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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체제 붕괴의 시작이자 세계 역사의 변곡점
VS
종교적 사상 보존을 위한 성스러운 이념 전쟁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 후한말 중국, 16세기 말 일본, 고려 말기 한국을 보더라도 난세에 특히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2세기 말 유럽과 이슬람도 그랬다. 11세기부터 예루살렘과 동로마 제국을 두고 붉어진 양 세력간의 다툼은 각지에 숨어있던 영웅들을 한데 모으는데 성공한다.
3차 십자군 전후로 중세 시대가 변곡점을 가져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동로마제국의 중흥을 이끈 콤니노스 왕조는 원정 이후 왕조가 끝나며 제국의 몰락을 불러왔다. 유럽의 제후들도 더이상 교황을 믿지 않았으며 가톨릭 봉건제에서 벗어난다. 이슬람 역시 술탄국이 몰락하고 튀르크 족이 새로운 패자로 떠오르게된다. 유럽과 이슬람의 특이점을 가져온 대 사건인 3차 십자군 원정에 대해 알아보자.
사건 일지
1171년: 살라흐 앗 딘, 이집트 정복하고 아이유브 왕조 창시
1174년: 살라흐 앗 딘, 시리아 정복
1176년 9월: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룸 술탄국이 동로마 제국의 공세 방어 성공
1187년 7월: 하틴 전투에서 살라흐 앗 딘이 십자군 상대로 대승
1189년: 프리드리히 1세의 십자군 원정 시작
1190년 6월 10일: 킬리키아 원정 도중 프리드리히 1세 사망
1191년: 리처드 왕과 필리프 2세의 원정군 시작
1192년 9월 2일: 십자군과 살라흐 앗 딘 간 평화협정 체결
살라딘 초상화 (출처: 위키 백과)
개요
소득 없이 끝난 2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자 십자군 국가들의 안보상황은 여전히 열악했다. 이와중에 예루살렘 왕국에서는 멜리장드 여왕과 그의 아들 보두앵 3세의 권력 싸움이 번졌다. 그 사이 이마드 앗 딘 장기의 뒤를 이은 차남 누르 앗 딘이 다마스커스를 정복한다. 예루살렘 왕국은 이슬람 세력이 코 앞에 있음에도 이집트 원정을 꿈꿨다. 셀주크 제국에게 밀려 세력이 약해진 파티마 왕조는 주변 세력들의 보기좋은 먹잇감이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 아모리 1세는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를 공격했다. 하지만 역시 예루살렘 왕국을 호시탐탐 노리던 누르 앗 딘이 그 사이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결국 아모리 1세는 소득 없이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아모리는 쉽게 이집트를 포기하지 않았다. 1167년 다시 군대를 모아 이집트를 침공했다. 아모리는 이집트 침공을 위해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고 동로마 제국과 손을 잡으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위기는 꼭 영웅을 불렀다. 파티마 왕조 예루살렘 군을 손놓고 지켜보지만은 않았다. 곧바로 시르쿠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고, 이 기회를 통해 시르쿠의 조카가 이집트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가 바로 살라흐 앗 딘, 일명 살라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이집트를 정복한 살라딘은 이슬람 전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중동의 대표적인 전투 유목 민족인 쿠르드족 출신인 살라딘은 삼촌 시르쿠를 따라 숱한 전투를 배우며 전쟁의 기술을 익혔다. 살라딘은 이집트를 시작으로 시리아, 소아시아, 요르단 지역까지 세력을 넓히며 이슬람 최고 지배자로 떠올랐다.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 도 살라딘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막으려고 했지만, 전쟁 준비도중 급사하면서 허무하게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결국 장기 왕조는 아이유브 왕조에 흡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파죽지세로 세력을 넓혀 가던 살라딘은 다마스커스까지 공략한다. 다마스커스는 앞서 자주 언급했듯이 예루살렘으로 가기위한 이슬람 지역의 관문과도 같은 곳이다. 예루살렘 왕국은 다마스커스가 살라딘의 손에 떨어 진다면 자신들의 왕국도 더이상 보존하기 어려울것이 분명했다. 예루살렘 왕국은 아모리 1세를 대신해 보두앵 4세가 새로운 왕위에 올랐다. 보두앵 4세는 이전의 예루살렘 국왕들과 다르게 매우 현명했다. 그는 살라딘이 왕국 최대의 적으로 판단하고 트리폴리 백국의 레몽 3세와 협정을 맺으며 자국 보호에 힘썻다. 또한 무슬림에대한 탄압도 없애고 적극적으로 손을 벌리며 국가를 지키기 위해 힘썻다.
