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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 (출처 : 위키백과)



  청나라 판 팍스 로마나, '강건성세'


  지금의 중국 영토가 완성된 시점은 청나라 시기다. 중국의 영토를 보면 외몽골과 티베트를 포함해 서쪽으로 넓게 퍼져있다. 남부 지방 역시 인도와 네팔이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을 끼고, 인도차이나 반도를 맞대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동중국해와 황해가 위치하고 있는 엄청난 넓이의 영토를 지니고 있다. 아시아 국가 중에선 영토 크기가 비교할 대상이 없는 압도적 1위이다. 그리고 이 영토를 완성한 사람이 바로 청나라 황제 건륭제이다.


  청나라는 여진족 출신의 누르하치가 세운 국가다. 청나라는 통일 이후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기간 지속된 왕조 국가이자, 원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넒은 영토를 지배할 정도로 가장 융성했던 국가였다. 중국 왕조 국가들은 학문만 강조하다가 이민족에 짖밟히고, 혹은 국방력에만 몰두하다 빈약한 사상이 발목을 잡아 내부 반란으로 무너졌다. 청나라는 이런 전처를 밟지 않기 위해 문화와 국방력을 동시에 기를 수 있도록 노력을 했다. 이런 노력들이 빛을 발해 청나라는 다른 아시아 약소국과는 다른게 유럽 열강 사이에서도 오랜 기간 지속한 강대국이 되었다.


  그리고 이 청나라가 가장 잘나갔던 시기가 있는데, 그 시기가 바로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강건성세'였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학문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했을 뿐더러 티베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영토를 넓혀갔다. 이는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뜻하는 팍스 로마나와 비슷한 전성기를 겪었다. 오늘은 이 강건성세의 마지막을 이끈 청나라 황제 건륭제에 대해 알아보자.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



  강희제의 총애를 받은 건륭제


  건륭제, 만주식 이름으로 아이신기오로 훙리는 강희제 치세 말기 옹정제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앞서 강건성세를 이끌었던 강희제는 50년 가까이 치세를 이끌고 왔는데, 그만큼 자식도 엄청 많았다. 자기도 모르는 아들, 딸들도 엄청 많았을 강희제 였지만 어렸을 때 부터 총명했던 건륭제는 강희제 눈에 쉽게 들었다. 어려서부터 무술과 사냥 술이 매우 뛰어났던 건륭제는 쉽게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고 죽기 전 옹정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건륭제를 다음 후계자로 지목했다.


  옹정제는 12년간의 짧은 재임을 했는데, 강희제의 지목이 있었기에 건륭제는 쉽게 왕위를 물려 받을 수 있었다. 워낙 전임 황제가 뛰어났기에 옹정제 역시 많은 부담을 느꼈을지 모르나, 옹정제 역시 아버지에 못지 않은 뛰어난 치세를 통해 청나라의 번영을 가져왔다. 강희제는 대만을 정복하고, 외몽골 지역을 평정하며 외치에 능했다면, 옹정제는 내치를 위주로 나라를 다졌다. 옹정제는 군기처를 새로 설치하고, 문자의 옥을 통해 왕권을 강화 시켰다. 그리고 지정은제를 도입했는데, 지정은제란 장정에게 부과되는 정세를 지세에 포함 시켜 세금 납부를 은으로 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준가르 병사와 싸우고 있는 청군



  정복군주 건륭제의 정복 활동


  건륭제는 할어버지 강희제를 무척이나 존경했다. 25살의 나이로 재위를 물려받은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정복 활동을 시작한다. 건륭제가 주로 정복을 위해 원정을 떠난 두 지역은 위구르와 준가르 였다. 위구르는 원래 준가르의 복속하에 있었다. 준가르는 최후의 유목제국이라고 불렸는데, 유목 제국답지 않게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위구르인들은 막대한 조공을 준가르에 바치고 있었는데, 이 조공의 양이 점점 커져 불만이 쌓이게 되고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강희제때에도 준가르와 지속적으로 분쟁을 이어왔는데 건륭제는 준가르를 확실히 명말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정복군을 보내 준가르를 명말시켰다. 건륭제는 준가르 복속 이후 이들에게 엄청난 학살을 자행하면서 그간 청나라를 괴롭힌 준가르에 복수를 했다. 게다가 건륭제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위구르 인들에게 사민정책을 펼쳤다. 오늘날에도 신장 위구르 지구로 이동할 것을 지시 했다.


