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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셀주크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장군이자 통치자


VS


1세기만에 멸망한 속빈 강정 셀주크 제국을 만든 주범이자 전쟁광


  현 시점의 많은 중동 국가들은 오일 머니에 힘을 입어 다시 성장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구의 헤게모니를 쥔 국가는 미국과 유럽일 것이다. 하지만, 중세 유럽으로 돌아가자면 지금의 강대국 역할을 하는 국가는 북미나 유럽이 아닌 바로 중동 지역이었다. 특히나 중세는 중동 지역의 힘이 대단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럽에게 공포의 대상을 한 나라가 있었는데 바로 셀주크 제국이다.


  셀주크 제국의 팽창은 유럽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나 이들과 국경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던 동로마 제국은 더욱 그랬다. 이는 동로마와 셀주크 국가간의 대결로 그친 것이 아니라 카톨릭과 이슬람의 종교적 색채가 매우 강했다. 바티칸의 교황청은 동로마 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끔찍한 상황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 반대로 셀주크 제국은 국가의 팽창과 더불어 이슬람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넘어 바티칸으로 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이 셀주크 제국을 상징하는 술탄 말리크샤에 대해 알아보자.




생애 및 업적


  • 1055년 8월 16일, 이스파한 교외 출생

  • 1066년, 아버지 알프 아르슬란에 의해 셀주크 제국의 황태자로 지목

  • 1071년, 아르슬란의 시리아 원정에 참여

  • 1072년 12월 15일, 부왕 아르슬란이 사망하며 셀주크 3대 술탄으로 등극

  • 1073년 5월, 숙부 쿠부르트의 군대를 격파하며 셀주크 제국 내 통치권 확보

  • 1086년 5월, 투투쉬를 견제하며 시리아 일대 장악

  • 1092년, 재상 니잠 알물크가 괴한에게 사망하며 지위권 상실

  • 1092년 11월 19일, 바그다드 인근에서 사냥 도중 괴한에게 사망

 


알프 아르슬란 상




주요 활동


  7세기 무함마드의 출현은 이슬람의 시대가 왔음을 대변했다.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앞세운 이슬람 제국은 과거 페르시아가 누렸던 영광의 몇배나 큰 대 영광을 누린다. 특히 8세기 우마이야 왕조 당시 정점을 찍고, 지브롤터를 넘어 프랑스 지방까지 위협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영광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의 반격과 내부 분열로 찢겨 나간 이슬람 제국으로 새로운 전국 시대가 열린다. 그리고 이를 수니파가 제압하면서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게 된다. 바로 이때 성립한 국가가 그 유명한 셀주크 제국이다.

  셀주크 제국은 성립과 동시에 빠르게 팽창했다. 대표적으로 가즈니 왕국과의 세력싸움에서 승리하며 비로소 셀주크 왕조가 이슬람의 패권을 쟁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셀주크 세력은 1대 술탄 투으룰의 선언으로 이슬람 최강의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투으룰은 다스려야 할 영토가 너무 넓어 그의 동생인 차으르와 절반으로 나눠 제국을 통치했다. 이윽고. 투으룰이 사망하게 되는데 그는 후손이 없었다. 그래서 2대 술탄으로 차으르의 장남인 쉴레이만이 지목하게 되는데 그의 먼 형제인 알프 아르슬란이 군대를 동원해 셀주크 제국을 차지하게 된다. 비로서 알프 아르슬란은 주변 세력들을 모두 제압하고 제2대 술탄이 되어 셀주크 제국을 확장 시킨다.


