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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신흥 세력에 대한 진압
VS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조선의 가톨릭 대규모 탄압
병자호란이 끝남에 따라 조선은 청의 거대한 세력앞에 무릎을 꿇고 그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서방세력과도 잦은 교역을 하던 청나라 였기에 조선 내부에서도 그들의 학문과 기술을 배워 힘을 길러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방의 문물이 서서히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중에는 한문으로 작성된 성경 책도 있었다. 서구의 선교사들이 청의 백성들에게 선교하기 위해 작성한 것인데, 이 책이 조선에까지 들어오게된다. 이 책들이 재야 사이에 서서히 퍼지게 되고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들 사이에서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게 된다. 이들은 중국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기도 하면서 조선에 가톨릭을 전파한다. 18~19세기 동방의 사상과 서방의 종교가 조선에서 대충돌을 겪게 된다.
사건의 경과
1610년(광해군 2년), 허균이 청나라 방문 도중 기도문의 일종인 ‘제 12장’을 조선에 가져옴
1614년(광해군 5년),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가 소개됨
1758년(영조 34년), 천주교 식 제사에 대한 금지령 선포 (조선 최초로 나온 국가적인 천주교 제재)
1784년(정조 8년), 청으로 간 사신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음
1785년(정조 9년), 김범우 토마스가 조선인 최초로 순교함
1800년 8월 23일 (순조 원년), 순조가 조선 23대 왕으로 즉위 및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시작 (국가의 천주교에 대한 정책 변화)
1801년 2월 22일 (순조 2년), 정순왕후의 교지에 따라 신유 박해 시작
1801년 11월 5일 (순조 2년), 황사영 백서 사건 발생
이수광 - 지봉유설
개요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지봉 이수광은 명에서 보고 들을 것을 정리하여 ‘지봉유설’이라는 책을 발간한다. 이수광은 이 책에서 명나라는 운을 다했으며 여진족이 강성해지고 있으니 그들을 조심하라는 메세지와 함께 중국이 아닌 제 3국의 정보들을 대거 담아서 조선에 소개한다. 이 책에는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서방 세력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탈리아의 신부 마테오 리치가 작성한 ‘천주실의’에 대한 내용이었다.
마테오 리치는 6년이라는 시간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그들의 학문에 대해 공부했다. 그는 중국에서 선교 활동을 벌이기 위해 최대한 그들의 입맛에 맞는 방식으로 교리를 전달했다. 유교와 불교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았기에 최대한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가톨릭을 전달했다. 그 노력이 담긴 책이 바로 ‘천주실의’였다. 이수광은 명에서 이 책을 접할 수 있었고, 여진족을 조심하라는 메세지와 함께 천주교에 대한 내용을 조선에 전달한다.
이후 청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조선은 점차 병들기 시작했다. 중국 한족에 대한 사대주의가 기본 이념이었던 조선이 오랑캐인 청 앞에 국왕이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좀처럼 납득하기 힘들었다. 조선 전기 절대적이었던 성리학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조정은 서로 붕당으로 나뉘어 불필요한 논쟁을 이어갔다. 조선 전기의 학파 싸움이 학문의 발전을 위한 긍정적 성격이었다면, 후기의 붕당 싸움은 상대파 죽이기에만 힘썻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재야의 사상가와 권력에서 밀려난 붕당, 특히 남인들 위주로 기존에 성리학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게 된다.
이 중 실학자 이익과 안정복은 청나라에서 본 천주교를 적극적으로 조선에 소개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천주교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이루어지지 않아서 불교와 같은 신앙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학문적인 성격으로 가톨릭을 소개하게 된다. 그래서 조선에서 가톨릭에 대해 붙은 이름이 바로 ‘서학’이다. 남인 실학자들은 서학은 백성들에게 전파했고, 영조대에 이르러 황해도 지방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18세기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된다. 그리고 정조 8년, 청으로 간 사신 이승훈 베드로가 베이징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으며 공식적인 조선인 가톨릭 신자가 등장한다.
