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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



프랑스를 구하라


  1337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왕위 계승권 분쟁이 일어났다.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고, 1453년까지 지속된 이 전쟁이 바로 그 유명한 백년 전쟁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굉장히 우연한 사건 혹은 사람 한명으로 역사가 뒤바뀌기도 한다. 백년전쟁도 그랬다.


  15세기 초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 군의 기세는 대단했다. 프랑스 전 지역은 잉글랜드 군의 활약으로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었다. 왕세자 도팽 샤를은 대관식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 샤를 6세는 프랑스 공주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 사이에 태어나는 자식을 프랑스 왕으로 추대하는 불합리한 조약에 동의 했다. 


  샤를 도팽 황세자는 프랑스 군대를 수습해 잉글랜드에 대항했으나 전황은 매우 좋지 못했다. 대관식을 하지 못한 도팽을 압박하며 프랑스의 대도시 오를레앙으로 향하고 있었다.


성 미카엘과 성녀 가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로부터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 잔 다르크. 1911년 그림. (출처 : 위키 백과)




동레미 마을의 소녀, 구국을 결심하다.


  잉글랜드 군은 프랑스의 소도시 동레미 마을에도 들어와 민간인들을 약탈했다. 이 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13살 소녀 잔 다르크는 가족들과 잉글랜드 군을 피해 종종 피난을 가곤 했다. 그런 혼란 속에서 잔 다르크는 성 미카엘, 성녀 마르가리타, 성녀 카타리나의 모습과 함께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프랑스를 구하라”


  이 목소리를 들은 잔 다르크는 소녀의 몸으로 홀로 보쿨뢰르 지방의 영주 로베르 드 보드리쿠르에게 찾아갔다. 이 곳에 가면 영주가 자신을 황세자 도팽에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로베르는 당연히 거절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포기하지 않고 도팽을 계속 만나기 위해 시도했다.



 홀로 시농성으로 향하다.


  거듭된 잔 다르크의 구애로 영주 보드리쿠르는 그녀를 시험해보기로 한다. 그는 잔 다르크에게 6명의 기사를 내어주며 왕세자 샤를이 있는 시농성으로 향하게 했다. 보쿨뢰르에서 시농까지는 400여Km가 넘는 대 여정이었다. 심지어 시농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부르고뉴 군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을 지나쳐야만 했다. 하지만 잔다르크는 아무런 신변의 이상 없이 시농에 도착한다.


  연락을 받은 샤를 도팽 역시 처음에 그녀를 믿지 못해 초라한 옷을 입고 잔을 불러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단번에 샤를을 찾아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잔 다르크에게 비범함을 느낀 샤를은 그녀에게 유명한 기사들을 붙여 주어 오를레앙에 온 잉글랜드 군의 포위를 뚫고 성에 입성하라고 지시했다. 



1435년 백년 전쟁 상황 지도. (출처 : 위키 백과)



  잔 다르크, 잠자던 프랑스를 깨우다.


  잔 다르크는 본인이 앞장 서 오를레앙으로 향했다. 오를레앙 성은 영국군의 계속된 포위로 프랑스 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그 와중 어린 소녀가 앞장서 프랑스 군을 격퇴해 나가자 프랑스 병사들은 충격에 빠졌다. 잔 다르크는 순백의 갑옷을 입고 가녀린 몸으로 앞장서 잉글랜드 군을 물리쳤다.


  잉글랜드 군도 처음에 잔 다르크를 무시했다. 그녀가 오를레앙에 입성할 때 처음에 그냥 성으로 들어가게 두었다고 한다. 잔 다르크가 이끌고 온 군대가 성안의 식량을 더 축낼 것이며, 10대 소녀 한명이 오를레앙을 구원할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를레앙의 프랑스 군과 함께 오를레앙을 해방하는 데 성공한다. 잔 다르크는 일약 프랑스의 구세주로 등극했다. 어린 소녀의 노력은 프랑스 군 안에 있던 애국심을 고취 시키고 나라와 가족을 구하겠다는 사명감을 불러일으켰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병사에게 승리의 여신이자 전투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오를레앙 구원에 성공한 잔다르크



파타이 전투 승리


  오를레앙 전투 승리로 프랑스 왕실과 잉글랜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프랑스의 영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10대의 어린 소녀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하는데, 권력을 가진 영주들도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샤를 황태자는 잔 다르크에게 프랑스 최고의 명장 라 이르와 리슈몽 백작과 함께 루아르 강 이북 지역 탈환을 지시했다. 


