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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분열과 유산의 파괴를 야기한 동유럽의 재앙
VS
지중해의 새로운 지배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등장
3차 십자군 당시 서방 세력의 화려한 군단이 뭉쳤지만 실속은 없었다. 그나마 리처드의 노력 끝에 멸망 직전의 예루살렘 왕국을 간신히 살려 내는데에만 그쳤다. 세번의 십자군을 겪으면서 서방세력들은 십자군 자체에 대한 강한 회의감에 사로잡힌다. 군주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머나먼 중동으로 향했지만 전혀 소득 없이 돌아오는 것에 강한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교황청은 여전히 십자군 국가들을 유지시키고 싶었다. 100여년 가량 지켜온 예루살렘을 이슬람에게 빼앗긴데다가 십자군 국가도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지체했다간 레반트 일대를 전부 이슬람 세력에게 내줄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서방 제후들과 교황청 사이의 괴리감이 발생되는 시기에 다시 한번 교황의 명령으로 십자군이 뭉치게 된다.
개요
1187년 7월 4일, 살라딘 예루살렘 정복 성공
1189년 5월 11일, 3차 십자군 원정 시작
1192년 10월 9일, 살라딘과 리처드의 평화조약 체결으로 3차 십자군 종결
1198년 1월 8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즉위
1199년 4월 6일, 사자왕 리처드 사망
1201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십자군 소집 명령
1202년 6월 24일, 제4차 십자군 출격
1202년 10월 8일, 베네치아 공화국의 십자군 출발
1203년 6월 24일,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도착
1204년 4월 8일, 십자군과 동로마 제국 사이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발발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204년 5월 16일, 보두앵 1세의 라틴 제국 성립
자라 약탈
사건의 경과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기자, 말그래도 예루살렘 없는 예루살렘 왕국이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에 돌아온 빌리앙 디블랭은 보두앵 4세의 이복동생이던 이사벨 1세와 그의 남편 콘라드 1세를 차기 왕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무슬림 자객들에게 콘라드가 암살되자 그는 재빠르게 이사벨과 리처드와 같이 종군했던 백작 앙리 드 블루아를 결혼시켜 그를 왕위에 올린다. 이후 살라딘과 리처드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예루살렘 왕국은 아크레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국가 운영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살라딘이 죽자 예루살렘 왕국의 위기가 찾아온다.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명분으로 아크레에 상륙했다. 하지만 이는 정말 명분에 불과했다.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 왕국을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국왕 앙리 1세도 사망하게 된다. 이제 에루살렘 왕국에게 십자군은 구원의 대상이 아닌 적이었다. 십자군 국가와 십자군이 서로 반목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기 드 뤼지냥의 동생인 아모리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언제 멸망해도 이상할게 없을 정도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동로마 제국도 상황이 매우 나빴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의 실각이 이어지자 지방에선 지속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서쪽에선 불가리아와 헝가리가 여전히 제국을 괴롭혔고, 동쪽에선 쿠만 세력이 제국의 영토를 침범했다. 더이상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제국의 원로원들은 이사키오스를 내쫓고, 3차 십자군 원정 당시 동로마 제국의 사령관 역할을 수행한 알렉시오스를 황제로 추대한다. 소식을 들을 이사키오스는 곧바로 궁궐에서 도망쳤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제국의 경비병들에게 잡혔다.
알렉시오스 3세는 제국의 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전 치세동안 무리한 원정군을 동원한 결과 제국의 국고가 바닥이 난 상태였다. 이 과정에서 국가 재건을 위해 세금을 무리하게 걷기 시작했고, 이는 지방 세력의 반발로 이어졌다. 지방 세력들은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들이 하나 둘 씩 이탈하게 되자 국고는 전혀 채워지지 않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것이다. 알렉시오스 3세는 민심을 달래가며 간신히 국가 파탄의 위기에서 구해내고 있었다.
