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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어린 시절부터 영민했던 어린아이 김옥균


 세도정치가 한창이던 1851년, 충청도 회덕군에서 당대 최고 명문가인 안동 김씨 가문에 한 아이가 태어난다. 어린 시절 부터 외모가 출중했는지 ‘백옥같이 곱고 희다’ 라는 의미의 옥균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 옥균이라는 아이는 6살 가문의 유력가였던 김병기의 양아들로 들어가게 된다. 김옥균은 어린 시절부터 문장에 능했다. 밤하늘에 뜬 달을 보고 “저 달은 크기는 매우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추는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야망과 포부가 대단한 아이였다.



박규수의 문하로 들어가 개혁사상을 배우다


 1870년대의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한창 프랑스, 미국 등 문호를 개방하려는 이양선을 상대로 조선을 지키려는 시기였다. 이떄 과거에 급제한 김옥균은 홍문관 제학을 역임하던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만나게 되었다.


 야망이 컷던 청년 김옥균에게 개화 사상은 매력적이었다. 박규수는 도탄에 빠진 조선을 구하기 위해선 세계와 문호를 개방하고 신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김옥균은 박규수의 집을 들락거리며 일본에서 가져온 지구본, 만화경을 보며 세계를 보는 눈을 키웠다.  김옥균 외에도 그의 문하엔 박영효, 서재필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과 조선의 개혁을 위한 비밀 조직을 결사하기에 이른다.




후쿠자와 유키치, 1만엔 지폐 초상권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오다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열강과 강제적이고 불평등하게 문호를 개방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흥선대원군 집권시기에 세력이 약했던 개화파가 큰 힘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개화파 동료였던 승려 이동인을 비롯해 김홍집, 유길준 등 은 미리 일본에 신문물을 배웠다.


 그러던 중 김옥균도 이동인의 도움으로 신사유람단 자격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일본의 군수공장, 공업시설을 보며 선진 과학 기술의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일본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 4개월간 머물며 그의 사상을 많이 배웠다고 한다.


 그는 일본 생활 도중 사람들이 일본의 군비증강이 조선의 자주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는 말에 속아넘어갔다. 김옥균이 정말 영민한 사람이었는지 참으로 의심스러워 지는 대목이다.


 김옥균은 일본이 아시아의 영국이 되려고 하니 조선은 아시아의 프랑스가 되어 자주 근대 독립국가기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이유 떄문이었을까 훗날 그는 조선 최초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와도 친하게 지냈는데 이는 그에게 엄청난 실수로 다가오게 된다.



친청파 묄렌도르프급진개화파 박영효




민씨 척사파와의 일본 차관 도입 문제로 맞붙다


 임오군란으로 조정 내 흥선대원군 지지세력이 몰락하고 개화파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세력이 커진 개화파는 2개의 세력으로 나눠지게 된다.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급진 개화파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화파로 나뉜다.


 그러던 중 급진개화파와 민씨 척사파가 크게 붙게 되는 계기가 발생하는데, 당시 조선은 계속되는 개화 정책으로 재정이 바닥나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두 세력은 서로 다른 방법을 주장한다.


 민씨 척사파의 묄렌도르프(정확히는 친청파)는 당오전을 발행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당백전 발행으로 조선에 인플레이션이 온 걸 이미 본 김옥균과 개화파는 이에 반대했다.


 김옥균과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차관을 빌리고 금 본위제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이미 자신이 일본의 차관을 약속 받았다는 것과 조선의 많은 금광을 활용하면 재정 개선에 큰 효과를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이 2개의 근거 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었다. 김옥균이 일본을 지나치게 신뢰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조선에 금광많았지만, 아직 금을 캘 기술을 보유하지 못했다. 타국의 금광 기술을 구입해야하는데, 이 과정에서도 상당한 금액 들어간다.


 유우부단했던 고종은 양쪽의 손을 모두 들어주고 김옥균을 보내 차관을 빌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위기감을 느낀 민씨 일가는 일본 정부에 김옥균이 비자금을 모으려고 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김옥균은 빈손으로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김옥균은 민간 채권이라도 빌릴 작정으로 은행에 갔지만, 일본 정부의 보증 없이 채권을 빌려줄 은행은 아무곳도 없었다.



갑신정변 진행도



 조선에 돌아온 김옥균, 복수를 결심하다


 결국 김옥균은 빈손으로 귀국했다. 자신이 차관을 빌리지 못한 이유가 민씨 세력의 거짓 정보라는 걸 듣게 되자 그는 크게 분노했다. 그래도 조선 재정 위기를 타계 해보자고 일본 민간 은행까지 가서 돈을 빌리려던 김옥균한테, 자신들의 조정 영향력을 위해 가짜 뉴스를 퍼뜨린 행동은 민씨 정권이 민낯을 보여준다. 지금이나 과거나 정권 싸움의 양상은 다른 점이 전혀 없다.


 김옥균의 일반 차관 도입 실패 사건은 급진개화파의 세력은 크게 약하게 만들었다. 박영효가 추진 중이던 신식 군대 도입의 조련국 사업이 취소되고, 개화파의 주장으로 설립된 신문 및 잡지 출판 기관인 박문국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차관 도입을 약속한 김옥균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모든 직책에서 해임시켰다. 재야에서도 청나라와 민씨 일파는 그에게 계속 자객을 보냈다.


 김옥균은 이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조선의 개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 상황을 반전하기 위해서 방법은 딱 하나였다. 바로 쿠데타.