  잉글랜드 군은 파타이 지역에서 고지를 점하고 프랑스 군을 막기 위해 말뚝을 설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프랑스 군이 한발 먼저 파타이에 도착했고, 장궁병 배치도 완료하기 전에 기병을 앞에서 잉글랜드 군의 옆구리를 쳤다. 속수무책으로 당한 잉글랜드는 병력이 절반 이상이 죽거나 다쳤으며, 루아르 강 이북지역과 랭스 지역을 프랑스에게 내주게 되었다.


  랭스 지역을 확보한 샤를 황태자는 대관식을 올리고 정식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 파리 피라미드 광장에 있는 잔다르크 동상



  19세의 나이로 화형을 당한 잔 다르크


  왕위에 오른 샤를 7세는 즉위 후 파리 탈환을 통해 완전히 잉글랜드 군을 몰아내자는 잔 다르크의 말을 무시했다. 오히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의 인기를 질투 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 인들에게 성녀라고 불리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 잔 다르크를 보고 프랑스 군에 온 만큼 왕실에서는 그녀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다. 


  샤를 7세는 잔 다르크에게 마땅한 지원 없이 부르고뉴 지방을 공격할 것일 지시했다. 소규모의 병력으로 콩피에뉴로 향한 잔 다르크는 부르고뉴 군에 대패하고 포로로 사로잡히게 된다. 부르고뉴는 그녀를 잉글랜드에 팔아 넘겼고, 잉글랜드는 샤를 7세에게 잔다르크를 몸값을 받고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아무런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샤를 7세는 그냥 적진에서 잔 다르크가 죽기를 바랬던 것이다. 


  잔 다르크는 결국 잉글랜드 군에게 마녀 재판을 받게 되고 마녀로 몰려 19살의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잔 다르크가 이끈 프랑스 군의 진격로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의 어머니 이사벨 로메의 노력으로 백년전쟁이 끝난 후 3년이자 잔다르크가 죽은 뒤 25년이 지난 1456년 다시 복권하게 된다. 이사벨은 잔 다르크의 업적을 수집하고 유럽의 유명한 성직자를 초청해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복권 재판을 실시했다. 결국 잔 다르크가 마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프랑스 성녀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잔 다르크의 군사적 재능도 매우 뛰어났다. 기존 중세 전투의 양상은 기사도 정신에서 비롯된 기사와 기사간의 정규전이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기사 중심이 아닌 화포 중심의 전략을 짰다. 기사와 장궁병 중심의 잉글랜드 군에게 화포 중심의 프랑스 군은 잉글랜드 군에 큰 충격을 주었다. 


  더군다나 잔 다르크는 오를레앙 수복이후 파리가 아닌 랭스를 공격했다. 이는 잉글랜드 군에게 비수로 꽂혔다. 파리는 오를레앙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군은 파리 방어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잔 다르크는 이점을 잘 알았고, 부르고뉴와 잉글랜드 국적 사이를 지나가는 루트로 돌아가 랭스까지 북상했다. 이는 엄청난 모험이었는데, 지리상으로 볼 때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군의 협공을 받기 매우 쉬웠다. 하지만, 파리 수비에 치중한 나머지 해당 지역의 방어는 소홀 했고, 쉽게 랭스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볼때 잔 다르크는 심리전에 매우 능통했다고 보여진다.


  겨우 19세의 나이로 사망했지만, 그녀가 프랑스에 미친 영향을 엄청났다. 백년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나라를 홀로 구한 구국의 영웅이자 프랑스의 성녀였다. 그가 현대 여성운동의 상징이 된 것은 이 나라의 문제 의식을 깨닫고 탁월한 능력으로 적을 물리쳐 위기의 나라를 온전한 위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한 점이 아닐까 한다. 그녀의 일생은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 지녀야할 마땅한 의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능력을 발휘해 사회의 일원으로서 노력하며 멋지게 살아가는게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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