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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과 그리스도의 부흥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


VS


성지에 미쳐버린 가톨릭의 광란의 이슬람, 유대인 학살 전쟁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프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했다. 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며 번영을 이끌던 동로마 제국도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현 이스탄불)도 더이상 안전하지 못했다. 셀주크 재국은 레반트 지역 깊숙히 들어와 콘스탄티노플을 코앞에 두고 동로마 제국을 압박했다. 그들의 운명은 얼마 남지 않은것 처럼 보였다.


  반면 바티칸의 교황청의 기세는 나날이 강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조차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로마 시대에 교황청을 세운 이후 가장 강력한 교황권이 유지되고 있었다.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 교황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동안 바티칸 교황청과 날을 세운 동로마 제국도 국가의 위기가 닥치자 고개를 숙였다. 교황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한다.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이 가톨릭을 탄압하고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며 교황에게 SOS를 요청했다. 당시 교황인 우르바노 2세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장장 3세기에 걸친 가톨릭과 이슬람의 전쟁이자 서방과 동방 세력의 전쟁인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다.



1차 십자군 원정 주요 사건


  • 1071년 8월 26일,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셀주크에게 대패

  • 1081년 4월 1일,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가 황제로 등극

  • 1088년 3월 12일, 우르바노 2세 로마 교황청의 새로운 교황으로 등극

  • 1095년 11월 18일, 클레르몽 공의회 시작, 교황의 십자군 원정 호소

  • 1096년 12월 23일 로렌의 고드프루아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

  • 1097년 1월 20일, 알렉시오스 1세가 고드프루아를 제압하고 충성의 맹세를 받아냄

  • 1097년 4월 경, 십자군 원정군 콘스탄티노플로 도착 완료

  • 1097년 6월 19일, 십자군,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 정복

  • 1097년 7월 1일, 도릴라이움 전투에서 십자군이 대승

  • 1098년 6월 2일, 십자군의 안티오크 성 점령

  • 1098년 10월 경, 십자군의 예루살람 원정 시작

  • 1099년 6월 6일, 예수의 고향 베들레헴 점령

  • 1099년 7월 15일, 고드프루아의 원정군, 예루살렘 성벽 파괴

  • 1099년 8월 1일, 예루살렘 왕국 성립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 세력도



전쟁의 경과


  11세기 말 교황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가톨릭이 부흥하면서 유럽 곳곳에 퍼진 사제들의 헌금은 점차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갔다. 심지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교황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1088년 교황에 오른 우르바노 2세는 스페인을 탈환하고 시칠리아 지역을 회복하면서 세력을 점차 불려 나갔다. 바티칸 교황청은 동방 정교회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우르바노 2세는 동로마 제국과도 우호의 제스쳐를 보내면서 이례적으로 서방과 동방의 교회가 서로 우호 관계를 맺는 대 업적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이제 동방 정교회와 바티칸 교황청은 하나라고 주장하면서, 하느님께서 성지 탈환을 원한다고 선언을 한것이다. 교황이 본격적으로 군대를 모았다. 교황의 선동에 힘입어 많은 유럽의 제후들은 서로 눈치를 봤지만, 이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교황의 한마디에 벌벌 기는 광경을 본 제후들은 교황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해 울며겨자먹기로 병력을 동원한다. 일부 제후들은 이번 원정을 계기로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해 참가하기도 했다. 교황 입장에서는 십자군 원정으로 동방 정교회를 누르고 동서방 교황청을 통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동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콘스탄티노플 코앞에 다가온 셀주크 제국의 군대를 막아야 했다. 각자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지며 1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모인다.


  유럽의 쟁쟁한 제후들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필두로, 로렌 공작인 부용의 고드르푸라, 그의 형 외스타슈 3세, 부르의 영주 레텔의 보두앵, 타란토 공작 보에몽과 사촌 살레르노의 리처드,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 블루아 백작 에티엔 2세 등 인물들 한명 한명이 매우 화려했다. 모인 군대의 수는 약 8만이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모여 교황과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나갈 준비를 마친다.