1198년 1월 교황청에서 인노첸시오 3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등극한다. 그는 37살이라는 젊은 나이 답게 아주 패기가 있었다. 그의 목표는 성지 탈환과 교황의 권위 상승이었다. 전임 교황이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3세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지켜본 그였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시 한번 서방세력들에게 십자군을 요청하게 된다. 이렇게 4차 십자군이 결성된다.
문제는 서방세력들의 반응이 매우 차가웠다. 당연히 그럴 듯이 3차 십자군에서 자신들이 어떤 처우를 당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예루살렘까지 가기 위해 엄청난 양의 군량과 돈이 소모되고, 그 사이 본국의 통치도 불가능하다. 심지어 영국의 리처드는 원정을 떠난 사이 왕위를 찬탈당했다. 운이 좋아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득을 보는 쪽은 교회와 십자군 국가일 뿐이다. 교황은 어떻게든 원정군을 꾸리기 위해 각국의 성직자들을 동원했고, 어찌저찌하여 그럴듯한 군대를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번 원정 역시 서방 세력의 육로 원정은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았기에 지중해로 노선을 정했다.
문제는 배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들은 대규모 병력을 이송할 수 있는 대규모 함선이 필요했다. 13세기 초 이런 대규모 함선을 구축할 수 있는 나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유일했다. 교황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3만여명의 병력과 9개월 간의 보급을 조건으로 은화 8만 5천 마르크를 약속했다. 국가 대부분의 산업을 투자해야 가능한 어마어마한 양이었지만 베네치아가 이를 수락하면서 십자군은 원정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원정을 떠나기로 한 1202년 6월이 되었는데 실제로 모인 십자군은 겨우 1만여명에 불과했다. 당초 예상했던 3만명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베네이가 공화국에 약속했던 은화 역시 8만 5천 마르크였지만 실제로 모인 돈은 겨우 5만 1천 마르크였다. 호기롭게 모인 십자군은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국가 산업을 전부 쏟아 부은 베네치아 공화국은 돈을 못받을 위기에 놓였다. 결국 십자군과 베네치아는 돈을 구하기 위해 달타미아 지방에 있던 헝가리 보호령 자라를 약탈해 부족한 돈을 채우기로 한다.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모인 성스러운 십자군이 실제 목표인 이집트엔 가지도 않고, 같은 가톨릭 국가인 헝가리에 약탈하러 가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1202년 11월 10일, 십자군은 자라에 도착했다. 십자군과 동행하고 있었던 교황의 특사는 십자군을 맹비난 했다. 하지만 십자군을 출병을 위해서는 돈과 식량이 반드시 필요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집트 공략을 위해 만들었던 최첨단 해상 무기들은 헝가리를 공략하는 데 사용되었다. 성지 회복을 위해 모인 병사들의 칼 끝은 같은 가톨릭 국가인 헝가리 병사들의 목으로 향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격분하며 원정 중지를 명령했고, 헝가리 왕국은 교황의 파문을 요구했다. 하지만 십자군들은 이 요구를 전부 무시했다. 자라는 십자군과 베네치아 연합국을 막아낼 힘이 없었다. 십자군의 자라 약탈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자신들의 목표로 했던 자금력 회복에 성공하게 된다. 이제 십자군은 교황의 통제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때, 자라에 있던 십자군에게 의외의 제안이 들어온다. 폐위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이자 알렉시오스 3세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황자가 십자군에게 연락을 한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 이스탄불)를 함락하고 자신을 황제로 등극 시키면 20만 마르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대가로 지불하고, 향후 이집트 원정을 위한 병력까지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난공불락의 요새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이라는 엄청난 과제였지만 보상 역시 상당했다. 교황은 이런 황당한 제안에 당연히 반대했지만, 십자군 지도부는 교황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게다가 베네치아 공화국 역시 원래 동로마 제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라 알렉시오스 황자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결국 돈의 유혹에 이기지 못하고 십자군은 그의 요청을 승락하고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한다.