명나라 본토에 꼭 도달하고 싶었기에 더이상 조선 침략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되었다.


  근데 여기서 일본에게 엄청난 호재가 발생한다. 바로 삼도 수군 통제사가 이순신에서 원균으로 교체된 것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 조선 침략 사령관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같이 히데요시의 측근 장수 중 한명인 가토 기요마사를 엄청 싫어했다. 그러던 중 가토가 정유재란을 위해 조선으로 상륙하러 온다고 하자 조선의 힘을 빌어 가토를 처리하고 싶었던 고니시는 가토의 침략 계획을 조선에 흘리게 된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는 바로 이순신에게 연락해 가토를 부산 상륙 전에 처리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때는 조선시대에서 부산에서 한양까지 소식이 전달 되기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순신에게 가토의 상륙 정보가 도달 했을 때는 이미 가토는 부산 상륙을 마친 상태였다. 이순신은 이미 가토가 상륙을 마쳤기에 출전할 수 없다는 대답을 조정에 하게 된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영웅이 된 이순신은 국민들로 부터 엄청난 인기를 받고 있었다. 속이 좁기로 유명한 선조는 이순신을 평소 눈엣가시로 생각했고, 명령 불복종을 핑계삼아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바꾼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쾌재를 불렀다.



조선 정예 수군을 희롱한 장수


  그래도 여전히 조선이 유리한 것은 분명했다. 지휘관 한명만 바뀌었을 뿐이지 배의 숫자로 보나 사기로 보나 병력으로 보다 조선의 수군을 일본군에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 이순신이 있을 당시 발생한 국지전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상대로 연전 연승을 거듭했다. 왜군들은 이순신이 있을 당시 왜 자꾸 조선 수군에 발목을 잡히는 지 당황해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휘관 원균이 부산 탈환을 위한 계획을 잘 만들 능력이 있었다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지휘관으로서 아무런 전략이 없었다. 전시에 기생을 불러서 술을 마시질 않나, 해상에서 왜인들에게 판옥선을 탈취 당하질 않나 정말 상상할 수 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었다. 무능한 지휘관이 수만명의 적보다 무섭다는 걸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원균의 부산 공략이 지지부진하자 한양 조정에서도 더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선조는 원균에게 출전을 명령했다. 원균은 선조에 압박에 못이겨 100척의 선박을 이끌고 부산포로 항했다. 원균은 선조에게 부산을 꼭 정복하고 돌아오겠다고 큰소리 떵떵치고 떠났다.


  하지만, 부산 정벌은 커녕 부산포에 도달도 못하고 대패를 하고 돌아왔다. 왜군도 이순신에게 연전연패를 당하자 내부적으로 전략을 변경하게 되는데, 왜군의 전략은 조선의 판옥선이 장전을 할 틈을 주지 않고 속전속결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기가막히게 맞아 떨어졌다. 무능한 원균은 왜군에 전략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대패를 거듭했다.





무능한 원균, 권율에게 곤장을 맞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대원수 권율은 화가 치밀었다. 부산 공략에 대한 전략은 전혀 세우지도 않고 있다가 나갔더니 강력한 조선의 해군으로 왜의 해군에게 연패를 당하자 어이가 없었다. 


  화가난 권율은 결단을 내렸다. 바로 삼도 수군 통제사 직책을 맡은 해군참모총장격 장군의 곤장을 친 것이다. 일개 병졸이 보는 앞에서 원균은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것이다. 권율은 원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곤장을 맞자 원균도 단단히 화가 났다. 원균은 홧김에 전 함대를 이끌고 부산으로 출격을 한 것이다. 원균은 부산으로 향하던 도중 물을 얻으려고 가덕도에 병사 400여명과 함께 정박을 했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왜군은 가덕도에 정박한 조선 수군을 기습하게 되고, 원균은 화들짝 놀라 전 함대를 이끌고 다시 도망친다.