  물론, 모든 영주들이 순순히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로렌 지역의 고드프루아가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팔아 치울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다. 고드프루아는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하는 중에 헝가리 영토를 지나가야 했다. 과거 민중 십자군의 피해를 극심하게 받은 헝가리는 고드프루아에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그는 헝가리 왕 칼만에게 인질을 잡아 간신히 통행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도달한 콘스탄티노플이었는데,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자신에게 충성을 요구한 것이다. 고드프루아는 과거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바가 있어서 이를 거부했다. 결국 화가난 알렉시오스 1세는 그의 군대에게 시장 이용을 금지 시켰고, 군량이 필요했던 고드프루아는 콘스탄티노플 교외지역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는 이를 막기위해 병력을 출동 시키면서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을 떠나기도 전에 교전을 펼친다. 초기엔 고드프루아의 병력이 우세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장벽을 높았다. 황제의 사위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가 나서서 고드프루아의 병력을 저지했다. 결국 동로마 제국이 고드프루아에게 시장을 허용하고, 고드프루아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간신히 십자군 전쟁의 내분을 끝냈다. 이 날이 1097년 1월 20일이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노 2세




  1097년 4월 십자군 원정군이 다 모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들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를 공격했다. 이미 민중 십자군을 손쉽게 격파한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은 이들은 그렇게 무섭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클르츠 아르슬란은 말라티아 공략을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을 얕잡아보고 수도를 돌아가지 않고 말라티아 공략을 계손 진행했다. 그의 눈에 비친 원정군은 유럽 각국에서 와 호흡도 맞지 않는 오합지졸에 불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병력의 숫자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니케아는 순식간에 포위당했고 클르츠 아르슬란은 급히 니케아로 복귀했다. 그는 반격을 시도 했지만 쉽게 격퇴당하고 아나톨리아의 중부인 콘야로 도망가게 된다. 그리고 니케아에 남은 병력이 알렉시오스 1세에게 항복하게 되면서 십자군의 첫번째 교전은 십자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다. 룸 술탄국의 수도 니케아에 동로마 제국의 깃발이 꽃히게 된 것이다.

  오랜 기간 수도를 비워둘 수 없었던 알렉시오스 1세는 우선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의 대리인으로 동로마 제국의 장군 타티키오스가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6월 26일 십자군은 레반트를 향해 출발한다. 한번 패전을 겪은 클르츠 아르슬란은 다니슈멘드와 동맹을 맺는다. 십자군은 총 2개의 길목으로 나누어져 안티오크로 향했다. 가는 도중 도릴라이움에서 술탄을 십자군을 저지하기 위해 매복을 시도했다. 룸 술탄국과 튀르크 동맹군은 보에몽의 선발대를 기습하여 이들은 격파한다. 특히나 튀르크의 따른 기병들에 전혀 대처를 하지 못했다. 이들은 보에몽의 군대를 포위하며 압박을 지속했다.

  그러자 타티키오스의 군대가 빠르게 합류하여 튀르크 군을 막아섰다. 이들은 투창을 활용해 튀르크의 기병에 응수했다. 이 상황이 무려 7시간이나 소요되며 엎치락뒤치락 치열한 전투를 지속했다. 양국이 지쳐갈 때 레몽과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본대가 도착하면서 전세는 십자군 쪽으로 기울게 된다. 술탄은 니케아에 이어 도릴라이움에서도 패전을 겪게된다. 특히나 이번 원정으로 십자군은 막대한 물자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무슬림들에게 십자군에 대한 공포심을 제대로 심어주었다. 이들은 3개월간 룸 술탄국의 아나톨리아 지역을 굴복해 나갔다. 그리고 과거 동로마 제국의 도시이자 셀주크 제국의 서부 방어의 중심지 안티오크에 도착한다.