1177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공략하기 위해 2만 6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다. 보두앵 4세는 당시 겨우 17살의 꼬맹이였다. 하지만 그는 600명도 안되는 그의 기사들을 이끌고 살라딘 군을 상대했다. 살라딘은 군대를 보고 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보두앵 4세는 용감했다. 그는 자신의 기사들과 결사항전을 하며 전장을 휘저었다. 살라딘은 이들의 용맹을 보고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모습을 본 살라딘은 보두앵 4세를 높이 평가하며 예루살렘 보단 모술과 알레포 공략에 집중하며 왕국을 서서히 무너뜨리기로 마음먹게 된다.
보두앵 4세
보두앵 4세와 살라딘이 세력 다툼을 하고 있을 때, 동로마 제국 역시 힘을 키웠다. 요한네스 2세가 죽고 그의 아들 마누일 1세가 새로 황제에 올랐다. 어린 나이에 제국의 숙원이던 안티오키아 정복을 이루었고, 헝가리와 키프로스 지역을 점령해갔다. 이들은 이탈리아 반도까지 차지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는 이 광경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라고 불린 그는 이탈리아 반도 공략에 전력을 다했다.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를 정복하고 이어 교황이 있는 로마를 공략하기 위해 남하한다. 하지만 레나노 전투에서 패배하며 이탈리아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이때, 바르바로사의 눈에 들어온게 바로 룸 술탄국이다. 이탈리아 정복을 위해 선 동로마 제국을 잡아둘 세력이 필요했는데, 동로마 제국과 사이가 좋지 못하고, 강력하게 그들을 묶을 수 있는 세력이었다. 동로마 제국은 신성 로마 제국과 룸 술탄국이 동맹을 맺는다면 동서로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에 빠진다. 마누일 1세는 룸 술탄국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에게 다니슈멘드 지역 반환을 요구했다. 아르슬란은 이를 들어줄 리 만무했고, 이를 빌미로 룸 술탄국을 공략한다.
전쟁은 동로마 제국이 쉽게 이길 것 같았다. 군대의 양적으로 보나 질적으로 보내 제국군이 훨씬 우세했다. 하지만, 룸 술탄국에게 큰 이점이 있었으니 바로 지리에 빠삭하다는 점이었다. 이코니온으로 향하는 제국군은 미리오케팔론을 거쳐 갔는데, 이 지역은 수비군이 매복하기에 최적이었다. 제국군은 이 지역을 통과하다가 술탄군에 크게 당하며 패배하게 되며 전 유럽과 이슬람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결국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방에 대한 지휘권을 룸 술탄국에게 내주게 된다. 이 전투가 1177년 벌어진 미리오케팔론 전투이다.
하틴 전투
그 사이 예루살렘 왕국을 이끌던 보두앵 4세가 어린나이에 죽게 된다. 그는 총명하고 유능했지만 어려서 부터 심각한 나병을 앓고 있었다. 후계자는 꿈도 못꾸는 상황이었다. 멸망 직전의 왕국을 간신히 살려놓은 보두앵 4세였지만, 선천적인 지병을 이길 수는 없었다. 보두앵 4세는 죽기 전 후계자를 결정했어야 했는데, 그의 누이인 시빌라와 그의 남편 기 드 뤼지냥이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떠오른다. 하지만 보두앵 4세가 지켜본 매형 기 드 뤼지냥은 왕에 오르기에 매우 부족한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후계자를 5살의 어린 조카 보두앵 5세에게 물려주고, 그가 성인이 될 때 까지는 레몽 3세가 섭정하라는 유언을 남기게 되고 24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사망한다.
물론 이런 결과를 기 드 뤼지냥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보두앵 5세가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사망하자 기 드 뤼지냥과 시빌라는 빠르게 왕위를 차지했다. 레몽 3세는 이에 반발하며 군대를 이끌고 왕위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안티오키아 공국의 르노 드 사티용 역시 예루살렘에서 한자리를 차지할 생각에 남하하며 내전 직전까지 내몰린다. 다행스럽게도 보두앵 4세가 아끼던 발리앙 디블랭의 중재로 내전은 피했다.