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지 정확히 1년이 지난 1203년 6월 24일 원정군이 마르마라 해에 도달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미 원정 시작 전에 교황으로 부터 자신의 조카인 알렉시오스 황자를 지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십자군은 교황의 말을 듣지 않았고, 황제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그 명성 답게 공략이 쉽지가 않았다.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병사를 출력시킬 본진을 구축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약 한달간을 떠돌아 갈라타를 간신히 정복하여 병력을 주둔시키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3세와 십자군 사이의 본격적인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3차 십자군 총사령관으로 참가 했을 많은 전쟁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다. 베네치아 십자군 연합군이 해상에서는 매우 강력하지만 육로에서 맞붙게 된다면 제국군이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최대한 십자군이 육상으로 올라오기를 기다리면서 양동작전을 통해 그들의 해상 함대를 공략하는 작전을 세웠다. 이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반드시 수도를 함락해야 돈을 받을 수 있는 십자군에 비해 제국군은 상당히 여유로웠다. 이들은 육상에 참호를 파고 십자군이 자신들의 지형으로 오길 기다렸다. 결국 십자군은 알렉시오스의 전술에 크게 당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실패하게 된다.
근데 문제는 베네치아 군대가 퇴각하면서 발생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들의 퇴각을 지연시키려는 목적으로 퇴각 경로에 불을 질렀는데, 이것이 삽시간에 대화재로 번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번지게 된 것이다. 결국 제국의 귀족과 시민들을 황제를 맹비난하게 되고 자신이 황제가 될때 처럼 다시 한번 시민들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다. 그는 1203년 7월 18일 새벽 자신의 딸과 함께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아드리아노플에서 십자군에 대항하기로 한다. 그 사이 십자군과 알렉시오스 황자는 궁궐을 차지했고, 아버지이자 선왕인 이사키오스 2세와 같이 공동 국왕에 오르게 된다. 공략 자체는 실패했지만 어찌되었는 알렉시오스 4세는 왕권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고, 십자군에게 20만 마르크를 보상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4세
왕위에 오른 이사키오스는 이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아들 덕에 제위를 회복하긴 했는데 제국의 입장에선 절대 내놓을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을 빚으로 떠안게 된 것이다. 십자군은 돈을 받을 생각에 기뻤지만, 돈을 줄 수 없는 황제 입장에서는 차일 피일 지급을일 미루게 된다. 더군다나 아드리아노플에서 서서히 군대를 모아 회복을 시작한 알렉시오스 3세가 언제 남하할지 모르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가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선 십자군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결국 시민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물리기 시작하고 시민들은 다시 한번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비난을 감수하고 어떻게든 돈을 모아 약 10만 마르크를 십자군에게 지불하게 된다. 알렉시오스 4세는 자신이 알렉시오스 3세를 잡아 아드리아노플의 자금을 뺏어올 생각으로 원정을 떠났지만, 그에게 대패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게되자 시민들은 더이상 참을 수 가 없었다.
결국 지방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주동자는 알렉시오스 3세의 딸인 에브도키아의 남편인 알렉시오스 두카스였다. 그는 황제 부자를 구금했고, 이 과정에서 이사키오스 2세는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황위에 올라 알렉시오스 5세를 자청했다. 선왕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였던 알렉시오스 5세는 당연히 십자군의 20만 마르크 요구를 무시했다. 그는 다시 군대를 모아 십자군에 대항할 준비를 한다. 결국 십자군 입장에서도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양측의 전쟁이 다시 한번 시작된다.
1204년 4월 8일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이 재개되었다. 돈을 받지못한 베네치아-십자군 역시 분노에 휩싸였고 타국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제국의 병사들 역시 광기에 휩싸였다. 연합군은 호기롭게 공략에 나섰지만 제국의 성벽은 여전히 높았다. 이틀에 걸친 공략에도 불구하고 성은 건재했다. 교황은 계속 제국에 대한 공략 중단을 요청했지만, 전혀 들을 십자군이 나이었다. 오히려 교황의 특사를 죽이고 공세를 이어갔다.