  졸지에 나라와 땅을 잃은 위구르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당시 위구르는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과 비 무슬림으로 나뉘어져 서로 간의 내전을 할정도로 사이가 나빴는데, 이는 청나라에게 엄청난 호재였고 손쉽게 위구르는 청나라의 손에 무릎 꿇고 만다. 


  다만 이런 정복 활동이 좋은 결과만 가져오지는 않았다. 건륭제는 버마와 베트남 정복에도 많은 힘을 쏟았는데 이는 좋은 결과는 가져오지 못하고 청나라의 국력만 쇠퇴 시켰다. 워낙 두 나라의 반격이 거셌기에 형식적인 속국을 만드는데 그쳤고, 많은 세금만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명원 전경

  문화 예술의 발전


  건륭제는 시를 짓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오전에 정무를 보고 나면 저녁엔 어김없이 시를 지으며 지냈다고 한다. 평생 4만 수가 넘는 시를 지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이 항상 일치 하지 않듯이 그의 시 대부분은 어법도 많이 틀리고 질도 낮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예술을 사랑해 궁궐 증축에도 힘썻다. 그는 아버지 옹정제가 만든 베이징에 있던 원명원이라는 후원을 좋아했다. 원명원이 서양과 동양이 서로 만나는 화합의 장이 되길 원했던 그는 이탈리아에서 온 선교사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원명원에 대한 증축을 지시했다. 카스틸리오네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바로크 양식에 중국의 미가 합쳐진 새로운 후원을 지었다고 한다.


  이처럼 건륭제는 서양 선교사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강희제와 옹정제가 가톨릭 탄압을 지시한 것과는 대조적인 대목이다. 다만, 가톨릭에 대한 공부나 이해가 이루어진것 까지는 아니어서 그들의 활동을 부분적으로 허용 했을 뿐, 국가적 차원에서 가톨릭에 대한 전파나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냥 서학에 무관심 했다고 보는 쪽이 옳을 것이다. 건륭제 당시 조선의 국왕은 정조 였는데, 이런 부분은 청과 조선의 두 국왕이 서학을 대하는 자세가 비슷했다고 보여진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 왕조와 자신의 권력에 대해 나쁜 평가에 대해서는 거침없었다. 강건성세동안 이루어진 문자의 옥은 건륭제 시기에도 지속되었다. 그는 한족이 중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조짐의 보이는 글에 대해서는 모조리 불에 태울 것을 지시 했다. 강건성세는 이처럼 세 국왕의 강력한 통제가 국가 발전을 하는데 한 몫을 했다.



청나라 권신, 니오후루 허션



  건륭제 말기, 청나라 쇠퇴의 시작


  하지만 18세기 최대 번영을 누린 청나라도 19세기 부턴 암흑의 길을 걷는다. 19세기는 정말 청나라의 흑역사라고 말할 정도로 쭈욱 내리막길만 걷다가 20세기 초에 멸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쇠퇴의 시발점은 건륭제 말기에 시작되었다. 건륭제 시기가 빛만 존재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건륭제는 절대 왕권을 이룩하기 위해 부정부패를 줄여 세수를 늘리고, 한족에 대한 탄압도 실시했다. 이는 반대파에 대한 불만의 증가를 가져왔고, 왕권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는 여전히 부정부패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 시기부터 백련교의 활동이 극심해 지게된다.