  알프 아르슬란은 셀주크 제국의 술탄이 되고 한 제국을 위해 일할 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그가 바로 니잠 알 몰크이다. 니잠 알 몰크와 알프 아르슬란은 군대를 양성해 셀주크 제국을 본격적으로 확장 시킨다. 이 둘을 카스피 해 연안에 있는 아르메니아 지역과 조지아 지역까지 정복하면서 점차 서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시리아지역을 정복한 이들은 동로마제국과 맞서게 된다. 몇번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동로마 제국의 로마누스 4세는 호기롭게 셀주크를 정복하기 위해 아르메니아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아르슬란은 만차케르트에서 동로마 제국의 대군을 상대로 대규모 승리를 거두며 로마누스를 잡는 쾌거를 이룬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슬람 국가와 동로마 제국의 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알프 아르슬란의 아들이자 셀주크의 왕자 말리크샤 역시 아버지와 함께 숱한 전투에 참가하며 전쟁을 몸소 체험한다. 말리크샤는 아르슬란이 술탄이 되기 직전인 1055년 8월 16일에 태어난다. 10살이 되던 해 카라한 왕조의 공주 테르켄 히툰과 결혼한 그는 1066년, 아버지 아르슬란으로 부터 정식 후계자로 지정된다. 아르슬란은 시리아 원정과 동로마 제국과의 전투에도 아들을 데리고 다니며 후계자 수업을 시작한다. 게다가 전쟁에 대한 오랜 경험으로 제국 내에서의 지위를 드높이는 1석 2조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제국 최고의 지략가 니잠 알몰크에게 자신의 아들을 부탁한다. 


  숱한 전투에서 맹활약 하던 아르슬란 이었지만 지휘관의 전쟁 참가는 항상 목숨의 휘험이 따른다. 유수프와의 전투에도 참가한 아르슬란은 그의 단검을 피하지 못하고 가슴에 상처를 입게 된다. 결국 큰 부상을 당한 아르슬란은 정확히 나흘 후 사망하고 그의 나의 42세로 죽게 된다. 죽기 직전 그는 자신이 죽은 이유가 자만심 때문이라는 말을 아들에게 남기며 조심하라고 일러준다. 그때 말리크샤의 나이는 겨우 17세 였다. 갑작스러운 술탄의 사망은 국가의 혼란을 가져왔다. 아르슬란의 형은 쿠부르트가 자신이 연장자임을 내세우면서 말리크샤에게 왕위를 내놓으라고 요청했다. 새로운 술탄 말리크샤는 당연히 거절했고, 쿠부르트는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을 점령했다.

  졸지에 수도를 숙부에게 빼앗긴 말리크샤 였지만 그는 10대에 나이 답지 않게 침착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참가한 것이 득이 되었다. 말리크샤는 자신의 측근들을 활용해 군대를 모으고 쿠부르트와 결전을 벌인다. 3일간의 치열한 내전 끝에 말리크샤는 승리하고 다시 술탄의 자리를 되찾는다. 말리크샤는 숙부를 사로잡았는데, 쿠부르트가 시골로 내려가 조용히 살겠다고 하자 그는 흔들렸다. 하지만, 셀주크의 재상 니잠 알몰크는 훗날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 그를 처형하기를 강력히 주장하고, 결국 쿠부르트의 난은 제압된다. 내전 당시 튀르크족의 장수로 사 말리크샤의 편에서 싸운 아르투크는 그로부터 예루살렘 총독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 아르투크가 훗날 아르투크 왕조의 시초가 된다.



니잠 알물크 상




  6개월 간의 내전은 셀주크 제국은 나약하게 만들었다. 3대 술탄 말리크샤의 목표는 아버지가 만든 강력한 제국의 재건이었다. 그의 첫번째 목표는 카라한 왕조와 가즈니 왕조가 차지한 호라산 지방을 다시 뺏어 오는 것이다. 셀주크 제국의 동로마 제국과의 결전을 벌이기 위해선 동쪽 방면 부터 정리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게다가 호라산 제독이었던 말리크샤의 동생 아야즈가 카라한 군대에게 목숨을 잃은 뒤라 동생에 대한 복수도 있었다. 그는 서카라한 조의 나스르 칸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말리크샤의 여동생인 아이사와 혼인 관계였는데다가 아내인 테르켄의 오빠였다. 하지만 제국의 확정을 위해서는 처남이자 매부인 그와의 결전도 필요했다. 말리크샤는 이들을 몰아내고 카라한의 수도 사마르칸트까지 점령했고, 항복을 받아낸다. 결국 카라한은 셀주크의 속국신세가 되고, 동쪽 국경의 수비를 담당하게 된다. 