  4만명의 대 병력이 안티오크를 포위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셀주크 제국을 다스렸던 말리크샤 1세가 살해당하고 셀주크 제국은 왕권 쟁탈전으로 극심하게 피폐해졌다. 10년전 만 하더라도 강력했던 대제국은 속빈 강정이었다. 과거 말리크샤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안티오크의 성주 야기 시얀은 셀주크 제국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셀주크는 도와줄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방어 요새 역할을 했던 안티오크의 성벽은 여전히 높았다. 십자군에게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점차 날씨가 추워지고 셀주크에서도 원군을 보낸 움직임을 보이자 십자군에게 위기감이 서서히 생겨났다.

  시간은 무슬림의 편이었다. 점차 전투의 기세는 안티오크 수비군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다. 군량이 떨어진 십자군은 적군의 시체를 먹어가면서까지 근근히 버티는 수준이었다. 셀주크도 지속적으로 원군을 보내며 십자군을 괴롭혔다. 십자군은 살기위해서 주변 지역을 약탈하면서 버텼다. 그리고 이는 오히려 무슬림의 반감을 사게 되어 그들의 결속을 다지는 원동력이 되었다. 안티오크는 가톨릭과 이슬람의 국경에 위치하고 있어 성 내에 가톨릭 신자들이 제법 있었다. 기세를 올린 수비군은 안티오크 가톨릭 총대주교를 성밖에 매달아 십자군을 조롱했다. 동로마 제국에서 보내는 지원도 점점 줄어 들면서 십자군에게 패색이 짙어져갔다.

  안티오크 점령군 지휘관 보에몽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안티오크 수비대 대장인 피루즈가 아르메니아인인 점을 활용하여 그를 매수하게 된다. 보에몽은 피루즈에게 자신의 아들을 인질로 맡기고 안티오크 점령시 지휘권을 줄 것을 약속 받았다. 1098년 6월 2일 십자군은 카르부가를 상대하기 위해 떠났고, 안티오크 수비대는 기뻐했다. 하지만 이는 보에몽의 계책이었다. 수비군들이 환호하는 틈을 타 피루즈가 안티오크의 성벽을 열었고 그 사이 숨어있던 십자군이 안티오크 성 안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랜 시간 고통을 받던 십자군은 튀르크인들을 보이는 족족 죽였다. 수개월 간 농략을 당한 십자군은 이를 그대로 갚았고, 안티오크에서 대학살이 일어났다. 야기 시안은 급히 달아났지만, 아르메니아 인들이 그를 잡아 그의 목을 십자군에게 바쳤다.

  이에 놀란 카르부가가 급히 안티오크로 향해 십자군이 점령하고 있던 성을 재포위했다. 안티오크는 농성전으로 흘러가게 되면 절대적으로 수비측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카르부가는 잘 알고 있었다. 카르부가는 성을 포위하고 십자군 병력이 성문을 열고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십자군은 카르부가가 원했던 대로 움직였다. 이들은 성문을 열고 카르부가의 부대와 전면전을 펼친다. 그리고 카르부가는 대패하게 된다. 십자군은 카르부가의 생각대로 움직였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다. 와해 직전의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령하면서 다시금 힘을 얻게 된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그사이 안티오크 지휘권 문제가 십자군을 갈라놓게 된다. 안티오크 점령의 1등 공신이던 보에몽은 이 성의 지휘권이 자신한테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또다른 공신이었던 레몽은 안티오크와 같은 성지가 세속적으로 관리되어서는 안된다며 보에몽의 지휘권을 부정했다. 반면 국가 멸망의 위기를 벗어난 알렉시오스 1세는 더이상 국력을 소모하기 싫었기에 셀주크와 강화를 맺고 십자군에게 귀환을 명령함과 동시에 안티오크의 지휘권을 반환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안티오크 성앞에서 생고생을 한 십자군은 지원도 제대로 안해주고, 궁궐에서 편히 쉬고 있었을 알렉시오스의 지휘권 반환 및 회군 명령을 납득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최종 목표는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했다. 십자군은 알렉시오스 황제를 배신자라고 말했으며 황제에게 했던 충성의 맹세를 파기한다. 