정조 시대에는 조정과 가톨릭의 관계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언급한 대로 조정에서 크게 천주교를 국가에 위협적인 요소로 보지 않았다. 18세기 조선은 지금 처럼 종교의 개념이 명확한 시대가 아니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불교도 믿으면서 천주교를 믿기도 했고, 성리학과 대척점에 있는 학문이라는 인식도 크게 없었다. 다만 유교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하는 종교인 만큼 제사 방식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였는 데, 이 부분에 대해서만 확실히 지켜진다면 굳이 천주교에 대한 큰 박해는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부분에서 유교와 천주교의 차이를 보이게되면서 분쟁은 시작된다.
천주교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는 각각의 정교회마다 보는 관점에 대한 차이가 있었다. 이 문제는 같은 유교권 국가인 중국에서 먼저 발생된 문제였다. 마테오 리치와 같이 유교에 대한 인식이 뛰어났던 선교사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그들만의 문화로 인식하고 이를 존중했다. 하지만 일부 정교회에서는 이를 미신으로 간주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시켰다. 청나라에서 발생한 천주교 박해 역시 조상에 대한 제사 문제로 발생했다. 이 문제가 그대로 조선에 들어오게된다. 전라도 진산군의 양반이었던 윤지충은 이숭훈에게 세례를 받으며 천주교 신자가 된다. 그는 로마 정교회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게 된다. 이 소식이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그는 임금의 명령에 따라 처형당하게 된다. 같은 이유로 그의 외종사촌인 권상연 역시 처형당한다. 이 해가 신해년 (1791년, 정조 15년)이었기에 이 사건은 신해 박해로 불리게 된다. 조선에서 일어난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이승훈 베드로
이 처럼 제사 문제만 잘 지켰다면 천주교와 유교 사이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적어도 정조 재임기간에는 그랬다. 사실 이 부분은 조정에서의 권력 싸움과도 크게 연관된다. 노론에 힘에 입어 왕위에 오른 영조는 탕평책을 펼치며 조정을 살리려 했지만, 결국 재임 기간 내내 노론의 일당 독재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그의 손자 정조 역시 노론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재야의 남인들을 조정에 등용하며 일당 독재를 견제했다. 성리학을 신봉하는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조정은 의도적으로 남인들이 믿는 천주교를 인정해준 것이다. 그리고 정조의 카리스마는 이런 의도적 견제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고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영의정급 신하에게도 상스러운 욕을 내뱉던 정조가 사라지고, 노론의 사람이던 영조의 계비의 수렴청정은 조정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다시한번 노론의 입김이 조정에 불게되었다. 이들은 정조의 아이들, 남인들을 찍어누른다. 게다가 남인의 영수 노릇을 하던 영의정 채제공 마저 사망하자 노론 벽파의 시대가 온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카드인 천주교 카드를 꺼내 들고, 천주교 신자가 많은 남인들에 대한 대 학살을 예고한다.
노론 벽파는 국가의 체제인 성리학을 무너뜨린다는 명목하에 그리고 자신의 반대파인 남인과 시파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최필공 토마스를 시작으로 그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에 대해 철저한 조사가 이뤄졌다. 또한 전국적인 움직임을 통해 천주교 의식을 하는 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 와중의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의 책에 쓴 글씨 중에 ‘무부무군’이라는 낙서가 나온다. 아버지도 없고 군주도 없다는 뜻인데, 이 문구의 정확한 의미는 정약종 본인만 알았지만, 이 글이 천주교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기엔 충분했다. 이 글귀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은 임금도 섬기지 않고, 효를 저버리는 패륜적 종교라는 인식이 더욱 강하게 심어졌다. 천주교인들에게 상황은 더욱 불리하게 돌아갔다.