  동쪽의 후환을 없앤 말리크샤는 이제 서쪽으로 눈을 돌린다. 아르슬란이 일찍이 정복했던 아르메니아 지역에 다시 들어갔다. 아르슬란으로 부터 아르메니아 총독으로 임명된 야그마를 임명했는데, 아르슬란이 사망한 틈을 타 샤다드 왕조가 다시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이다. 말리크샤는 샤다드 왕조를 정복하기 위해 다시 캅카스로 향했다. 말리크샤는 1075년 캅카스로 대규모 원정을 향했고, 수도 간자를 정복하며 다시 한번 아르메니아 지역의 주도권을 가져온다.

  이에 위기를 느낀 카케티 왕국과 조지아 왕국은 연합하여 말리크샤에 대항하기로 한다. 이 둘의 연맹은 꽤나 강력했다. 말리크샤로부터 캅카스 총독으로 임명된 사브 테긴이 연합군을 상태로 패전하게 된다. 결국 말리크샤는 조지아 왕국, 카케티 왕국과는 화합을 시도한다. 셀주크의 본영과는 거리가 꽤 먼 지역이고, 동로마 제국의 침입이 더 위협적인 상황에서 조지아, 카케티와의 전쟁을 그리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 두나라는 셀주크 제국의 동맹국으로 국가를 유지하게 된다.


  말리크샤의 다음 상대는 튀르크 족의 룸 술탄국이었다. 이들은 원래 셀주크 제국과 동맹 관계 였지만 아르슬란이 죽은 뒤엔 적대적으로 면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룸 술탄국을 아군으로 만들어 놓아야만 했다. 룸 술탄국의 국왕은 쉴레이만샤 였다. 이 둘은 기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완벽한 동맹의 관계는 아니었다. 로마누스 4세의 죽음 이후 동로마 제국은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황제 미하일 7세는 니키포로스 3세에게 탄핵을 당할 만큼 왕권이 추락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쉴레이만샤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동로마 제국은 쉽게 무너 질 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쉴레이만샤가 시리아 침공 도중 대패하고 사망하게 되면서 천운이 말리크샤 쪽으로 온다. 룸 술탄국은 많은 동로마 제국 영토를 차지 하고 있었는데, 군주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레반트 지역에 통일 정권을 세우려던 그의 목표가 좌절된다. 결국 룸 술탄국의 여러 지방 세력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말리크샤는 이틈을 놓치지 않고, 동로마 제국으로 향하는 안티오크 지방을 차지한다. 그리고 야기 시안을 총독으로 세운다.



셀주크 제국의 상징




  1086년 5월 바로 시리아에서 쉴레이만샤를 좌절시킨 투투쉬가 셀주크의 견제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말리크샤도 이에 지지 않고 시리아로 향했다. 그는 시리아의 알레포 지역을 투투쉬보다 발빠르게 점령하면서 그의 발을 완전히 묶어 놓게 된다. 투투쉬는 말리크샤가 죽기 직전까지 다시 셀주크를 공략하지 못하고 내정에 치우치게 된다. 


  말리크샤가 대외 정복활동을 위해 나라를 비우는 동안 내정은 니잠 알몰크가 책임지고 있었다. 셀주크의 명재상 니잠 알몰크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내정을 탄탄히 다지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명성이 뛰어났고 오랜 시간 말리크샤가 궁궐을 비우게 되자 둘 사이도 서서히 틀어지게된다. 말리크샤의 장남 다우드와 차남 아흐마드가 연이어 사망하게 되자 니잠 알 물크와의 갈등은 더욱 거세진다. 니잠 알 물크와 황후 테르겐이 서로 다른 후계자를 지목하게 되자 셀주크 제국은 파벌이 갈리게 된다.