  그사이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앵은 칼리키아로 원정을 떠난다. 안티오크 공략이 한창이던 1097년 가을에 킬리키아로 떠난 보두앵은 튀르크군이 점령하던 타르소스를 포위했다. 타르소스에는 기독교 인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보두앵의 원정군을 크게 반겼다. 탐욕의 화신 보에몽은 보두앵의 활약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보에몽은 자신의 조카인 탕그레드에게 킬리키아 원정에 참여 할 것을 지시했다. 이 둘은 같은 동맹이면서도 더 많은 공적을 쌓기위해 대립했다. 동로마 제국에 반대 입장을 취한 보에몽과 탕그레드는 킬리키아 지역의 영토를 모두 자신들의 손아귀로 넣었다. 반면 보두앵은 수복지역을 모두 동로마제국에 반환했다. 튀르크 인들은 동족을 학살하던 탕그레드보단 보두엥을 반겼다. 결국 에데사의 지사였던 토로스가 보두엥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현지인들 역시 그를 열렬히 환호했다. 그리고 1098년 3월 7일 쿠데타가 발생하여 탕그레드를 볼아내고 보두앵이 에데사의 통치차로 오르게 된다. 보두엥은 자신을 반겼던 토로스를 살려주었지만, 에데사 시민들은 그를 잡아 죽였다. 그렇게 고드프루아의 동생 보두엥은 최초의 십자군 국가인 에데사 백국의 군주에 오르게 된다.


  안티오크에서의 레몽과 보에몽은 여전히 날을 세우고 있었다. 11월 5일 성 베드로 성당에서 회의를 통해 보에몽은 속히 레몽에게 안티오크를 떠나 예루살렘을 공략 할 것을 지시했다. 여론에 밀린 레몽은 결국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보에몽은 레몽에게 자신도 원정에 참여할 것을 약속했으나 지키지 않았다. 그의 눈에 예루살렘 공략은 터무니 없는 일이라 생각했고, 자신은 안티오크 지휘권 유지에 만족했기 때문이다. 레몽이 예루살렘으로 원정을 떠나 죽게 되는 것이 그에게는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레몽의 원정군은 1098년 겨울 마라트라는 소도시를 점령했다. 여전히 보에몽과 로마제국의 지원은 이루어 졌으나, 그들이 나아가야할 원정 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레몽과 그의 십자군들은 당도하는 모든 도시들을 약탈해가며 간신히 식량을 유지했다.  

  이때 상황을 반전하는 한가지 소식이 들려온다. 바로 로마 황제의 안티오크 친정 선언이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과거 자신에게 했던 충성 서약을 들먹이며 조속한 안티오크 반환을 지시했다. 하지만 안티오크에서 생고생을 했던 보에몽은 그에게 반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들의 군대가 1099년 여름 안티오크에 도착할 것이니 그때까지 성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하게 된다. 이제 반대로 동로마 황제에게 대항할 명분이 필요한 보에몽이 예루살렘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반대로 십자군 내 친 동로마 세력은 병력이 올때 까지 기다린 다음 예루살렘 원정을 떠나자고 주장했다. 알렉시오스 1세 좋은일 시켜줄 수 없던 보에몽은 속히 예루살렘으로 공격에 나선다. 이들은 파티마와 동맹을 맺고 세력을 키운다. 이들 외에도 시돈, 타레, 하이파 등 약소 세력들 다수와 동맹을 맺었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리고 6월 6일 예수의 고향이었던 베들레헴을 정복했다. 