우정국 전경



거사의 시작


 재야의 김옥균에게 호재가 하나 들려온다. 청나라 군대가 베트남에서 프랑스 군과 싸우기 위해 조선 주둔 군사 중 절반을 동남아로 돌린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하지만, 개화파 세력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일본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일본 공사 다케조에를 찾아가 그에게 군사 지원을 약속 받는다. 김옥균이 차관을 빌려오는데 실패한 이유를 알고 있던 그는 미안함이 있어서였는지  쉽게 김옥균의 부탁을 승낙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연회에서 사전에 설치한 폭탄을 터뜨리기로 했다. 하지만 폭탄은 불발이 되었고, 주변 이웃집에 불을 질렀다. 혼란을 틈타 서재필과 자객들은 민씨 정권 주요 인사들을 한명씩 제거해나갔다.


 급진 개화파들은 우정국에서 빠르게 창덕궁으로 뛰어가 고종에게 청나라 군대가 정변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했다. 바로 고종과 경우궁으로 들어가 새로운 정권 수립을 주도했다.



삼일 천하


 급진 개화파들은 경우궁에서 자신들을 주축으로한 내각을 발표했다. 김옥균 본인은 호조참판을 맡았고, 새 정부를 위한 14조 강령을 발표한다.


 14조 강령의 주요 내용은 청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조속한 귀국, 신분제 폐지, 단발령, 과거제 폐지 등 내용들이 담겨져 있었다.


 명성왕후 민씨는 즉각 청군에 구원을 요청했다. 한양에 군사를 이끌고 있던 위안스카이는 경우궁을 습격했다. 김옥균과 그의 일당들은 일본의 원군을 기대했으나 끝끝내 오지 않았다. 군대를 투입해봤자 질 것이 뻔했던 일본군은 갑신정변에서 발을 빼게 되고, 12월 6일 민씨 정권은 다시 고종을 되 찾는다. 김옥균이 갑신정변은 정확히 3일만에 막을 내렸다.



김옥균 암살 시도



 풍운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다.


 다케조에의 도움으로 간신히 제물포에 도달한 김옥균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 사이 자신의 친인척은 물론이고 차마 도망치지 못한 개화파 인사들은 모두 숙청당했다.  


 김옥균의 망명 생활은 파란만장했다. 일본에서 옥살이를 거듭했고, 명성왕후는 그를 죽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자객을 보냈다. 그가 존경하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연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운아적 기질을 버릴 수 없었는지, 일본에 한 여인과 연인 관계를 맺고 유흥을 즐겼으며, 오가사와라 섬에 연금 되었을 당시엔 아이들을 가르칠 정도로 삶에 대한 열정은 넘쳤다. 박영효는 이런 김옥균을 보면서 내가 저런 친구를 믿어 같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사실에 크게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김옥균은 청의 유력인사 리홍장을 만나기 위해 청나라로 떠나게 되는데, 윤치호 등 주변 인들은 신변을 걱정해 다수의 수행원을 대동할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단 한명의 수행원과 제자 와다 엔지로 둘만 데리고 청으로 떠나게 된다.


 김옥균은 청나라에 가는 도중 홍종우라는 사람과 친해지게 되는데, 그는 사실 민씨 측에서 보낸 자객이었다. 프랑스 유학생이었던 홍종우는 평소 프랑스에 대해 자주 호감을 표한 김옥균에게 있어 정말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홍종우와 친하게 지냈던 김옥균은 청나라 상해에서 그가 지니고 있던 리볼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잠시마나 천하를 손에도 넣었던 풍운아가 죽은 나이는 겨우 44세였다.



암살 이후 양화진의 걸린 김옥균의 목, (옆의 글자는 '대역부도옥균')



결과적으로 일제의 조선 침략을 앞당기다.


 김옥균이 후대 한국인들에게 지속적으로 비난 받는 이유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오래 유학을 받았던 여파인지 몰라도 그는 일본을 지나치게 좋아했을 뿐더러 너무 신뢰했다.


 그가 조선 사회를 피폐하게 만든 악의 축 민씨 정권에 대항하여 신문물을 조선에 받아들이려는 의도 자체는 좋았으나 그의 모든 일 처리는 항상 경거망동하였다. 차관 도입 실패, 갑신 정변, 홍종우 사례 처럼 그의 목적과 결과가 부합되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실제로, 갑신정변 이후 민씨 정권은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매국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쉬워졌고 자신들의 조정 영향력을 더욱 커졌다. 갑신 정변으로 조정에는 민씨 정권에 대항하는 세력들은 전부 멀어지며 조선 멸망때 까지 1당 독재체제가 지속되어왔다.


 그에게 있어 가장 가까웠던 동지 박영효와는 말년에 망명 생활 도중 크게 갈라지게 되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정계 복귀를 꿈꾸던 박영효에게 망명생활에 적응해 많은 사람들과 사귀던 김옥균이 그리 좋게 보이지 않았다. 박영효는 갑오개혁 이후 조정에 돌아가고 훗날 친일 행적으로 일본으로부터 귀족 작위까지 수여받으며 살았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 한 사실이다.


 김옥균은 머리는 비상했으나 총명하지 못했다. 매우 어리석었고 경거망동하여 일을 쉽게 그르쳤다. 조선에 근대적 제도와 문물을 도입하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정변은 조선의 개화 문을 닫게 만들었으며 조선의 멸망을 앞당겼다. 박영효가 훗날 그의 묘비명에 새긴 한줄이 정말 그의 삶을 잘 표현하고 있다.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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