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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옥사의 설계자 정철



동인과 서인의 갈등


  조선 초기 이이와 이황은 조선의 유교 학문을 크게 발전 시킨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자와 맹자를 자신들의 의견으로 해석하고 우리나라의 유교 사상에 큰 획을 만든 훌륭한 인물이었다. 기축옥사를 이야기 하기 전 이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는 서인의 사상적 지주로서 조선의 성리학을 완성시킨 조선 최고의 유학자임이 틀림 없었다.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던 이이 였기에 그를 따르는 선비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정여립도 그 중 한명이었다. 정여립은 이이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 올 수 있었다. 이이 본인은 붕당에 포함되기 싫어 했으나 그가 활동했던 선조 시기는 조정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두 붕당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정여립은 비록 이이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왔지만, 대표적인 동인인 이발을 만나게 되고 그와 같이 동인의 중심에서 정계 활동을 이어간다.



동인의 영수 정여립, 조정을 떠나다


  동인내 강경파인 정인홍, 이발은 대표적인 서인 인물 심의겸의 탄핵 상소를 올린다. 이 과정에서 실망한 이이, 성혼등은 조정을 떠나게 된다. 이 과정으로 붕당은 더욱 더 심화 되었고, 이이와 성혼 밑에서 문학을 공부한 정여립의 인망을 더욱 더 커졌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은 자주 모았고, 자연스럽게 동인의 영수가 된다.


  그는 동인으로서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이와 성혼을 비판했는데, 이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유교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스승에 대한 존경이었다. 학문적 비판이 비교적 자유로운 현대의 개념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우나 당시 스승에 대한 비판은 국가적은 범죄에 속했다. 정여립은 자신의 학문적 견해로 보아 스승이었던 이이, 성혼과 소견이 달랐을 뿐인데 선조는 이를 좋게 보지 않았다. 스승에 대한 비판도 서슴치 않는 정여립을 파직시키고 그는 조정을 떠나게 된다.



정여립 상상도



정여립 모반사건


  지방에 내려간 정여립은 대동계를 만들어 사람들은 모았다. 워낙 인망이 좋았던 정여립이기에 대동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다소 언행이 거칠고 무례한 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이의 학문을 배울 정도로 학문적 소양이 뛰어났던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대동계에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고 하니, 조선 중기에 활동한 다른 사상가들 보단 확실히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던 중 1589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 안악군 군수 이축, 재령군 군수 박충간 세사람으로 부터 상소가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호남지방으로 내려간 정여립이 한강이 얼어 붙을 시기가 되면 군사를 이끌고 한양으로 올것이라는 상소 였다. 화가 단단히 난 선조는 사실 관계 파악을 위해 정여립이 있는 호남에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이들이 호남에 당도 했을 땐 이미 정여립은 죽은 상태였다.


  조정에 온 보고서에 따르면 자신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정에 도달 했다는 것을 듣자 자신의 심복인 변승복과 같이 다른 도주를 시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진안 현감이 그를 추격하자, 불리해진 정여립이 변승복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 했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은 사건이다.



기축 옥사, 조정에 분 피바람


  화가난 선조는 정여립의 자택의 조사를 명령했다. 위 사건에 대한 조사 총 책임자는 서인 정철으로 발탁했다. 정철은 정여립 모반 사건을 조사하면서 그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인물이라면 모두 잡아 들였다. 정여립과 친했던 동인의 영수 이발은 물론, 동인 쪽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인물이라면 모두 죽일 것을 명령했다. 정철은 동인의 중심이었던 이발을 잡기 위해, 정여립 사건 관련 인물들에게 이발이 모두 꾸민 일이라고 자백 할 것을 지시했다.


  선조의 비호를 받은 정철은 미친듯이 동인들을 잡아들인 결과 자신을 비롯한 서인이 조정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정철에 의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던 동인들은 모두 조정을 떠나거나 세상을 떠났다. 권력에 정점에 선 정철도 그리 오래 가진 못했는데, 서인의 세력이 너무 켜졌다고 생각한 선조는 그를 쫓아낼 구실을 계속 생각했고, 마침 정철이 광해군 책봉을 주장하자 이를 빌미로 그를 유배 보내게 된다.


선조 어진



정여립은 정말로 모반을 기획했는가?


  정여립 모반 사건은 의심스러움이 정말 많다. 그의 일련의 행동으로 볼때 그가 정말 반란을 꾀했는지 의심스럽다. 조정에 반란 상소가 도착했다는 사실을 들은 정여립이 도주를 시도했다고 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여립은 모반에 관련된 증거를 파기하지 않고 집에 그대로 두었다. 게다가 그는 도주를 하면서 대동계 일원들과 가족들에게 자신의 행선지를 밝혔는데, 반란 혐의를 받고 도주하는 사람이 자신의 행선지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갈리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꾸준히 반체제적 성향을 보여 왔다는 점도 정여립 모반을 일으켰다는 걸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었다. 반체제적 발언은 물론 이거니와, 그가 자신의 스승을 비판하고 있고, 선조로 부터 미움을 샀다는 점들이 이 사건이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동인을 몰아낼 구실을 찾던 서인에게 정여립은 최고의 먹잇감이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과 기축옥사로 이어지는 정치 양상은 조선 중기 급변하고 있던 조선의 정세를 낱낱이 보여준다. 기축옥사 이후 머지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조선의 전성기는 완전히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기축옥사로 동인은 물론 조정에 도움이 될 인재들 모두 조정을 떠나게 되었고, 곧바로 일어난 임진왜란에서 인재난을 겪으며 왜군에 한반도를 유린당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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