1차 십자군 원정 경로




  소극적이었던 예루살렘 공략의 양상히 바뀌게 되었다. 예루살렘 총독 이흐티카르는 안티오크가 무너졌던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속히 예루살렘에 있던 가톨릭인들을 모두 추방했고, 성벽을 보수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예루살렘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예루살렘까지 도달하면서 십자군은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이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하지만, 예루살렘까지 갖은 약탈로 근근히 버티면서 온 십자군 입장에서 최후의 목적지를 앞두고 포기할 순 없었다. 보에몽은 6월 13일 예루살렘 공략을 시작했다.

  초기의 승기를 잡은 건 바로 수비측이었다. 파티마 세력은 예루살렘을 포기하고 돌아가면 이전에 점령한 영토의 지휘권을 인정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런 요청을 수락할 보에몽이 아니었다. 결국 파티마의 대군은 예루살렘을 수비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수비군 역시 손쉽게 십자군을 격퇴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십자군의 실패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6월 13일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났다.


  십자군의 괴멸이 눈앞에 다가온 그때, 레몽의 한 사제가 안티오크에서 죽은 아데마르 주교가 굼속에 나타나 예루살람 정복 방법은 일러주었다고 말했다. 그 방법은 십자군이 금식을 해야 하며, 성경에 나오는 대천사 미카엘 처럼 모든 군사가 맨발의 행렬로 고통을 감수하고 성벽 주위에서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루살렘 원정군이 정상이었다면 당연히 무시되었을 전술이었지만, 패전을 코앞에 둔 원정군은 이런 정신나간 전술을 채택한다, 병사들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흰 옷 하나만 걸친 채로 성벽 앞에서 기도를 하는 괴기한 일이 일어난다.

  무슬림 병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비웃으며 십자군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그런데,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몇일동안 지속되니 무슬림들도 미칠 지경이었다. 밤낮 할것 없이 횃불을 들고 성경을 외우고 있는 병사들은 여러 의미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정말 닿은 걸 까. 성 주위에서 잘 재단된 대규모의 목재가 발견되었다. 병사들은 기적에 대한 찬양인 여호와이레를 외치며, 공성탑을 제작했다. 7월 13일 대규모 공성탑에서 시작된 공격이 하루 종일 진행되었다. 이번 공격은 매서웠다. 예루살렘 수비군은 이전에 없었던 대규모 피해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기회를 잡은 고드프루아는 가장 헐겁다고 생각되었던 북쪽 성벽을 계속 공략했고, 마침내 그의 군대가 성벽을 뚫고 병사를 성 안으로 진입시키는데 성공한다. 

  대규모의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들어서면서 성지에서의 시가전이 일어난다. 무슬림들은 빠르게 북쪽으로 향했지만 고드프루아의 행동이 더 빨랐다. 이들은 성안에 보이는 유대인과 무슬림을 학살했다. 광기에 휩싸였던 십자군은 정말 미친듯이 사람들을 학살해나갔다. 예루살렘 온 거리마다 피가 묻어 있었고, 광장에는 항상 사람 발목 높이의 피가 차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십자군은 그리스도를 위해라는 명복하에 14만명이 넘는 예루살렘 시민들을 죽였다. 그렇게 5주간의 예루살렘 공성전은 십자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지독한 학살이 끝나면서 1차 십자군 원정도 십자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원정군이 모여 회의 끝에 예루살렘 정복의 영웅 고드프루아 드 부용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으로 추대하면서 1차 십자군 원정은 종료된다.



예루살렘 공방전




  원정의 결과로 안티오크는 보에몽의 손에, 예루살렘은 고드프루아의 손에 떨어졌다. 십자군 원정에 의해 급조된 국가였던 만큼 이들의 위기도 금방 찾아온다. 패전의 복수심을 가진 파티마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레몽과 고드프루아 사이의 갈등이 있었지만, 숱한 위기를 잘 넘긴 고드프루아는 파티마의 공략도 막아내며 예루살렘을 지킨다.