이런 대 혼란을 지켜보던 살라딘은 찬스가 왔음을 직감했다. 평소 르노 드 사티용은 자주 아이유브 왕조를 공격했다. 이를 빌미로 살라딘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살라딘은 재빠르게 티베리우스를 포위했다. 티베리우스의 영주는 왕국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예루살렘 군도 군사를 이끌고 티베리우스로 향한다. 대 군은 티베리우스로 달려갔으나 너무 먼거리를 가야되고 식수가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을 어쩔 수 없이 하틴의 뿔이라는 지역에서 물을 구하며 휴식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두 살라딘의 손바닥 안이었다. 하틴 지역은 이미 살라딘의 매복군이 자리하고 있었고, 예루살렘 군은 휴식 도중 살라딘의 기습 공격을 받으며 대패하고 만다.
2만명이 넘는 예루살렘 대군은 살라딘의 완벽한 전술에 패배한다.. 결국 기 드 뤼지냥은 살라딘 앞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보인다. 휴전 협정을 깬 르노 드 사티용은 살라딘에게 참수를 당한다. 결국 발리앙 디블랭만 간신히 살아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다.
발리앙의 예루살렘 방어전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찾아가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만은 트리폴리로 대피 시키게 해달라고 요청을 한다. 살라딘은 만약 예루살렘에서 전쟁하지 않고 항복한다면 요구를 들어줄것이라고 하고 발리앙 역시 그와 약속한다. 하지만, 발리앙이 예루살렘 왕국으로 갔지만 헤라클리우스 주교는 발리앙에게 살라딘을 막아달라고 간청한다. 주교 입장에서 성지 보호는 신과 약속한 숙명이었다. 어쩔 수 없이 발리앙은 살라딘과의 약속을 깨고 농성전으로 돌입한다.
여기서 살라딘의 인품이 나오는데 보통의 지휘관이었으면 약속을 깬 발리앙이 괘씸하여 그들의 가족을 참수 시켰을 것이다. 발리앙은 살라딘과의 약속을 깻지만, 살라딘은 발리앙과의 약속을 지켰다. 그는 발리앙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트리폴리로 대피시켰다. 살라딘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발리앙이 수비로 돌아 설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는 예상대로 살라딘의 압승으로 흘러갔다. 발리앙은 예루살렘 도시가 완전히 파괴 당하기 전 그에게 한가지 제안을 한다. 우리가 더이상 전쟁을 하지 않을 테니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고 이들에 대한 몸값으로 30,000 베잔트를 지불하기로 한다. 그리고 만약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시설을 파괴하고 자살하겠다라고 반 협박을 하게 된다. 전쟁 승리 직전에 있던 살라딘 입장에서는 이런 발리앙의 요구가 황당했을 법도 한데, 그는 이 제안을 수락한다. 살라딘의 군대는 멀리 원정을 온 것이 부담스러웠고, 그의 목표는 이슬람 세력 통합이었다. 이슬람에게도 예루살렘은 성지였다. 만약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파괴한다면 다른 이슬람 종파에게 역으로 공격 당할 것이 뻔했기에 발리앙의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 대인배스러운 살라딘이나 그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발리앙 모두 뛰어난 전략가였음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예루살렘의 국왕 기 드 뤼지냥은 석방되어 키프로스로 향했고, 그곳에서 간신히 왕국의 명목만 유지할 수 있었다.
살라딘의 예루살렘 정복 소식을 듣고 바티칸 교황청은 다시 한번 충격에 휩싸였다. 1세기 가까이 이어져온 예루살렘에 대한 지휘권을 다시 이슬람 세력에 내준 셈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다시 한번 전 유럽의 국왕들에게 교서를 뿌렸다. 교황은 7년간 유럽의 휴전을 선언하며 예루살렘에 보낼 군대를 소집했다.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영국의 헨리 2세는 교황의 교서를 받고 곧바로 휴전 협정을 맺었다. 재밌는 사실은 헨리 2세가 십자군 원정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영국을 떠나자 그 사이 아들 리처드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리처드는 자신의 아버지인 헨리 2세의 측근들을 모두 숙청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사자왕 리처드 1세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사람은 70세를 바라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바르바로사였다. 그는 교황 앞에서 십자군에 맹세를 하며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대원정의 서막이 올랐다. 십자군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출전한 세 번째 원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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