  그러던 와중 니잠의 아들이었던 자말이 부친을 모함한 자를 자기 멋대로 죽이는 사건이 멀어진다. 말리크샤는 자신의 허락 없이 사람을 죽인 자말에게 화가 나 그에게 사약을 내린다. 아들의 죽음에도 니잠은 조용히 넘어갔지만, 둘 사이가 틀어졌음은 이제 셀주크 백성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둘 다 직접적으로 행동하진 않았는데, 둘은 여전히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기 떄문이다.


  1092년 니잠 알물크가 이스파한에서 바그다드로 이동하던 도중 괴한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니잠 살해 사건은 정확한 범죄자가 누군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술탄이 죽인 것이라고 믿게된다. 가장 유력한 설은 니잠의 정적이었던 타즈 알 물크가 시킨 괴한 들이 살해했다는 것이었다. 워낙 신망이 높았던 니잠이었기에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신봉자들이 존재했고, 결국 그들에 의해 타즈 알 물크도 이듬해 사망한다. 말리크샤는 자신에게 큰 힘이 되고 있던 재상을 잃게 되었고, 말리크샤의 미래에도 먹구름이 찾아온다. 

  1092년 11월 19일 말리크샤가 사망 도중 사망하게 된다. 유력한 사망 배후로는 칼리프 알묵타디르가 지목된다. 말리크샤는 애초에 알묵타디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수시로 그를 폐위 시키고 자신의 조카를 칼리프에 올릴려고 했다. 결국 니잠이라는 거대한 방어막을 잃은 말리크샤는 칼리프에 의해 허무하게 사망하게 된다. 말리크샤가 만든 거대한 제국 셀주크도 그가 죽고 나서 순식간에 사분오열 되며 쇠퇴의 길을 걷는다. 훗날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세력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할 때 까지, 이슬람 세력은 십자군 원정과 내전으로 사분오열 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셀주크 제국 강역




이슬람과 셀주크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장군이자 통치자


  아르슬란과 말리크샤 부자 기간의 셀주크는 이슬람과 동로마제국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말리크샤는 아버지 아르슬란 만큼은 아니었지만, 주변 국가들에게 충분한 위협을 주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제국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건 말리크샤의 카리스마 덕분이었다. 세력을 넓히는 데 주력한 말리크샤와 내정을 다진 니잠 알몰크의 조화는 훌륭했다. 말리크샤가 마음껏 정복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니잠 알몰크의 역할이 컸고, 지방 분권적인 이슬람 세력의 구조에서 니잠이 셀주크의 내실을 탄탄히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말리크샤의 카리스마카 큰 역할을 했다. 둘은 싫으나 좋으나 서로에게 큰 의지가 되고 있었다.

  이슬람 세력은 특히나 지방 분권적이다. 이슬람 제국 분열 이후 각자 파벌로 나뉘어 사분오열하고 있었는데, 이 세력들을 아우른 것은 셀주크 제국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셀주크, 제국이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말리크샤가 이룩한 업적 자체는 정말 대단한 일이다. 넓은 서남아시아의 강력한 영토를 제압하기란 여간 힘든일이 아니다. 이 시기의 셀주크 제국은 중국, 인도와 서쪽으로 국경을 맞닿았고, 북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지역까지 도달했으며, 동쪽으로는 터키와 시리아의 영역까지 진출한 어마어마한 대제국을 이룬 것이다. 이는 이슬람의 창시자 마호메드에 필적하는 성과이다.