  안티오크의 보에몽도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것이 수월하지 않았다. 특히나 보에몽은 사사건건 알렉시오스 1세와 부딪혔다. 알렉시오스 1세는 결국 보에몽을 잡아오기 위해 안티오크에 원정군을 보낸다. 하지만 보에몽은 이를 저지했다. 하지만 튀르크 국가였던 다니슈멘드 왕조가 안티오크로 원정군을 보냈는데, 이는 막아내지 못하고 포로로 잡히게 된다. 다니슈멘드 왕조는 평소 보에몽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이 많았던 점을 활용해 그에 대한 경매를 진행한다. 이 경매에 참여한 인물은 총 3명이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무려 26만 디나르라는 돈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전에 보에몽에게 니케아에서 대패한 룸 술탄 칼리치 아르슬란은 13만 디나르와 휴전 조약을 제시했다. 그리고 보에몽 본인은 13만 디나르와 더불어 자신과 동맹을 맺고 룸 술탄국과 싸우자는 제안을 했다. 다니슈멘드 왕조는 룸 술탄과 자주 부딪혔기에 보에몽의 제안을 채택하며 그는 석방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에몽, 고드프루아와 함께 1차 십자군 원정 성공에 큰 역할을 했지만 땅 하나도 못얻은 레몽이 있었다. 보에몽과 고드프루아에 밀려 갈곳이 없던 레몽은 별 수 없이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한다. 결국 레몽은 자신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알렉시오스 1세와 동맹을 맺고, 1101년 십자군 후발대로 출발한다. 레몽은 보에몽과 고드프루아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트리폴리로 향한다. 예상대로 굳이 적을 또 만들고 싶지 않은 둘은 후발대에 대한 저지를 하지 않았고, 이들은 쉽게 트리폴리에 도달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후였다. 트리폴리의 성벽 역시 높았다. 레몽이 2년간을 쏟아 부었지만 트리폴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조급해진 레몽은 트리폴리를 점령하지도 않은 채 트리폴리 백국을 선언하며 왕위에 오른다. 레몽은 트리폴리 백국의 첫번째 지도자였지만, 트리폴리를 점령하지 못한채 사망하게 된다. 십자군 1세의 주요 공신이었던 레몽은 결국 이렇다 할 땅 하나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1차 십자군의 주역, 고드프루아 드 부용




교황과 그리스도의 부흥을 위한 성스러운 전쟁


  가톨릭 입장에선 정말 성스러운 전쟁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가 죽고 부활한 도시다. 로마 제국 시절부터 예수살렘은 그들의 성지를 자처했다. 그리고 예수가 태어난 베들레햄도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문제는 이슬람에게도 예루살렘은 성지였다. 결국 이 도시는 이슬람이 탄생한 7세기 이후부터 동방세력과 서방 세력의 주요 전쟁터가 된다. 그리고 이 전쟁은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의 깊은 역사가 시작된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로마제국이 붕괴되면서 예루살렘은 아랍세력의 손아귀에 떨어진다. 이후 마흐무드가 출현하면서 이슬람 세력은 점차 강해졌다. 서방 가톨릭은 예루살렘을 자신들의 영토로 얻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슬람 세력이 워낙 강했던 탓에 이들과의 전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바티칸 교황청의 성장과 알렉시오스 1세의 요청은 이들에게 있어 좋은 명분이 되었다. 교황은 성지 탈환과 이슬람 격퇴라는 훌륭한 프로파간다를 제시해 유럽 제후들을 한데 모았고, 성스러운 군대라는 이미지를 부여해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 승리는 유럽 사람들에게 엄청난 자긍심을 불어넣었다. 셀주크 제국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 내부 결속도 다지게된 셈이었다. 이 시기에 유럽에는 십자군을 찬양하는 다양한 예술작품이 나온다. 유럽 세력들은 오래전부터 페르시아 제국-이슬람 제국-셀주크 제국이 이끄는 동방 제국들에게 탈탈 털려왔다. 오랜 기간 아랍에게 당했던 복수를 제대로 해줬기에 이들의 승리는 더욱 더 값졌다. 이 과정에서 고드프루아나 보에몽 같은 유능한 제후들까지 나타나면서 유럽의 부흥에 힘을 보탰다. 확실히 1차 십자군 원정은 카톨릭과 유럽의 역사를 바꾼 중요한 대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안티오크 공국의 군주, 보에몽 1세