  특히, 건륭제는 말기에 니오후루 허션이라는 인물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허션은 능력이 있고 잘생긴 미남 관료였는데, 건륭제 41년 26살 나이에 호부시랑에 오른 이후로 능력을 발휘해 국고를 책임지고 탈세자들을 잡아 다시 환수 받아냈다. 그러자 4년 뒤 지금의 재정경재부 장관 격의 위치인 호부상서가 되면서 국가 권력의 노른자위로 올라오게 된다. 건륭제는 그를 너무나도 신임해 거의 국가 직책에 절반이 가까운 자리를 그에게 쥐어주었다.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안되는 엄청난 권력 양도였다. 조선의 실학자인 박지원이 호부 상서 시절 허션을 우연히 목격했는데, 그는 열하일기에서 허션을 '맑고 날카로우나 경명스럽고 덕이 없게 생겼다'라고 평가했다.


  모든 권신들이 그렇듯이 허션은 건륭제와 사돈관계를 맺는다. 이제 허션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황제의 총애를 받을 뿐 아니라 공주 까지 며느리도 두게 되자 자신에 대해 안좋은 평을 했던 사람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나간다. 또 자신의 재산을 축적하기 위해 건륭제에게는 거짓으로 보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횡포가 극심해졌다. 


  고령이 된 건륭제는 자신의 왕위를 아들인 가경제에게 물려주게 된다. 이때도 건륭제는 자주 조회에 참석하고 정무를 볼 정도로 실권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 동안에도 허션은 여전히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가경제 4년, 건륭제가 사망하게 되자 오랫동안 허션을 눈엣가시로 보던 가경제는 허션의 체포를 지시하게 했다. 처음에 가경제는 허션을 능지처참시키려고 했지만 다행히도 허션의 며느리이자 가경제의 이복 동생이었던, 고륜화효공주의 간청으로 스스로 목을 메 자살하게 되었다. 허션이 죽고 그의 재산을 전부 몰수 했는데, 무려 청나라 20년치 조세 수입치가 나왔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이 모든 것이 허션 혼자서 축적한 부였다. 그래서 당시 민간에선 '허션이 넘어지지 가경이 배가 부르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 였다.



영국으로부터 백마를 조공받고 있는 건륭제



건륭제의 치세는 정말 청나라에 도움이 되었는가?


  건륭제와 허션이 죽자 그동안 절대 왕권에 짓눌려있던 한족과 기타 이민족들이 들고 일어나게 된다. 가경제대는 특히 민란의 시대였다. 지방에서는 이민족과 백성들이, 수도와 중심지에서는 한족의 반란이 극심했던 시기였다. 이후 도광제 때는 아편전쟁으로 영국과 지속적으로 분쟁하는 등 청나라는 건륭제 말기를 기점으로 안팍으로 시끄러워 지고 계속 추락하게 된다. 


  건륭제는 지금 중국 영토를 완성시킨 사람이다. 준가르 복속 뿐만 아니라 신장 위구르 지역을 완전한 청의 영토로 만들었을 뿐더러 네팔, 버마, 베트남과의 전쟁으로 청나라의 위엄을 주변 국에 알리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세금을 낭비했고 강희제때 쌓은 많은 내수 경제를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극복하려고 허션이라는 유능한 인재를 이용해 세수를 다시 늘렸으나, 허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국가보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데 더 힘을 썻다. 그 와중에 건륭제는 허션을 너무 신임해서 그의 부정부패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젊은 시절과는 달리 말년에 많이 무능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건륭제는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군주다. 강건성세의 마지막 왕인 것 처럼 번영은 이어갔으나, 번영의 마침표도 동시에 찍은 인물이다. 그는 할아버지인 강희제를 무척이나 좋아해 많은 정책들이 그와 비슷한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이 아이러니 하게도 강희제가 쌓은 번영을 축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양면적인 모습들이 청나라의 12황제 중 가장 재밌기도 하고 이야기거리도 많은 군주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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