앞서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 신부를 필두로 수많은 신도들이 순교를 당했다. 이들은 모두 종교를 버리지 않는다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약종의 동생이자 정조의 신임을 받은 정약용 역시 이번 박해를 피할 순 없었다. 다행이 그에게서 천주교 신자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아 그는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있는 그의 수많은 서적이 이 유배지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조정에서 기록한것에 따르면 무려 100여명이 순교했다. 그 외에 고문을 받거나 유배를 간 사람들은 셀수 없었다. 이들은 2014년에 이르러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될 때 까지 조정에 의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것이다.
사건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조정의 탄압을 피해 제천에 숨어있던 황사영은 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몰래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의 천주교 신자를 구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된다. 본래 황사영은 정조 14년 과거에 급제하여 정조의 총애를 받는 유능한 사대부였다.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기에 황사영 역시 조정에서 별달리 문제 없이 업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정조가 죽자 황사영은 궁궐에서 나와 도피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사영은 편지를 쓰게 되었고, 해당 편지가 명주천에 썻기 때문에 ‘백서’라 불렸다. 황사영은 백서를 들고 베이징으로 향했지만, 검문 도중 발각되어 의금부로 압송된다.
문제는 이 백서의 내용이었다. 단순히 조선에 있는 천주교 신자들의 탄압 내용만 담았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 이상이었다. 황사영은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영유권을 행사하여 조선을 속국화 시켜야 하고 천주교 신자를 구원해야한다고 써있었다. 조선이 이를 거절 할 경우 청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내려와 조선에 대한 통치를 실시해야한다고 했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내란 음모죄에 해당되는 중범죄이다. 천주교 신자들의 탄압을 고발하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 자체에 대한 반역에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결국 황사영은 이 백서 내용으로 인해 거열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그는 양반 가문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관노가 되었고 아내는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조정은 정약종의 ‘무부무군’과 ‘황사영 백서 사건’을 통해 천주교를 패륜 종교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탄압을 실시했다.
신유박해는 조선 정부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대대적은 천주교 탄압 사건이었다. 한국 가톨릭 역사를 보면 가장 특이한 점 중의 하나가 외국 선교사들이 아닌 사대부들이 모여 학문적 형태로 연구하던 것이 종교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가톨릭을 연구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예송논쟁으로 정치권에서 멀어진 남인계열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조선 후기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병자호란 패배 이후 주요 원인중 하나로 고리타분한 성리학적 사고를 꼽게 되었다. 성리학적 사고만 앞세우다 실용적이고 강력한 청나라의 군대에 무너진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이 기득권에서 멀어진 사대부들에게 자리잡았고, 성리학에 대한 반항을 위해 스스로 가톨릭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조정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조, 정순왕후릉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린 신흥 세력에 대한 진압
조선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큰 죄이다. 유교적 사상에의해 세워진 조선에서 모든 백성들은 군주에 대해 충성을 하고, 효를 중시해야한다. ‘군사부일체’ 라는 말이 있듯이 조선에서 효와 충은 매우 중요한 가치다. 아버지가 없다면 나 자신도 없는 것이다. 조정이 가장 문제를 삼았던 부분 역시 천주교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만약 제사를 지내지 않는 천주교인들을 인정한다면 나라 전체의 기강이 흔들리게된다. 중국에서 미리 그랬듯이 유교 국가에서 천주교에 대한 인정은 국가 체제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두 교리는 정 반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가톨릭이라는 것은 철저히 서방 중심의 종교다. 서방의 문화와 동방의 문화는 다르다. 가톨릭 국가들과 가장 붙어있었던 이슬람 세력 역시 서로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천년이 넘도록 아직까지도 전쟁을 하는데, 동방의 끝자락에 있던 조선과 유럽의 학문은 극과 극이었을 것이다. 조선 조정에게 있어 천주교는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반체제적 학문이자 종교였다. 이들에 대한 허용 자체가 조선에게 있어 어불성설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조선의 가톨릭 대규모 탄압
신유 박해는 조선 왕실 좀더 정확히는 순조와 정순왕후가 시대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생긴 참극이다. 조선이라는 사회에서 개방적인 사고를 하기 힘들었을 거라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럼 천주교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펼친 정조와 당시 서학을 연구하던 실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신유박해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순왕후와 노론의 실책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물론 정조 역시 적극적으로 천주교를 전파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 역시도 제사를 지내지 않은 천주교 사대부에게 참수형을 내린 것을 보면 천주교를 마냥 반겼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지는 않았다. 천주교를 허용하거나 탄압하는데 있어 매우 신중했다고 해석된다. 국력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조선 후기엔 이런 조심스러운 행보가 중요했다. 하지만, 노론과 정순왕후는 노론 찍어누르기에 급급했다.