  특히나 그는 훌륭한 장군이었다. 이는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이어 받고, 어려서 부터 많은 전쟁에 참여하며 얻은 경험이다. 타국의 군주들은 그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말리크샤에게 대항하는 것이 큰 이득이 아니었기 떄문이다. 그가 없었다면 셀주크 제국은 진작에 분열 되었을 것이다. 아르슬란의 사후 많은 지방 세력들이 셀주크에 반란을 일으켰는데, 말리크샤가 아니었다면 이를 전혀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고 셀주크 제국의 분열은 실제 시점보다 훨씬 빠르게 찾아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있었기에 셀주크 제국이 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1세기만에 멸망한 속빈 강정 셀주크 제국을 만든 주범이자 전쟁광


  말리크샤가 이룩한 대 영토는 사실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저 지도 상에서 그어지는 선만 넓힌 것이지 실제로 그 영토가 셀주크 제국의 영향력 안에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냥 말리크샤와 전쟁을 하기 싫어서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을 것 뿐 그 영토들을 어짜피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전혀 쓸모없는 땅따먹기를 한 것이다.

  국가와 문명이 오랜 기간 유지되기 위해서는 국방력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백성들의 사상과 지적 수준, 그리고 내가 국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리크샤의 셀주크는 국방력에만 너무 치우쳐 사상누각을 세웠을 뿐이다. 말리크샤의 죽음이라는 촉매제가 발생하게 되면 곧바로 무너져 내릴 속 빈 강정 이었을 뿐이다. 말리크샤가 죽자마자 셀주크의 광활한 영토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재밌는 사실을 말리크샤가 죽고 곧바로 유럽에서 시작된 십자군 원정으로 이슬람이 쑥대밭이 된다. 말리크샤 사후 사분오열된 이슬람 세력은 유럽의 원정군을 전혀 막지 못한다. 말리크샤의 땅따먹기가 이슬람 세력 전체에게 독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가 조금 더 완전한 셀주크를 세웠다면 1차 십자군 원정에서 그리 쉽게 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말리크샤는 정말 정복을 위한 정복을 한 것이다. 셀주크를 강하게 다져나가지 않고 타국을 무너뜨리는 것을 즐겼을 뿐이다. 적을 마음으로 사로잡지 못하고 힘으로 사로잡으니 그가 죽자마자 그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된것이다. 삼국지의 제갈량이 맹획을 왜 7번이나 사로잡았다가 풀어주었는가. 전쟁은 힘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는 니잠을 너무 믿었다. 물론 그가 이슬람 최고의 명재상임은 맞으나, 아무리 니잠이 뛰어나도 그는 재상이다. 가끔은 술탄이 백성들 앞에 나타나 백성들을 독려하고 셀주크 제국의 일원임을 일깨워야 하는데, 말리크샤는 그런 면이 부족했다. 확실히 부자가 전쟁 쪽으로는 뛰어나지만 정치 쪽으로는 별볼일 없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니잠이 아니었다면 둘 다 진작에 정적들에 의해 살해되었을 지도 모를일이다.



총평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에 비해서 내정은 한참 못미쳤다. 후계자 문제로도 고생한 것으로 봐 전형적인 전투형 군주였다. 부전자전이라고 내정은 그저 니잠에게 일임하고 본인들은 정복 전쟁에만 힘써 아주 짧은 셀주크의 전성기를 만든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오스만 제국은 셀주크 제국의 실패를 빠르게 수정해 비교적 오랫 동안 유럽을 위협하는 대제국을 발돋움 했다. 셀주크는 지리적 이점과 군사적 우위를 모두 가지고도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는 아르슬란-말리크샤 부자의 잘못이다.


  이에 반해 전쟁 수행 능력은 정말 대단한 군주다. 이슬람 출신 인물 중 이렇게 영토 확장을 순조롭게 한 군주가 있었을 까 싶을 정도로 전쟁에 있어선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정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건 말리크샤의 위대한 능력 덕분이다. 17세의 나이로 내전을 평정하고 40대에 중동 지역을 전부 손에 넣었으니, 정복 작업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위대한 능력이다. 단점과 장점이 너무 명확한 군주다.


  말리크샤의 셀주크는 이슬람 세력의 특징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가톨릭 만큼이나 분파가 다양하고 깊이가 깊은 학문이 이슬람이다. 수니파의 현자 칼리파 문제로 골머리를 썩힌 것을 보면 이슬람과 카톨릭이 상당히 많은 부분 닮아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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