  이를 놓칠 왜군이 아니었다. 왜군 역시 원균의 수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원균은 본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제도 근방에 위치하고 있는 영등포로 향했는데, 당시 영등포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어 배의 정박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원균은 영등포가 아닌 칠전도로 퇴각했고, 이곳이 조선 수군 역사상 최대의 패배이자 최악의 흑역사로 기록될 칠천량 해전의 시작이었다.





조선의 정예 수군, 원균의 손에 의해 잠들다.


  칠천량에 정박한 원균은 이미 의욕을 잃었다. 수비에 대한 대책도 전혀 하지 않았고 본영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이 그저 술이나 마시고 있었다. 몇차례의 부산 공격이 물거품이 되자 원균은 공황장애에 빠진 사람 처럼 아무런 의욕 없이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절호의 찬스를 가지게 된 왜군은 육군과 수군을 총동원해 칠천량으로 향했다. 왜군 입장에서는 이순신에게 당했던 패배에 대한 복수심에 불탔다. 일본군 전체가 칠천량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원균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기가 떨어질때로 떨어진 조선 수군은 이렇다할 반격 한차례 하지 못했다. 겨우 10척으로 조선 수군 대함대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왜군은 조선의 판옥선에 올라타 마구잡이로 조선군을 학살했다. 이런 와중에 원균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도 못하고 퇴각 명령도 한참 뒤에서나 떨어졌다.


  가까스로 퇴각 명령을 받은 수군이었지만, 목적지 없이 그저 뿔뿔히 흩어지고 있었다. 전쟁에서 돌격 만큼이나 중요한것이 퇴각 전략인데 원균 같은 장군이 퇴각 전략을 세웠을리 만무했다. 왜군은 끝까지 조선 선박들을 추격했다. 이순신이 조정의 지원 없이 간신히 만든 100여척의 판옥 선은 가까스로 12척만 본영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의 완벽한 패배였다. 우리 역사를 둘러보아도 이런 치욕적인 패배는 정말 찾기 힘들다. 대한민국은 주변 강대국에 둘러 싸인 적이 많아 대부분 주변 국의 강력한 군대 형세에 못이겨 패배하거나 반도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수적 열세를 극복한 사례가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칠천량 전투만큼에서는 우리가 적보다 압도적으로 유리한 군세를 가지고도 반격조차 못해보고 패전했다는 점에서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이런 패전에 원인은 순전히 무능한 지휘관 원균의 공이 매우 컸다.


  칠천량 패전 이후 원균의 행방은 매우 묘연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원균이 겁을 먹고 도망치다 소나무 아래 숨어있던 일본군에 의해 사살 당했다는 이야기 이다. 하지만, 패전 이후 원균의 시신을 찾을 수 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원균 생존설 등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원균은 정말 전세계 전쟁 역사 어디를 뒤져봐도 찾기 힘든 무능한 장군이었다. 무능한 지휘관의 또다른 대표 주자 무타구치 렌야와 무서울 정도로 비슷하다. 두 사람 보두 친인척을 이용해 벼슬과 고위 직책을 얻었다. 전쟁 수행 능력 역시 현저히 떨어졌고, 위기 상황에서 부하를 버리고 자기 살길만 찾았다는 점 역시 소름 끼칠 정도로 동일하다. 당시 원균의 부친은 조정에서 꽤나 신망받고 있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평택에 가면 원균기념관이 있다. 경기도와 평택시의 비용 2억 5천만원을 들여 원균기념관을 지었다고 한다. 칠천량 해전에 대패를 기록하고 정말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치욕적인 패전. 그리고 과거 인물에 대한 반성을 해도 모자랄 판에 평택시는 원균 띄우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원균은 조선 정예 병력을 바다속으로 손수 수장시킨 인물이다. 단순한 패배가 아닌 국가적 치욕을 가져다 준 인물이기에 그에 대한 분노는 더욱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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