성지에 미쳐버린 가톨릭의 이슬람, 유대인 학살 전쟁


  1차 십자군 원정이 최악의 전쟁 중 하나로 기록되는 이유는 자신들의 종교를 이용해 타 종교인들은 처참히 학살했다는 데 있었다. 자신들의 종교를 앞세워 수많은 이슬람, 튀르크, 유대인 심지어는 먼 타국에서 온 유럽인들 까지 목숨을 잃었다. 단지 교황의 명예를 위해서 그런것이다. 이런 종교를 이용한 전쟁이 무서운 점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공격을 하려는 병사나, 이를 막는 병사들 모두 마치 무언가에 홀린듯 전쟁을 치른다. 이런 전쟁에서 설령 이기더라고 크게 얻는 것은 없다. 실리는 전혀 없고 종교적인 명예만 얻는 속빈 전쟁인 것이다.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예루살렘에서 수만Km나 떨어진 도시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참가한 것이다. 제후들이야 프랑스나 독일의 영세 제후로 남기보다는 신분 상승을 위해 참여했다고는 하지만, 해당 지역에서 자란 병사들까지 동원하며 굳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된다. 뭔 거리의 원정으로 이들은 식량도 빈번히 떨어졌고, 주변 도시들을 약탈하고, 동료나 적 병사들의 시체를 먹으면서 까지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11세기 말의 유럽과 아랍은 의술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시기였다. 전쟁 도중 전염병이 자주 발생해 병사들이 전쟁을 치르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교황의 성지 탈환이라는 욕심과 제후들의 신분상승을 위해 병사들이 먼 타국에서 개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렇게 분노에 찬 병사들은 성을 차지하자 마자 이슬람 세력을 마구잡이로 학살했다. 예루살렘에서 무려 14만명의 시민들을 죽이는 대 학살극을 벌였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시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댔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같은 가톨릭 신자도 존재했다. 광기에 사로잡힌 원정군에게 피아를 구분할 분별력 따윈 없었다. 가톨릭에게 1차 십자군 원정은 완벽한 승리처럼 보였지만, 무슬림들에게 복수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없다. 앞으로 벌어진 일들에 비하면 오히려 십자군 1차 원정은 굉장히 순한맛이었다. 



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세력도




총평


  가톨릭과 이슬람의 격돌은 필연적이다. 대 전쟁은 시대의 흐름을 봤을 때 굉장히 정상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 학살까지 필연적이었는가는 사실 의문이 남는다. 예루살렘에서 대학살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발칸반도와 중동에서의 전쟁에 시초가 된다. 가톨릭과 이슬람은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물론 이 지독한 전쟁을 단지 예루살렘에서의 가톨릭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동로마 제국이 다소 과장하여 셀주크 제국이 가톨릭 세력을 탄압한다고 보고한건 맞지만, 무슬림 역시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가톨릭 신자들은 엄청 괴롭혔다. 실제로 극성 이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 외에는 지구상에서 모두 사라져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IS가 이런 이슬람 극단주의를 계승하고 있는 단체이다. 그리고 이슬람 극단주의는 이슬람 제국이 출범한 이후 중세시대에도 계속 가톨릭 신자들을 괴롭혔다. 안티오크 수비대장은 가톨릭 대주교를 죽여 성벽에대가 매달아 놓앗다.


  모든 전쟁이 나쁘지만, 십자군 원정은 기분 나쁜 전쟁 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정말, 종교라는 허울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죽여도 되는건지 의문이다. 왜나면 이 사건은 3세기 동안 지속되는 대 학살의 시발점이 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죽이는 것이 예수가 원했던 그림이 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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