황제와 시민들 역시 제국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당시 최고의 강대국 중 하나였다. 이들은 이집트 공략을 위해 최고급 기술을 사용한 공성무기를 제작했다. 결국 이 무기들로 인해 점차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은 무너져갔다. 성벽이 무너지자 황제는 시민들을 버리고 도망갔다. 전의를 잃은 병사들은 저항 의지를 잃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베네치아-십자군 연합에게 무너진다.
1204년 4월 13일 성내로 십자군들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이제껏 모든 십자군들이 그랬듯이 타국에 오랜 기간 머물르며 배고픔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남은 건 광기 뿐이었다. 이들은 도시에 있는 사람과 건물 모두 파괴했다. 돈이 되겠다 싶은 물건들은 모두 챙겨갔다. 이들의 화풀이 대상은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 시민이라는 이유로 마구 사람을 죽이게 되었다. 이들이 약탈한 물건 중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유골도 존재했다. 대 학살을 3일간 지속되었고, 동로마 제국의 유물들은 모두 십자군의 손에 들어간다. 도시는 폐허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막대한 자금을 충당한 베네치아와 십자군은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가다.
십자군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이들을 보두앵 1세를 새로운 황제로 세워 라틴 제국을 성립한다. 테살로니카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베네치아-십자군 원정군에의해 만들어진 괴뢰국이었던 만큼 베네치아 공화국의 간섭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 반도 동부 지역은 이피로스 친왕국이, 아나톨리아 서부엔 니케아 제국이, 크림 반도 부근에는 트라페준타 제국에 성립되었다.
이번 원정으로 가장 큰 소득을 본 나라는 베네치아 였다. 이들을 달타미안을 비롯해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 크레타 섬을 모두 차지하고 동로마 제국의 중심부에 괴뢰국인 라틴 제국을 만들어 지중해 동부 대부분을 차지하며 중세 말기 최고의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들은 약 200여년 후 오스만 제국이 성립되어 옛 동로마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빼앗길때까지 그 명성을 쭉 이어간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제국의 분열과 유산의 파괴를 야기한 동유럽의 재앙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4차 십자군 원정은 십자군 원정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원정이다. 이교도를 몰아내기 위해 모인 군대가 이교도는 한명도 안죽이고 죄다 같은 정교회 사람들을 죽이는데만 동원되었다. 그것도 뭐 대단한 명분이 있던것도 아니고 단순히 자신들의 돈을 벌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간 것이다. 즉, 교황이 성지 회복을 위해 군대를 소집했지만 모인 군대는 교황을 위해 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들의 목적은 자금력과 명예를 얻어 본국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딱 그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약 800여년을 지속해 온 동로마 제국의 화려한 역사와 유물들을 모두 불타 사라지고 만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강대국들이 돈을 벌기위해 모여 다른 부유한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막대한 전쟁 비용을 부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들은 국가적인 깡패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간신히 유지되던 이슬람과 서방세력간의 힘겨루기가 완전히 무너져버린데 있었다. 중세에 동로마 제국의 역할을 매우 컸다. 6세기 이후 나날이 강대해져갔던 이슬람 세력의 유럽 진출을 막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동로마제국의 존재였다. 이들은 그리스 정교회 소속이기는 했지만, 국경에 무슬림들을 맞대고 있었던 만큼 그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다. 십자군 국가들이 레반트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슬람에 대해 공부했듯이 동로마 역시 자신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필요해 의해 다른 무슬림과 동맹을 맺고 이간질을 하며 국가를 지켰다. 문제는 이 동로마 제국이 무너지게 되고 이슬람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베네치아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시작되었다. 결국 베네치아는 14세기 세워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무너지고 이스탄불을 물론 발칸반도 대부분을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기게 되면서 서방 세력을 크게 축소당한다.