이 시대에 들어서 알 수 있듯이 이미 청나라와 일본에는 서양 탐험가와 선교사들이 자리잡아 개항을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양국 모두 여전히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우리나라가 외세의 개항 요구에 쇄국 정책을 펼친 것은 흥선대원군이 들어서는 60여년 이후의 이야기다. 이 시점에 일본은 이미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해 조선과 국가 발전의 격차가 압도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권력 앞에서 정의가 어디 있겠느냐만, 신유 박해는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한 기득권의 악수 였다. 신유박해 사건 하나로 국가가 위태로워 진 것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시대역행적인 조선 왕실의 행보와 더불어 순조 이후 세도가문에 생겨남에 따라 조선은 점차 병들어갔다. 국가도 어쩌면 유기체처럼 행동한다. 사람의 몸에 나쁜 습관이 들면 점차 몸이 쇠약해진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국가 발전에 필요한 다양한 의견 개진이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낳고, 노론의 일당 독재 나아가 세도가문의 독재가 시작된다.
또한 사람에게 있어 가치관도 중요하지만, 때론 현실에도 타협하면서 자신의 꿈꾸는 이상과 현실사이의 조율이 필요하다. 국가도 사람 처럼 경우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여야한다. 하지만 조선은 위기의 순간에까지도 성리학을 고집했다. 국가를 위해 다양한 소리를 들었던 정조와 달리 순조대에는 실학자, 서학자 들에 대한 국가의 철퇴를 내렸다. 고집쟁이를 좋아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성리학만 고집한 조선은 결국 100년이 지나 성리학을 버리고 세계 무대에서 뒤쳐지않으려 노력하지만 그 땐 이미 골든타임은 전부 지나간 뒤였다. 결국 신유박해는 이처럼 조선 후기 조정에서 보여준 대표적인 시대 역행적인 흐름 중 하나였다.
서학(천주교)을 공부하는 사대부 (출처: 평화방송)
총평
사실 신유박해는 필연적이었다. 신유박해는 분명이 시대 역행적인 행동인 점은 분명하다. 게다가 조정에서 잔인하게 탄압한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야 시간이 지나 자유 사상이 만개한 21세기의 관점으로 보니까 조선의 가톨릭 탄압이 한심해 보이는 것이지, 당시 조선의 사상으로 어떻게 가톨릭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즉, 천주교의 성리학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우리가 아쉽게 느껴지는 부분은 조선에 가톨릭이 퍼지게 된 점이 선교사들이 아닌 사대부의 자발적 연구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천주교가 분명 진리의 종교는 아니겠지만, 천주교 신자가 많다는 점을 활용해 서방의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시대의 흐름을 조금 더 빨리 찾을 수 있었는 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수를 죽인 로마제국에서 가톨릭이 다시 피어 나듯이, 천주교인들은 조선에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인 포교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명동성당도 지어지고, 대한민국의 정교회도 생겨나며 가톨릭이 구한말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대표 종교 중 하나로 자리잡는다. 이처럼 신유박해때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억울함 죽음을 당하고, 조정으로부터 탄압당한 조선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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