특히나 동유럽과 서유럽 세력이 다시한번 반목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한다. 로마 제국이 분열된 이후 원래 양측 세력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하지만 1차 십자군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구원 요청을 서방 정교회가 들어주면서 양측의 대통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 이후 약 200년간 위험한 순간도 많았지만 형식적으로는 양측의 정교회과 손을 잡으며 대통합이 실제로 가능한 순간까지 왔다. 하지만 이번 원정을 끝으로 양측은 완벽히 갈라진다. 두 세력을 되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다. 동유럽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종교에 대한 회의감을 크게 느꼈고, 훗날 오스만 제국이 동유럽을 정복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슬람으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종교 없는 종교 전쟁.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 더러운 전쟁이 바로 4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지중해의 새로운 지배자 베네치아 공화국의 등장
베네치아가 훗날 오스만에게 대부분의 동유럽 영토를 빼앗기게 되지만 이는 지극히 결과론 적인 이야기다. 베네치아 공화국 입장에서는 주변 국은 제노바와 계속 다투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 반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들이 십자군 원정에 대해 원조를 약속한 이유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에서 였다. 그리고 이들은 최고의 해상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십자군이 먼저 거액의 돈으로 기술력을 사고 싶다고 제안을 해온 셈이었다. 이들에게는 최고의 반전 카드였다.
그리고 이 도박은 성공으로 이어졌다. 실패했다면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 질 뻔 했으나, 돈과 막대한 영토를 거둬들이는데 성공하며 중세 후반 유럽 최고의 강대국으로 등극한다. 이들 입장에선 4차 십자군 원정은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전쟁이 끝나고 붙여진 별명이 '동지중해의 여왕' 이었다.
결국 이때 가진 우위를 바탕으로 최고의 라이벌 제노바 공화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양국 모두 당대 최고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원정 이전엔 제노바가 우위였다면 원정 종료 후 베네치아가 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게 된다. 2세기에 걸쳐 양국은 전쟁을 수행하고, 오스만이 발칸반도에 오기 전까진 계속 전쟁을 이어가게 된다. 이후 베네치아 공화국은 다시 예전의 영토로 축소되어 국가의 명백만 이거나는 수준에 그쳤고, 나폴레옹이 침략함에 따라 완전히 멸망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지금은 다들 아시다시피 베네치아의 영토 대부분은 이탈리아가 보유하게 되었다.
15~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 강역
총평
단언컨대, 최악의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슬람 정복하라고 만든 군대인데, 이슬람 지역은 단 한군데도 가지 않고 애꿎은 동유럽 세력만 괴롭히며 전쟁이 끝났다. 군대가 추악해지면 얼마나 추악해지는지 보여주는 최악의 전쟁으로 끝이 났다.
유럽 전체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 손실이 엄청났다. 우선 동로마 제국의 유산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난공불락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최초로 무너지게 되었다. 동서방 정교회의 통합이 가시화 되고 있는 시점에서 양측의 화합은 단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이슬람 세력의 방파제, 동로마 제국이 무너져 동유럽 세력이 무너져갔으며 십자군 국가를 도와줄 세력이 아예 사라졌다. 교황이 다시 십자군 국가를 구하기 위해 십자군을 재차 결성했지만, 이집트 원정에 실패하고 처참하게 돌아오게 된다.
이후 등장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유럽 세력들은 아시아와 교역하기 위해 지중해를 통해 들어가는 길목을 완전히 차단당한다. 근세 초반 인도가 유럽의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게 되면서 인도로 향하는 교역로가 필요하게 된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지중해-레반트-인도 코스가 오스만에 의해 차단당하게 되자. 이들은 신항로에 대한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후 지구는 둥글다라는 가설에 따라 사람들은 인도로 향하기 위해 동쪽이 아닌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하던 서쪽으로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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